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15
* * *
사시사철 한겨울만 같았던 프레타스 제국의 국무 회의장. 언제 피를 뚝뚝 흘리며 목이 떨어질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대신들은 요즘 들어 달라진 황제의 상태에 어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파도치듯 널뛰는 분위기에 새가슴을 가진 대신들은 차라리 한겨울만 같았던 그전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이러한 현상이 시작된 것은 정확히 승전 연회 다음 날부터였다. 단 한 번도 황제의 무표정 외에는 본 적이 없던 대신들은 그날 활짝 핀 꽃처럼 만개한 황제의 표정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폐…. 폐하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살아남은 대신 중 그나마 간덩이가 제일 크다고 할 수 있는 재상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흐음…. 하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도 하다가, 피식하며 실소까지 흘리더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대신들은 저도 모르게 몸이 바짝 굳었다. 단 한 번도 이런 황제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돌발성 이벤트에 면역이 없던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눈빛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말하시게'
'재무 쪽에 일 터진 거 다 알고 있거늘. 자네가 말해'
'누가 하든 빨리 어떻게 좀 해보시오.'
국무 회의가 시작된 지가 언제인데 황제가 집중을 못 하고 있는 탓에 눈만 끔벅이며 안건 하나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혼자 딴 세상에 있는 것 같던 황제가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마뜩잖은 눈으로 대신들을 일별했다.
히익….
그렇게 다시 회의가 시작되는 듯했다.
"폐하…. 최근 전쟁으로 말미암아 세수가 줄어들고 있어 일시적으로 세율을 올리는 방안을…."
"그래. 제국민들 고혈을 빨아먹겠다고? 네놈 머리에서 나온 방안은 그것밖에 없는가?"
없다 하면 딱 죽을 것 같은 분위기에 궁내백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최근 잠잠하던 대전에 제 목이 나뒹굴며 다시 피를 흩뿌리게 될지도 몰랐다.
"제가 어찌 제국민들이 피땀 흘려 벌어들인…. 오해이십니다. 부디 제 충심을 헤아려 주십시오."
"피…."
한마디를 남긴 황제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던 대신들은 다시 얼떨떨해졌다. 돌연 황제가 한 손을 쭉 뻗자 대신들이 저마다 지레 놀라 고개를 테이블 위로 처박았다.
"폐하, 통촉하여 주십시오!"
하지만 그것도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지 소매를 걷어 손목을 앞뒤로 돌려보며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였다.
"도망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도… 도망 말씀입니까?"
"경계가 너무 심해서 큰일이야, 마음에 드는데 자꾸 도망가려 하니 말이다."
도대체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대신들은 과감히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정확히 누가 도망을 가려고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네놈들이 알 바 아니다. 그저 붙잡아 둘 방법만 말하면 될 일이거늘."
황제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며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제대로 설명하지는 않으면서 이거 하나 모르냐고 다그치는 상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군가. 눈칫밥 먹으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여자?! 밀당?'
'여자로구나!'
'누가 새치기를….'
모두 황제의 옆, 황후의 자리는 암묵적으로 보류하기로 한 상태였다. 티켓만 끊으면 생존이 보장되는 프리패스권인데, 대체 누가 먼저 황제의 옆자리를 넘보는지 대신들은 서로 매섭게 눈빛을 쏘아 대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때 제일 구석에서 이 상황을 심드렁히 지켜보던 군단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흐음, 회의 끝나면 다들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이 누군지 아마 불을 켜고 찾을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이 그녀를 찾을 거라는 생각만 해도 불쾌해진 황제가 노하기 시작했다.
"찾으면 죽는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이 상황에서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칼이라도 뽑을 것 같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대체 어떻게 조언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무도 황제에게 의문의 여인이 누군지 섣불리 묻지 못했다. 군단장의 말대로 진실 게임은 황제가 간 후 시작될 것이다. 대신들은 하나같이 그 여인이 제국의 귀족 영애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심드렁하던 군단장은 이 상황이 재밌어졌는지 히죽 웃으며 조언했다.
"폐하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면 되지 않을까요? 원하는 게 있으면 전부 구해다 주면 되지요."
그 말을 들은 황제가 크게 흡족해하더니, 나머지 대신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군단장 외에는 제대로 된 의견 하나 못 내는 놈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하려고 하니 화가 나는군그래."
아니! 이게 대체 국정 운영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대신들은 하나같이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저 한마디 할 뿐.
"폐하, 통촉하여 주십시오!"
* * *
황제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던 카시카프 황제는 시종장 테너의 방문에 크게 기꺼워했다.
"무슨 일인가."
근엄한 목소리에는 살랑거리는 기대감이 한 자락 섞여 있었다. 하지만 시종장이 그에게 전한 소식은 그가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리오니 영애가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창문으로 빼낸 것 같습니다. 폐하."
황제는 벌떡 일어나고, 그 주변에서 실무를 보던 보좌관들은 눈을 반짝였다.
'리오니 영애가 누구야.'
'어느 가문 영애지?'
황제의 기운이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테너, 나는 그대에게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폐하, 염려치 마십시오. 암영조가 그림자 추적에 들어갔으니 곧 영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테너는 황제의 귀기 어린 기세도 다 받아치며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 보좌관들은 하나같이 테너를 존경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런 극한 직업은 시종장 말고는 할 사람이 없어'
시종장의 말대로 곧 집무실에 체구가 작고 날렵해 보이는 친위대 한 명이 들어왔다. 황제 친위대 중에서도 암살과 정보에 특화 편성된 암영조 중 한 명이었다. 암영조 루이가 멀뚱멀뚱 흥미롭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보좌관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다 나가."
눈치 백 단 보좌관들이 썰물처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루이, 보고해라."
"제가 추적한 이는 샬리오니 롯트 리노아 공주십니다. 지금 현재 리노아 사절단에 테일러 롯트 리노아 왕세자와 같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오는 중입니다."
그 말에 황제와 시종장 둘 다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딱히 알아보지 않고 막연히 투알린 귀족이겠거니 했던 황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방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리오니가 샬리오니…. 흐음…. 리노아 왕국 공주라 말이지, 투알린이 아니라."
"폐하, 리노아 사절단을 살펴본 결과 오늘 중으로 제국을 떠날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잡아오라 할 줄 알았던 황제가 침묵한 채 말이 없었다.
"샬리오니 공주님이 다시 정식 방문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기다려 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그게 훨씬 더 사람들 보기에도 좋을 것입니다."
시종장 테너가 이참에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입술 한쪽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내가 그걸 모르나? 잠시라도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 아냐."
"샬리오니 공주님의 초상화를 가져올까요? 초상화 보관소에 몇 점 있는 거로 압니다만."
시종장이 황제에게 의중을 물었다.
"…가져와."
* * *
프레타스 제국의 마법사 A는 요즘 일하면서 좌불안석에 불안과 초조함을 달고 있었다. 딱히 A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법 부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랬다.
최근 마법 통신구 앞에서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 한없이 기다리는 황제 때문에 자신들이 얼마나 불편했던가. 첫날과 둘째 날은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이 있으신가 했다. 셋째 날은 시종장이 서류와 깃펜 잉크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와, 정무를 보시라 하며 자리까지 마련했다. 넷째 날은 시종장이 황제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폐하,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실 바에야 공주님을 반려로 바로 맞아들이시면 어떠한지요."
"반려?"
마법 부서에서 죽상을 하고 앉아 있던 마법사들은 한순간 솔깃 하는 말에 전부 귀를 시종장 쪽으로 팔랑였다.
요즘 황궁 안에 핫한 이슈 중 하나가 바로 황제의 연인은 누구인가였다. 모든 것이 베일에 묻힌 채 알 수 없어 대신들끼리 서로 자기 딸을 황제에게 밀어 넣었다며 개싸움을 한다 했다. 그런데 그 연인이 알고 보니 제국인이 아니라 왕국의 공주란다.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
"리노아 왕국에서 마법 통신구로 샬리오니 공주의 방문 요청이 있을 시 거절하도록 해라. 내가 직접 간다고 전해. 황후를 내가 직접 맞이하러 갈 것이다."
순식간에 생겨나 버린 황후마마에 마법사들이 아연해졌다. 이렇게 절차 다 무시하고 황비도 아닌 황후가 1초 만에 정해져도 되나? 아무리 피를 부르는 황제라도 대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 같은데? 마법사들의 고개가 전부 시종장 테너에게로 돌아갔다. 저 비정상적인 발언을 한 황제를 말려 주겠지 싶어서.
"폐하, 빈손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자고로 구혼의 목적으로 상대를 방문하실 때는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이 예의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마법사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황제에 그 시종장이었다.
"아아. 테너,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큰 실례를 저지를 뻔했군."
검지로 턱 끝을 톡톡 두드리며 어떤 선물을 할지 가늠해 보던 황제가 물었다.
"리노아에서 제일 가까운 왕국이 투알린이었지?"
"그러하옵니다. 폐하."
"잘되었군. 선물은 그것으로 한다. 준비해."
황제는 마법사 A에게 다시 말했다.
"혹시나 샬리오니 공주의 방문 요청이 오면 투알린과의 전쟁 때문에 거절한다고 전해라."
"투알린 왕국을 선물하려 하십니까?”
"그 정도는 해야 제국의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대신들에게서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내가 개인적으로 선물하겠다는데 기생충 같은 놈들이 감히? 우스운 일이지."
스스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황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는 듯 침음을 삼켰다.
"이런, 내 아기 사슴은 피 보는 걸 싫어하는데 이걸 어찌하면 좋지. 테너? 선물에 피가 묻어 있다고 거절하면 어찌하냔 말이야."
제가 준비한 선물을 공주가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황제가 크게 상심하였다.
"피 흘리지 않고 통째로 넘겨주면 되지 않습니까."
"통째로?"
"협상으로 마무리 지으시면 피 흘리는 일 없이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겠지, 라고 마법 부서 사람들이 생각했다.
* * *
본격적으로 투알린을 족칠 계획안을 구상하기 위해 급히 군사 회의가 열렸다.
"현재 투알린에 남은 첩자가 몇이지?"
"전 베고니아 왕국과 교전 중일 때 눈치채고 거의 대부분 척살 당한 상태입니다."
군사령관이 재빠르게 답했다.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목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섯이 채 안 됩니다. 대부분은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이 크지 않습니다."
"멍청한 것들이 꼭 눈치는 빠르지. 그래, 놈들이 발견했다는 게 뭐지?"
옆에서 하품하던 군단장이 말을 받았다.
"고대 마법 병기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뭐라고 하더라?"
군사령관이 머리를 긁적이는 군단장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 방만한 태도로 황제에게 목이 잘리지 않은 건 저놈이 유일할 거다.
"선선대 황제께서 마우리 유적 발굴지에서 발견하셨던 고대 마법 병기로 광범위로 지뢰를 터트리는 화염 마법 특화 투석기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회수하지 않고 지금 저놈들이 가지고 있지?"
"불량품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