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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19화 (19/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19

* * *

딱 죽을 줄로만 알았던 페리안이 뼈만 부러지고 만다고 하니 왕족과 귀족들이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치료로 다시 붙일 방법이 있으니 말이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나는 황제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을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폐하, 제 기사들을 구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리노아 기사들이 투옥되어 있어요.”

“그대를 지키지 못하고 갇혀있는 기사들이라면 쓸모없지 않나.”

그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안 구해 줄 건가 보다. 게다가 우리 왕국 기사들을 하찮게 보기까지 하고. 내 기사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그의 거절에 급속도로 자신감을 잃고 침울해졌다. 그럼 나 혼자라도 구해 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꺼내 주지.”

방금 전까지 거절해 놓고선 또 갑자기 꺼내 준다고요? 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꺼내 준다니까, 지금 가자고. 루카. 그들이 투옥된 곳으로 안내해라.”

“예. 폐하.”

우리 주변에 있던 불기둥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전히 고대 마법 병기를 어깨에 메고 위협적으로 서 있는 제국 병사들 덕분에 투알린 군사들은 하나같이 얼음이 된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을 다 잡아서 목을… 치지 말고 한곳에 모아 놔.”

“우리를 대체 어쩔 참이오?”

투알린 국왕이 모든 걸 체념한 채로 황제에게 물었다.

“협상이 내키지 않는 것 같으니 별수가 없을 것 같군. 충분한 기회를 주었으나 그것을 저버린 건 그대들이다.”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오!”

하지만 황제는 듣지 못한 것처럼 몸을 돌렸다. 또 다른 부관이 투알린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가 루카에게 턱짓하자 루카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리노아 기사들이 투옥 중인 곳으로 이동했다.

“여기입니다. 폐하.”

지하가 연결된 곳으로 루카가 먼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에 따라가던 우리는 아래로 내려간 루카가 누군가와 치고받고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황제가 내 팔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가지.”

한참 아래의 소란스러움이 끝나자 황제는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내 손을 마주 잡고 아래로 이끌었다. 루카는 쓰러진 투알린 감시병 둘을 벽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짤랑거리는 쇳소리를 내는 열쇠뭉치를 루카가 내게 건네었다.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나는 철창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철창 가까이에 붙어서 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도 꺼내 줘!”

“제발….”

어떤 사람은 다리를 절뚝였다. 나는 그들을 외면했다. 죄를 지어서 갇혀있는 사람들인데 어떤 일 때문에 잡혀 왔는지도 모르는 내가 섣불리 꺼내 줄 수 없었다. 물론 우리 왕국 기사들처럼 억울하게 갇혀있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 다 진실한지도 알 수 없는데 골라서 꺼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시간도 없을뿐더러.

황제와 루카는 말없이 나를 뒤따라 오고 있었다. 점차 안쪽으로 걷고 있는데 옥에 갇혀있는 웅크린 작은 인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웅크린 그것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새하얗고 기다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 와서 새하얀 머리칼은 처음 본다. 은발은 봤었는데 말이다.

“마녀로군. 왜 여기 있는지는 알 것도 같은데….”

내가 멈추어 서 그 아이를 보고 있자 뒤에서 황제가 말을 내뱉었다. 고저 없는 그 음성에서는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저 아이가 옥에 갇혀있는 걸 보니 부정적인 의미인 건 알겠다.

“마녀가 어떻기에 아이인데도 옥에 갇혀있나요?”

“그들은 신에게서 얻은 힘을 악한 목적으로 사용하며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루카가 내 질문에 답을 하며 그 아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뭐 틀린 말도 아니지. 그들은 본래 신탁을 받은 성녀이기도 하니 말이야. 투알린 국왕은 이미 저 녀석을 마녀로 판결 내렸나 본데. 여기 갇혀있는 걸 보니.”

이곳의 종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신 크리하엘을 믿는 것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깐 저 아이는 성녀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저 아이가 성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마음가짐에 달렸지. 신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웅크린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휙 들더니 독기어린 눈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난 아무 잘못 없어!! 사람들이 우리 엄마를 죽였단 말이야!”

“어떤 이유에서든 신력을 부정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꼬마야.”

루카가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자 아이는 입술을 악물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말을 유추해 본 바로는 엄마를 잃고서 신력을 안 좋은 방향으로 사용한 것 같다. 어미의 복수라도 한 것인가.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나 또한 그 아이를 안타깝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루카. 이미 부정적으로 힘을 사용하면 다시는 성녀로 되돌리지 못하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한번 그렇게 신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대부분 사악한 길로 빠지기 마련이지요. 그러기 전에 미리 제거하는 겁니다. 저 아이도 지금 구속구를 채워 놓아서 신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성녀는 신전에서 처리하는데 어째서 투알린 감옥에 갇혀있는지 모를 일이로군요.”

아이는 얼마나 심하게 우는지 이제 헐떡이며 숨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루카와 황제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할 수 없지. 지금 내 처지에 남을 거둘만한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더욱이 성녀니 마녀니 하는 것은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였다. 나는 그 아이를 지나쳐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자 드디어 아레인과 왕국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레인!”

나는 기뻐서 열쇠 꾸러미를 들고 철창 번호와 같은 번호의 열쇠를 찾아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샬리…!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요?”

“난 아무 문제 없어요. 멀쩡하니까 걱정 말아요.”

아레인의 말에 대답하며 열쇠를 맞추는 데 집중했다.

딸칵-.

드디어 문이 열리고 아레인이 나오자마자 나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걱정했습니다. 샬리-.”

갑자기 한겨울 바람이 등을 세차게 때리는 것처럼 뒤가 서늘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아레인?”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내 몸이 바짝 긴장으로 조여들었다.

* * *

리노아 왕국을 전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미 모든 군사권은 내 손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나는 여유롭게 때를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차근차근 그들을 궁지로 몰아붙일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녀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 상황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샬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황제의 경고 어린 음성을 듣고 있음에도 놓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 말이다.

* * *

“아레인, 리노아 왕국으로 가겠다고?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황태자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 나는 시종장에게서 황태자의 최측근으로서 키워졌다. 친위대 안, 암영조의 일원,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장이 되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암살과 독살, 목숨의 위협으로부터 함께했고 무수히 많은 우여곡절을 넘겨 왔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굳이 벌써부터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간다면 훨씬 더 일이 쉬워지겠지요.”

황태자는 턱을 괸 채 말이 없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잠시 휴가 다녀온다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아, 아레인. 그는 마른세수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도 알아. 지겹지. 미치도록. 너만큼 내 곁에서 오래 견딘 이가 있을까.”

황태자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귀족들과 외부의 위협을 받아 왔다. 그들의 권세는 이미 황권을 넘어서 있었다.

그의 말대로 함께 견뎌온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주위에 정을 줄 필요는 없었다.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으니깐. 황태자와 나 외에는 누구도 오래 살아남아 있지 못했다.

나는 지금 그를 외면하려 하고 있었다. 일탈이나 탈선으로 봐도 좋았다. 그게 무엇이든 제국만 벗어나면 좋았다. 제일 만만한 리노아 왕국에서 숨죽이고 기다리며 그가 황제가 되는 날만을 기다릴 것이다.

“잠시는 무슨, 몇 년이나 처박혀 있다 올 거지?”

“될 수 있으면 오래 있고 싶긴 합니다. 휴가 한번 없었지 않습니까.”

그가 픽 웃으며 나를 손짓으로 물렸다.

“일은 확실히 해.”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 무엇도 없는 건조한 헤어짐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십 년 이상 손발을 맞춰왔다. 아마 다시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그럴 테지. 나는 곧바로 암영조를 루이에게 인수인계하고 그에게 넘긴 후 리노아로 출발했다.

리노아 왕국에 잠입하는 건 쉬웠다. 몰락 귀족에 돈을 쥐여 주고 그들의 양자로 들어가 기사, 그리고 곧 기사단장. 그 이상 힘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딱 거기까지면 충분했다. 필요 이상의 과도한 무력은 왕권을 위협하고 모든 이에게 경계와 의심을 사게 된다.

황태자 곁에 오래 있어서 그런 건지, 너무 쉬워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천천히 기사단을 잠식해 나갔다.

내 말 한마디에 모두 왕실에서 돌아설 정도로 기사단의 수뇌부들은 통제받기 시작했다. 근위기사들을 통한 모든 왕궁의 정보가 내 손안에 들어온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멀리서 황태자의 황제 즉위 소식을 들었다. 이제 진정한 제국의 정복 전쟁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황제는 언제나 주변 왕국들을 하잘것없이 보았다. 위정자가 제대로 갖추지 못한 권력과 한쪽으로 치우친 고인 물은, 제국이든 왕국이든 나라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백성들을 좀먹게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제국으로 모두 통일한다. 황제가 되면 그가 가장 먼저 이룰 업적이었다. 왕국들은 저마다 오래된 관습과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썩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그대로 놔두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을 집어삼키기로 했다. 황제가 그렇게 결정했으니 우리는 그에 따를 뿐이다.

한참 풀어져 있던 나는 황제의 즉위 소식에 빡빡한 긴장감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뛰어난 외모로 주변 왕국에서 아름다움을 극찬 받는 샬리오니 공주와 사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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