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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20화 (20/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0

* * *

그녀는 항상 가볍게 사람을 사귀어 왔고, 그랬기 때문에 나 또한 부담 없이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는 공주와 사귀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조금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국이 리노아를 친다면 나는 그녀를 보호해 줄 수 없을 테니까. 일말의 죄책감이라고 할까. 나에겐 언제나 제국이 최우선이었다.

밝게 자란 사랑스러운 공주님이라도 그뿐이었다. 그랬었는데, 그녀가 쓰러지고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왕세자는 내게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나는 완전한 남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딱히 미련은 없었다. 최근 우리 사이는 지지부진하기도 했고. 그녀의 근황이 어떤지는 숨만 쉬어도 알아서 내게 전해져왔다. 최근에는 그렇게 하기 싫어하던 공부에 열을 올린다고 한다.

공주궁의 정원에 있는 우뚝 솟은 큰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종종 공주와 같이 점심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아름드리나무는 가지가 꽤 굵고 높아서 시야가 탁 트여, 휴식을 취하기에는 꽤 좋은 장소였다. 나는 그녀가 쓰러진 후에도 종종 여기서 머무르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튼튼한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나무 기둥에 반쯤 기대어 다리를 쭉 늘어뜨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기억을 잃었다던 공주가 나무 밑동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꽉 쥐고 오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녀는 밑동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잔디들을 손으로 잡아 뜯기 시작했다.

“왜…. 왜 하고많은 사람 중에 난데! 나 혼자만 그 책을 읽은 것도 아닌데!”

그녀는 화풀이하듯 했던 말들을 반복했고, 풀들을 한 움큼씩 쥐어뜯으며 주변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공주의 엉뚱한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공부하기 힘든가. 그렇게 싫어하더니 왜 스스로 하겠다고 해서 저 난리를 부리는지 모르겠는데. 그녀가 하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날을 기점으로 몇 번 그렇게 만나는 일이 더 있었다. 물론 내 쪽에서만 만남이지만 말이다. 혹시 내 모습이 보일까 싶어 나는 이파리가 무성한 더 높은 가지 위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녀는 매일 나무 밑동에 와서 혼잣말로 하소연을 하고는 했다. 그녀가 작은 양손을 동그랗게 꽉 쥐더니 나무 기둥을 때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화풀이인가. 웃음이 나와서 참느라 혼이 났다. 앉아 있는 내게는 진동 하나 없어서, 저게 분풀이가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말없이 한참을 죄 없는 나무를 내려치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곧 그녀의 드레스에 풀물이 들었다. 드레스를 끔찍이 아끼던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즈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고 싶어…. 원래 있던 곳으로….”

그녀는 훌쩍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본래 있던 곳이 이곳인데 어디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인지.

최근 받아본 보고로 그녀의 행동은 엉뚱하고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잠시 내용을 가늠해 보다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그날 그녀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채 한참을 그렇게 숨죽이며 울었다. 내려가서 그녀를 위로해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관찰하게 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내 휴식처를 바꾸지 않았으니 매번 마주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샬리오니 공주와 거의 반년을 사귀었었다. 최근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오히려 예전보다 더 그녀에게 호감을 품게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스럽고 천진난만한 분위기의 예전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여전히 사랑스럽긴 했지만 엉뚱하기도 했고 혼자서 심각해지기도 했으며, 가끔 침체되고 가라앉은 모습도 여러 번 보이곤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그녀의 본 모습일까.

나는 어느새 나뭇가지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는 일이 하나의 일과처럼 되어 버린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참 묘한 기분이었다.

공주는 나의 존재를 모르는데, 나는 그녀가 혼자서 끙끙대며 마음을 삭이는 모습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자,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도 눈을 감고 나무 기둥에 기댄 채로 들려오는, 공주가 사뿐사뿐 다가오는 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하아…. 황제가 어떤 인간인지 한번 보기는 해야 하는데.”

그 혼잣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가 황제에게 관심 가질 만한 일이 있었나? 혹시 황제에 대한 어떤 소문을 듣고, 만나보고 싶어지기라도 한 건가? 또 하려고? 그 가벼운 만남을 반복할 것인가. 그것도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크게 실망하는 한편, 속에서 무언가가 힘을 잃고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듯한 낭패감에 빠졌다.

“황제가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아예 우리가 선수를 치고 속국으로 들어가는 건 어떨까….”

실의에 빠져 있던 내가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한데, 내가 매국노 철부지 공주님으로 낙인찍혀 버린다는 게 큰 문제네. 무시당하기만 하면 양반이지. 역시 이건 최후의 차선책으로 남겨둬야겠다.”

무엇을 알고 저렇게 말한단 말인가. 그녀의 말대로 공주는 철부지라는 이미지에 갇혀있었다. 아무리 현재 맹렬히 공부에 열을 올린다 해도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명성이 있었다.

깨어나서 고작 한 달 만에, 무엇을 배웠기에 제국이 리노아를 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현재까지 공주의 달라진 행보를 주시하며 받아 본 보고에서는 공주가 제국의 정복 전쟁 계획에 대해 알만한 티끌만 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긴장이 풀어진 건가. 이런 단서 하나 잡지 못하고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지. 기사단을 다잡을 생각을 하며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사태는 꽤 심각한 내부 고발자가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황제가 믿고 있는 최측근 중에서.

* * *

내가 한 달 만에 나타나 연인이었다고 주장하자 공주는 예상대로 꽤 당황하기 시작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그녀의 기억에서 잊혔다고 생각하자 썩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기사단들에는 기합을 주고 긴장감을 고조시킨 참이다. 그녀에 대한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보고로 들어오고 있었다.

공주는 혼잣말했던 그 위험한 발언을 다른 이들에게 쉽사리 털어놓거나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있었다. 공주는 대체 그런 고급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황제의 최측근과 최정예들만이 알고 있는 그 정보를 말이다. 그리고 왜 혼자서 그 문제를 껴안고 끙끙거리고 있는 것인지. 평소엔 투명한 물속처럼 알아채기 쉽더니, 또 어떨 땐 하나부터 열까지 그 무엇 하나 속을 알 수 없는 공주님이었다.

계속 기다렸지만, 그녀는 내게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뿐이었나. 나는 또 왜 그것에 실망하고 있는 것인가.

“단장님, 왕세자와 공주가 제국의 승전 연회에 간다는 소식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공주궁 앞에서 서성이며 그녀를 기다렸다. 제국에는 대체 왜 가려고 하는 거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설마 혼자서 황제를 상대하며 무언가를 해 보겠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겠다는 건 아니겠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끌어안았다.

반쯤은 사귀었을 때의 습관이었고, 나머지 반은 그래야 내가 안도감이 들 것 같아서였다. 공주는 아주 확고하게 제국에 간다고 내게 통보했다. 그럼 나도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 * *

나는 제국에 오자마자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다.

“아레인, 오랜만입니다.”

시종장 테너가 나를 반겼다.

“폐하께서는 별고 없으셨겠지요.”

“아시다시피, 즉위까지 꽤 사건ㆍ사고가 많았습니다. 아레인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많았지요.”

그는 나를 책망하는 듯했지만,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간 세운 공이 크시더군요. 그 정도면 리노아는 거의 다 삼켜졌다고 봅니다. 해서, 폐하께서는 리노아를 가장 마지막에 치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에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밥상 다 차려놨는데 뭐 하러 나중에 먹는단 말인가. 리노아는 아마 한 달도 안 걸릴 것이다. 항상 최단 시간, 최대 효율을 생각하는 게 황제 폐하 아니신가.

“베고니아 다음으로 리노아를 치실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아레인 그대가 가능한 한 오래 있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폐하의 배려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꽤 섭섭하셨나 보군.

“제 휴가는 이제 끝났다고 봐야겠군요.”

테너는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밖에서 수다만 떨고 있을 거지?”

응접실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시지요.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나는 그를 지나쳐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갓 성년을 지났기에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완연한 남자였다.

“대체 몇 년 만이지? 나는 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줄 알았다.”

황제가 나를 보며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입꼬리 한쪽이 올라간 걸 보니 단단히 뿔이 나신 모양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장성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너무 늦었어. 아레인. 언제 적 얘기를 하나.”

멋쩍어진 내가 뒷목을 쓸자 황제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인데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고. 아아, 헨리도 부를까?”

그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도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가 헨리 질색하는 거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헨리가 들으면 서운해하겠군. 언제 돌아오냐고 어찌나 노래를 부르는지. 이번에도 리노아부터 치자고 성화였다.”

나는 자진 납세하는 심정으로 먼저 숙이고 들어가기로 했다.

“휴가 이제 반납하겠습니다.”

그가 눈가를 휘며 진하게 웃었다.

“잘 생각했다.”

딱히 휴가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 * *

샬리오니 공주가 사라졌다. 게다가 시녀 말에 따르면 공주는 투알린 드레스를 입었다고 한다.

“하아….”

나는 제국의 궁 밖을 샅샅이 뒤졌지만 역시나 샬리오니 공주는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왕세자가 공개수사를 요청한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 일은 분명 제국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오히려 찾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렇게 되도록 일을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불편한가. 나는 또 왜 이렇게 열심히 공주를 찾고 있는 건지. 내가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렇게 쓸어내리시다가는 얼굴 가죽이 다 벗겨지겠습니다.”

“루이.”

오랜만에 보는 암영조의 루이였다. 지금은 나 대신 암영조의 조장이 되었겠지. 마음이 급하니 그에게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찬찬히 그 마음을 내리눌렀다. 황제의 친위대를 사사로이 부리다간 목이 날아갈 것이다.

“오랜만인데 암영조에 얼굴도 안 비추십니까.”

그가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황제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정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잊고 있었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이겠지만, 당연히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살아남으라고 하신 분은 조장님입니다만. 방금 그거 굉장히 무례한 말인 거 아십니까.”

“이제 조장은 넌데 아직도 조장 소리 하는 거냐. 그보다 무슨 일인데?”

그가 반갑다고 아무 용건 없이 나를 찾아올 리 없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바로 데려오라고 하시던데요.”

지금 공주를 찾는 게 더 시급한 상황이었지만, 내게는 언제나 황제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나는 찝찝한 기분을 얼른 배제하고 루이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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