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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22화 (22/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2

나는 벌떡 일어났다. 설마 리노아에도 전쟁을 하러 가는 것인가. 첩자가 있다는 걸 이미 공공연히 드러냈으니까? 시기를 놓칠 것 같아서 그런가. 그 잠깐 사이 선전 포고를 벌써…? 나는 또 인질로 잡혀가는 건가. 수많은 생각이 삽시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리노아에…. 선전 포고하셨나요?”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그렇게 서 있으면 위험하다. 앉도록 하지.”

“폐하 제발, 리노아와의 전쟁만은….”

두 눈에 물이 차올랐다. 나는 흡사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순식간에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이러다가 조울증이라도 오지 않을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니 감정변화가 널을 뛰는 것 같았다.

“그럴 일 없다. 리오니. 제발 진정하고 앉아. 응? 위태위태해서 보기가 힘들다.”

“전쟁…. 안 하시는 거죠?”

황제가 내 손을 잡고 밑으로 당겼다.

“절대 안 해.”

“약속해 주세요. 폐하. 절대로 리노아와 전쟁하지 않겠다고 제발 약속해 주세요.”

“약속할 테니깐 울지 마라.”

결국, 그가 내 어깨를 가볍게 내리누르며 마차에 앉혔다.

“좀 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제국이 리노아를 칠 생각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더 이상 그것에 대해 그대가 충격받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가 그것 때문에 놀라서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건가. 당신이 리노아를 칠 거라는 건 내가 샬리오니라는 걸 깨닫자마자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샬리오니가 되고 처음에 받았던 충격은 이미 완화된 뒤였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단지 그 큰 줄기에서 파생된 가지에 불과했다. 이 모든 걸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내가 언짢은가. 그대가 이 일로 나를 멀리하게 될까 봐… 걱정되는군.”

그가 다시 검지로 무릎 위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다 해도, 그것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자 거북함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그런데 리노아에 전쟁도 아니고 왜 가는 거지. 투알린과의 전쟁은 어찌 되었지? 황제가 그 사람들을 다 죽였을까. 한번 생각이 물꼬를 트니 또다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황제가 내 주의를 끌었다.

“아레인과는 무슨 사인지 알려줄 수 있나.”

아레인의 이름을 듣자 겨우 진정되던 가슴이 또 욱신거렸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이렇게 크구나. 누군가 내 심장을 할퀴고 간 것 같다. 우리를 호위할 때의 그를 생각해 보면 정말, 첩자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극진한 행동들이었다. 언제나 믿음직스러웠고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며 살펴주었었다. 첩자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아, 그래서 첩자인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겪는 모든 것들이 처음이고, 깨어난 그 순간부터 줄곧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깨어나 주변의 상황을 깨달았을 때, 허허벌판에 의지할 곳 없이 나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누구라도 붙잡고 싶었고, 의지하고 싶었다.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았던 상황에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드러내지 않고 꿋꿋이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그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많이 의지했고 정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는 있다. 제국은 리노아를 노리고 있고 그에 따라 첩자도 있다는 것을. 그간 왕국들의 관계를 생각하며 지극히 유추해 온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첩자와, 알고 지내며 신뢰를 나눈 사람이 뒤늦게 첩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머릿속은 인정하라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를 거부한다. 역시나 믿기지 않는다. 잠시간 아레인에 대해 생각했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황제가 앞에 있었기에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

“리오니?”

황제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이 늦어질수록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는 기사고 나는 공주일 뿐이지 않나. 그것도 이제는 신뢰가 모조리 깨어져 부스러진 파편밖에 안 남은.

“그대와 아레인은 껴안고… 있었지 않나. 친밀해 보였어.”

“기뻐서요. 다시 만나니 반가웠죠. 그는 믿을 수 있는 좋은 기사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차갑게 덧붙였다.

“아레인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폐하.”

여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제발 아레인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했다. 그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니.”

“네. 폐하.”

“샬리오니 롯트 리노아.”

그가 나를 풀 네임으로 부르자 자연스럽게 투알린 드레스를 입은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내가 그를 속인 것을 추궁하려고 하는 걸까. 그는 무표정했고 나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다들 그대를 샬리라고 부르더군. 리오니가 아니라.”

“네. 폐하. 제 이름은 샬리오니이고 저를 아는 사람들은 샬리라고 부릅니다.”

그때의 상황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은데.”

“네?”

“나도 그대를 샬리라고 부르고 싶다.”

“그…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불러 주세요.”

무난하게 답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당황했다. 추궁당하며 몰아붙이는 걸 생각하고 있어서 잔뜩 졸아 있던 참이었는데. 그가 갑자기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잘 정돈된 머리칼을 한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매끈하게 잘 넘긴 포마드 헤어스타일일 때는 금욕적이더니, 저렇게 흐트러트리니 또 다른 관능적인 모습이 묻어났다. 감상은 뒤로하고 그가 왜 저러는지 의문이었다.

“나도….”

한 번도 그가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섣불리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뺨이 미약하게 붉어져 있었다.

“이름을 불러 줘. 폐하 말고.”

폐하 말고 이름을?

“카시… 카프?”

나도 모르게 얼떨떨해진 채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흐트러진 모습, 그 상태 그대로 꽃처럼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다니. 나는 카시카프의 모습을 담지 않으려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갑자기 이마 전체를 따뜻한 온기가 감싸 안았다. 내가 눈을 뜨자 그가 몸을 내 쪽으로 숙인 채,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어지러운가.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마차 안이 비좁은 탓에 겨우 한 뼘 물러설 뿐이었다. 등을 마차 벽에 바짝 붙인 채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 행동을 본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피하지. 경계는 다 풀린 것 아니었나? 너무 놀라는 거 같은데.”

나 고양이 아니라니까.

“이… 이건 경계랑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그가 피식 웃으며 멀어지자 그제야 바짝 올라붙었던 어깨에 힘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눈이 동그래졌어. 토끼 같군.”

또 동물 취급인가. 그가 빤히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우리 어디로 가는…. 아, 리노아로 가고 있다고 했지. 도대체 왜?

“저는 리노아 사람이지만 폐하는 어떤 연유로 리노아를 방문하시는 건가요?”

아직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지만,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을 믿었다. 그가 나를 한참 보더니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그의 잘생긴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입은 열릴 생각도 없이 꾹 다물려 있었다. 대답하기 싫은 건가. 다시 질문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혼….”

“네?”

“리노아에 가는 이유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리노아에 가는 이유가 청혼 때문이라고? 누구한테…? 설마 나?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황제가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의 커졌던 동자가 차츰 사그라지면서 표정도 다시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샬리.”

굉장히 딱딱한 목소리.

“네. 카시카프.”

“왜 그렇게 놀라. 싫은 건…. 아니지?”

“청혼이요?”

“…….”

방금 그 청혼이라는 한마디가 프러포즈는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나왔다.

“저한테요?”

“그럼. 리노아에 그대 말고 누가 있지.”

나 말고 이런 청혼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당사자랑 눈도 안 마주치고 밖을 바라보면서 누구와 하는 건지 주어도 빼먹는 프러포즈라니. 당황스럽던 마음은 황당함이 되었다가 이내 미약한 분노로 바뀌었다.

“방금 저한테 청혼한다고 말씀하신 거 아니죠?”

“맞다.”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보다 못한 그 멘트 말인가요. 적어도 식사했냐고 물어보거나 안부 인사 물어볼 때도 눈은 마주치면서 말하는데. 창밖을 바라보면서 청혼 딱 한 마디 한 거 사실입니까? 점점 더 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다 누군가 찬물을 부어 버린 것처럼 한순간에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내가 계획했던 갈래 중 하나였다. 직접 어떤 사람인지 살펴본 그는 실제로 확인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최악을 가정했던 것에 비하면 나쁜 정도가 아니라 충분히 좋았다.

그도 내가 마음에 들었으니 청혼 얘기를 꺼냈을 것이다. 그와 결혼을 하게 되면 나도 생존을 보장받고, 리노아 왕국도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되니 내가 바라던 결과이긴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씁쓸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다 저랑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는데요?”

그의 동공이 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거야? 지금 누가 더 당황스러운데. 오늘 참, 황제의 의외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 같은 건 절대 남에게 안 보일 사람 같은데 말이다.

“저를 왜 좋아하는지는 알아내셨어요?”

“그대가 곁에 없다는 게 끔찍하다는 건 알아냈지.”

점점 의문스럽고 미묘해지는 이 기분을 저 사람이 알려나. 그래. 저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이 이상 뭘 더 바랄 게 있다고 그러지.

처음의 목표를 달성했으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 아닌가. 저승으로 가는 티켓을 환불받았고 이 시대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소국의 공주가 제국의 황제와 결혼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조건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내 속마음과는 다르게 계속 입 밖으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곁에 있는 거라면 굳이 결혼할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제국으로 유학을 가도 되죠.”

“그건 그렇…. 아, 그건 안 될 말이지.”

그가 그 말에 수긍하려고 하는 순간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대가 다른 놈과 결혼하면 나와 같이 있을 수가 없지 않나.”

그게 이유인가요. 점점 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낮게 가라앉았다.

“다른 놈하고 결혼한다니, 절대 그건 안 될 말이지. 결혼은 나와 한다. 다른 놈들은 안 돼.”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짙푸른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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