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17
* * *
“차라리 내 목을 가져가십시오. 다만 투알린의 핏줄이 끊기는 일은 없게….”
"지금 그게 걱정되나? 이미 가져가려면 가져갔던 것을."
군사령관 블레인이 투알린 국왕을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왕국민이라면 차라리 제국에 편입되길 바랄 거다. 네놈 같은 멍청한 국왕을 뭘 믿고 살고 싶겠어. 지금 제 처지도 모르고 나불대는 게, 너도 참 운이 좋다. 원래였다면 네 목은 지금쯤 남아 있지도 않았어. 저 앞을 데굴데굴 굴렀겠지. 내가 처리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군단장 헨리가 투알린 국왕을 쏘아보며 비아냥거렸다. 설명하라고 했는데 둘 다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귀찮아서 문관은 안 데려왔더니. 황제는 그냥 제가 말하기로 했다.
"국왕은 잘 들어라. 저 불기둥이 왕국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쉬운 일이다. 지금 이렇게 마법을 유지하며 네놈들을 살려두는 일이 우리에게는 더 힘든 일이란 말이다. 그러나 왕국을 넘기면 목숨은 보장해 주지. 그게 싫다면 말하라. 전 베고니아처럼 왕족과 귀족들은 모두 목숨을 구명 받지 못할 것이다."
황제가 투알린 국왕에게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듯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피 안 보고 넘겨받으려니 귀찮다. 제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황제는 꾹 참았다. 투알린 국왕은 생각했다. 왕국의 군사들을 박박 긁어모았지만 사실 귀족의 사병들과 왕국민들의 병역 차출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확실히 모조리 끌어모았더라면…. 아마 그렇게 했어도 제국에는 안 되겠지.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십 대에 걸쳐 이루어 놓은 왕국을 포기하라니. 투알린 국왕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제국에 복속하겠습니다. 폐하!"
"왕족들만 멸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귀족들은 제국에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귀족들이 투알린 왕실을 배신하고 제국에 투항했다. 왕족들이 절망과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페리안 왕자가 대뜸 황제를 노려보며 소리를 쳤다.
"우리는 샬리오니 공주를 데리고 있소! 지금 당장 저 불기둥들을 없애시오. 내가 샬리와 결혼을 포기할 테니, 당신에게 양보하겠단 말…. 읍읍!"
옆에 있던 귀족이 기겁하며 페리안 왕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왕자가 잠잠하더니 또 사고를 친다 싶었다.
워낙 국왕 내외가 오냐오냐 키워서 눈치 없기로는 이 왕국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황제가 샬리오니 공주를 정말 원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말이 매우 무례했기 때문에 귀족들 저까지 불똥이 떨어질까 두려웠다.
진짜 인질이라면 떵떵거려 볼 수나 있지. 확증되지 않은 인질로 저렇게 턱을 추켜올리다니. 역시나 황제의 옆에 서 있던 블레인과 헨리가 노한 표정으로 칼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잠시 정신이 혼미했던 황제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뭐라고…? 결혼?"
황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페리안에게 반문했다. 입에 딱 붙은 귀족의 손을 떼어 낸 페리안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래. 우리는 이미 결혼을 약속했소. 하지만 우리를 놓아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국으로 돌아가 준다면 그녀를 내어주겠소."
"페리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거라."
투알린 국왕은 제 아들이 또 뭘 잘못 먹었나 했다. 이미 샬리오니 공주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제로에 수렴한다는 것을 파악했는데 어째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인질도 아니건만 마치 황제에게 적선하듯이 말하다니! 황제가 기분이 상해 틀어지면 모두가 몰살당할 것이다.
"왕자가 잘 모르고 답한 것이오. 부디…."
"아니, 저놈을 내 앞으로 끌고 와라."
황제가 서늘한 눈으로 페리안을 응시하며 명령을 내렸다. 페리안은 확신했다. 그가 샬리오니에게 마음이 있다고. 처음에는 그저 찔러 보려고 했던 것이지만 알 수 있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공주는 인질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샬리오니는 페리안의 마음에 쏙 드는 여인이었다.
사실 그녀 외에는 왕자비로 들이고 싶은 여자가 없었다. 샬리를 가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페리안 본인의 목숨이 더 위험하니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린 페리안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래, 공주와 결혼하기로 했다고? 나는 처음 듣는 일이로군."
"그녀가 여기 왔을 때 결정한 일이오. 얼마 되지 않았지. 하지만 당신에게…. 흐억…. 이게 무슨! 내게 이러고도 공주가 무사할 것 같소?!"
페리안이 말하는 도중 황제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페리안의 눈앞에 칼끝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이 두 눈으로 공주를 마음에 품었나?"
칼끝은 아슬아슬하게 페리안의 눈앞에서 멈춰있었다. 샬리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맞는 거 같은데… 어째서…. 페리안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 * *
제국의 첩자가 내게 접근했다. 루카는 우리가 빠져나갈 계획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어쨌든 공주님은 지금 인질이시니까요. 폐하가 오셔서 협상이 시작되면 경비가 어수선해질 겁니다. 그때 틈을 봐서 제가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투알린은 협상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요?"
"폐하가 하신다면 하시는 겁니다."
뭐지. 이 절대적인 믿음은…. 협상이 한쪽만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일단 나보다는 그가 더 황제에 대해 잘 알 테니 나도 따라서 그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로 황제가 왔다. 창문으로 제국인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심장이 엇박자로 크게 뛰어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쟁이 시작되고 있어. 제국인들을 살피던 나는 그들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했더니 황제와 도착한 그 군병의 수가 현저히 적었다. 고작 백 명 남짓. 투알린은 협상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정말 큰일이었다.
"공주님! 지금 나가야 합니다. 어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루카가 나를 채근했다.
"루카. 폐하가 데려온 인원이 너무 적어요. 큰일 난 것 같아요."
"폐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서 나가야 합니다. 지금이 제일 어수선할 때입니다."
나는 루카가 내어준 투알린 옷을 갈아입고 그를 따라 방을 나왔다. 정말로 다들 제국의 황제가 온 것에 정신이 없는지 방 밖은 사람이 없었다.
전부 구경하러 갔나. 기사 한 명한테 나를 맡기고? 내가 갇혀 있던 곳의 궁은 규모가 아주 작긴 했다. 그리고 내가 시중인들도 다 물린 상태여서 사람들이 없다시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 내 가치가 형편없어진 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 아니구나. 몇 명의 병사와 하녀처럼 보이는 이들이 이미 기절한 것처럼 쓰려져 있었다. 나는 루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카. 리노아 왕국 기사들이 갇혀있어요. 그들을 구할 순 없을까요?”
“아하. 그들 말이죠? 그들은 나중에 폐하께서 구해 주실 겁니다. 지금은 공주님이 더 급하니 먼저 나갑시다. 폐하가 공주님을 꼭 모셔오라고 했거든요. 늦으면 제가 혼납니다.”
루카의 표정이 아주 필사적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제한테 혼난다고 하니 정말 그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우선 말을 타고 궁 밖을 나가려고 합니다. 정문으로는 나가기가 힘들어요. 뒷문에 저희 쪽의 사람이 있으니 그쪽으로 빠져나가겠습니다."
"알겠어요. 루카."
우리는 숨을 죽이고 궁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루카는 나를 황제에게로 데려갈 것이다. 황제에게 돌아가면 나는 다시 제국으로 볼모처럼 잡혀가려나…. 제국에서 말도 없이 빠져나왔던 일에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투알린인이라고 속인 것도 화가 났겠지. 그래서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말은 해야 한다. 또다시 그렇게 갇혀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카. 폐하께서 저에게 화가 많이 나 있을까요?"
"화 말씀입니까? 그런 것은 전달받지 못했습니다만."
그래. 루카는 모르겠지. 좀 걱정되네. 우리는 루카가 구해 놓은 말을 타고 왕궁의 후문 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말을 타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뒤에서 매달리다시피 잡고 있었다. 도착한 후문에는 투알린의 기사 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한 명이 루카에게 아는 눈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우리의 등장이 의아한 듯했다.
"무슨 일…. 크흡."
옆에 루카와 눈짓을 주고받던 병사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켜 버렸다.
"공주님. 바로 빠져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루카는 왕궁을 빠져나간 뒤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작은 조랑말 밖에 안 타 봤는데…. 커다란 말 위에서 빠르게 달리니 잘못 삐끗해서 루카를 놓치면 딱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제국과 투알린 군사들이 대치 상태로 있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우리는 사각지대에서 꽤 가깝게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리 한번 기가 막히네.
"루카. 장소가 좋네요. 가까운데도 다 보이는데요? 그런데 너무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말소리도 다 들려요."
"폐하와 이야기를 끝낸 상태라서요. 장소도 일부러 이곳으로 잡은 겁니다."
아예 여기를 만날 장소로 잡았다고? 그건 너무 무모한 것 아닌가.
"여기서 왕국과 대치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정해진 장소가 여기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요. 여러 군데가 있는데 여기는 그중의 하나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다릴 장소까지 굳이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가려서 정한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갑갑한 머리 장식을 벗어 버리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우리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들렸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황제가 제 목숨을 내어놓고 고대 마법 병기를 써보라고 했을 땐 미친 건가 했다. 그런데 연속으로 폭발이 일어나니 어찌나 무서운지…. 그 폭발은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진동이 크게 울려 심장을 벌렁대게 했다.
폭발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니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내가 이걸 볼 수 있을까…. 저게 뭐지? 절반의 제국 군사들이 바주카포처럼 보이는 화포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어라. 폐하께서 고대 마법 병기 소형 트리뷰세티를 들고 오셨네요. 이것 참. 엄청 급하셨나 보네."
루카가 나를 돌아보며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도 고대 마법 병기가 있어요?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고 이제 와서…?"
루카의 말을 듣자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대단한 것이 있으면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