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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21화 (21/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1

* * *

황제는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답지 않게 흥분한 것처럼 서성이며 제자리를 돌고 있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아레인, 그대는 나와 함께 자랐으니 알 테지.”

그는 서두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눈치로 따라잡을 수밖에 없다.

“폐하께서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여자들을 썩 내켜 하지 않는 건 그대도 알지.”

황제는 여자들에게 흥미가 없었다. 나는 가끔 그가 남색을 하는 것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여성분이라도 생기셨습니까.”

내 말에 그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저런 모습도 처음 본다.

“투알린 귀족 같은데, 눈이 정말 마음에 들거든. 항상 진흙탕처럼 흐리고 더러운 눈들만 보다가 그렇게 맑은 눈을 보니깐 좀 새로워서 말이야. 마치 사슴 눈처럼. 보통 동물들이 그런 사심 없는 눈망울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는 내게 한창 말을 쏟아 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여성분이 동물 같은 눈을 가져서 좋다는 말씀이신가.

“사슴 같은 눈을 가져서 좋으시다고요?”

“하는 행동들도 꼭, 작은 동물처럼 귀여운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어쨌든 내가 보아온 귀족 영애들이랑은 확연히 다르지.”

사슴 같은 눈을 보고 반하셨고, 작은 동물 같은 행동에 귀여움을 느끼신다고? 언제나 이상하셨지만 예뻐서 좋다는 건지, 아니면 동물 같아서 좋다는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여성분을 좋아한다는 정의에서 핀트가 좀 엇나가신 것도 같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다가 문득 걸리는 것이 있어 황제에게 물었다. 사라진 공주가 투알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투알린 귀족 영애가 누구인지는 알아보셨습니까?”

“아니, 지금 그냥 딱히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어서 말이야. 필요하면 그때는 알아보겠지. 이름은 알아. 리오니.”

리오니라고. 나는 속으로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속이 꽤 불쾌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폐하, 그분을 잡아두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계속 서성이며 말하던 그가 내 말에 뚝 멈추어 섰다.

“내보내고 싶지 않다. 돌려보내고 싶지 않거든.”

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의 음색을 담아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이만 돌아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리노아 왕국의 일을 처리하던 중이라서 오래 자리를 비우기가 곤란합니다.”

“뭐 그곳도 곧 이지. 좋아. 나가 봐.”

나는 황제의 손짓에 빠르게 황제의 궁을 벗어났다. 이 술렁이는 기분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어 잠시 가슴에 손을 올려 진정시키려 했다. 내가 황제궁을 스쳐 지나면서 그 투알린 귀족 영애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황제궁 바로 옆에 딸린 작은 궁 있잖아. 거기에 지금 여자가 들어와 있대.”

“뭐? 난 처음 듣는 소린데?!”

“시종장님이 계속 오가며 봐 주신다고 하던데, 폐하의 연인이라고 소문 난 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걸?”

시녀 두 명이 내게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지 지근거리에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궁 말인가. 나는 황제궁 바로 옆에 딸린 작은 궁을 바라보았다. 아닐 수도 있다. 정말로 투알린 사람일 수도 있지.

하지만 내 직감이 이상하게 그곳을 가리켰다.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가면 그만이다. 만약 갇혀 있는 것이 샬리오니 공주라면…. 나는 황제에게서 리오니라는 영애를 잡아두고 있다고 들었지, 리노아 왕국의 샬리오니 공주라고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것은 명령 불복종이 아닌 셈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일 것에 대비해 기사를 불러 로브를 준비하고 수리검들을 박아 넣으며 창문을 깨고 올라갔다.

방 안에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인영은 샬리오니였다. 눈만 보였지만 그녀였다. 사슴 눈망울이라고.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를 보자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없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꽤 좋아하고 있음을. 그녀가 황제에게 잡혀 있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녀를황제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것까지.

하지만 나는 절망적인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샬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이 상황 말이다. 황제가 샬리와 같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황제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지만 그게 다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아레인.”

나는 황제를 거역할 수 없었다. 제국에 대한 내 충성심이 이렇게나 높았었나. 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 * *

황제가 아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왜 황제는 아레인을 마치 아는 사람처럼 부른 걸까.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아레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레인…?”

체격부터 힘까지 차이가 너무 커서 나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을 밀어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밀수록 그는 더 꼭 끌어안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무사한 것을 보고 기뻐서 잠시 끌어안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도 아레인을 다시 만나 기뻤으니 말이다. 그렇게 안 놔줄 것처럼 나를 끌어안고 있던 그가, 어느 순간 힘을 빼며 내게서 떨어졌다.

“폐하…. 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아레인이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갑자기, 화가 치솟아서 말이야.”

황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냉기가 서린 것처럼 주변을 차갑게 만들었다. 그들의 대화가 기묘했다. 마치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눈앞에 들추어내는 느낌이다. 둘이 마주 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해 보였다. 한두 번 말을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그 내용이 마치,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지. 정말 그럴 리가….

속에서 뜻 모를 거부감이 일었다. 그들의 한겨울 같은 대치 상태가 내 상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아레인이 그럴 리가 없지 않나.

“폐하, 아레인을 알고 계시나요.”

황제가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지…. 왜 아레인의 이름을 부르셨는지, 설명해 주세요.”

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내 몸이 휘청이며 흔들렸다.

“샬리-.”

아레인이 나를 받쳐 들었지만 나는 단번에 그를 밀어냈다. 그 반동으로 나는 반대편 쪽으로 몸이 기울기 시작했다.

황제가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두 팔을 뻗어 그와의 거리를 벌리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두 손을 밑으로 내려 쥐고 벽에 기대어 섰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 줘. 나는 아레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황제가 나를 반대쪽으로 돌려세우며 시야를 차단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레인은 내 친위대다.”

“아니에요…. 아레인은 1년도 넘게, 아니 몇 년이 넘도록 리노아의 기사단장이었는데요.”

제국이 정복 전쟁 계획을 세운 건 1년이 조금 지났다. 하지만 아레인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리노아에 있었다.

“아레인…. 아레인이 설명해 주세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샬리, 나는….”

황제가 손을 들어 아레인의 말을 막았다. 아레인 본인에게서 직접 진실을 듣고 싶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 하자, 황제가 다시 나를 붙들었다.

“그래, 그는 몇 년 전부터 리노아에 있었다. 궁금한 건 나한테 물어.”

궁금한 건 셀 수도 없다. 하지만 그건 황제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레인과 대화하고 싶어요.”

“안 돼.”

왜 안 돼. 지금 내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아레인은 기사단장이었다. 기사단장. 지금도 아레인의 뒤로 도열해 있는 호위기사 스무 명은 이 상황에 미동조차 없었다. 그들은 이미 아레인이 제국의 첩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리노아에도 첩자가 많을 거라고는 예상하였다. 그런데, 그게 아레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몇 년 이상을 리노아의 기사단장으로 있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 아레인이 기사단장으로 재임한 후 기사단의 실력이 매우 빠르게 늘었다고 들었다. 기사단은 그의 손발처럼 움직이며 흐트러짐이 없었고 행동거지 또한 올바르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국왕에게 순종적인 자세로 신임을 얻어내, 아바마마가 군사권을 대부분 일임했다고 들었다.

리노아를 포함한 주변 왕국들은 카시카프 황제가 즉위하기 전까지 오래도록 전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군사권을 넘긴다는 것은 명목상 그를 매우 신임하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가 제국에, 그것도 황제의 친위대라니. 아레인이 칼을 거꾸로 세우는 순간, 리노아 왕족들은 반항 한 번 못하고 그 칼침에 거꾸러지게 되는 것이다. 베고니아를 침몰시키는데 한 달, 리노아는 일주일이 뭔가. 하루 만에 왕족이 넘어갈 것이다. 최우선인 왕족만 제거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일 테니….

나는 그가 우리를 호위하고 지킬 때 항상 진심이 느껴졌기에, 단 한 번도 그가 첩자일 거라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레인, 그에 대한 배신감이 철철 흘러넘쳤다. 믿기지 않았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긴장감과 연달아 충격적인 일을 덮어쓰니 내 몸과 정신이 견디지 못했다. 점차 의식이 흐려지며 몸이 무너져 내렸다.

* * *

두통이 일었다. 눈을 뜨자 꽤 낮은 둥근 형태의 천장이 보였다. 곁눈으로 보이는 창문에서 바깥의 배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마차 안이구나. 굉장히 폭이 넓은 마차였다. 내가 편히 누울 수도 있을 만큼.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황제가 보였다.

“폐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헛기침하며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일어났나.”

“마차 안이네요. 저 오래 누워있었나요?”

어디로 이동 중인 걸까. 제국으로 가는 건가?

“아니. 몇 시간 안 되었다.”

그는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 쓰러지기 전의 일 때문인지 우리 사이엔 긴장감이 흘렀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만이라도. 그처럼 나도 무표정이길 바랐다. 나의 하찮은 멘탈이 중요한 논점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마차가 안 흔들리네요.”

혹시나 원치 않는 대화가 시작될까 싶어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마차는 마치 세단을 타고 있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참 이상했다. 아무리 쿠션감이 좋은 의자라도 마차를 탈 때마다 엉덩이가 아파 고역이었는데.

“흔들림 방지 마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래.”

그럼, 지금도 마법사가 계속 마법을 걸고 있단 말인가. 마차 타기가 고역스러워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마차에 흔들림 방지 마법을 사용하려면 마법사가 꾸준히 마법을 걸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실제로 잘 행하는 마법이 아니었다. 고급 인력인 마법사를 마차에 흔들림 방지 마법으로 이용하다니. 제국에서 일하는 마법사는 중노동으로 고생하는구나 싶었다. 황제는 무릎 위를 검지로 빠르게 두드렸다. 초조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습관 같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리노아.”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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