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13
* * *
"샬리오니 롯트 리노아가 투알린 왕국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공주. 오랜만이로군. 어릴 때 보고는 이번이 두 번째인가? 소문대로 어여쁘게 잘 자랐어. 페리안이 목매달만하군그래."
투알린 국왕은 심지어 내게 농담 섞인 인사를 건넸다.
"내 그대를 위해 특별히 다과에 신경을 쓰라고 한 참이지. 부디 즐겨 주길 바라네."
나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 내 리노아 국왕에게 이야기는 들었네만, 이번 사태의 원인인 그대가 황제를 설득해 전쟁을 멈추겠다고 했다지?"
그는 흥미롭다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제스처로 보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차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합니다. 전하. 이러한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공주를 탓하고 있지 않으니 염려치 않아도 좋네."
나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내 예상과 전혀 다르게도 그는 현재 벌어지는 상황과 맞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고장 난 오르골 위의 장식품이 된 것 같았다. 원작에 기대어 살고 있는 내게, 국왕이 움직이는 오르골을 손으로 잡아 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묶인 것 같다. 앞으로 닥쳐올 일을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내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애쓰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네."
애쓰지 않아도 좋다니? 국왕이 말하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이질적으로 박혀 들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무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스스로 복덩이가 굴러들어 왔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말이네."
국왕이 진한 웃음을 머금은 순간이었다. 무장한 기사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우리 주변을 둘러싸듯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아레인과 리노아 기사들도 다급히 나를 감싸는 형태로 진을 짰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투알린 국왕 전하. 저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국왕은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을 멈추길 바라지 않네. 공주. 방해하지 마시게. 대신 그대는 내게 선물이 되어 주었으면 해서 말이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전하께서 마치 제국과의 전쟁을 바라시는 거로 들립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나를 바라보는 국왕의 모습은 느긋해 보였다. 연합해도 방어하기 급급할 정도인데 그들은 홀로 제국을 상대하겠다는 걸까.
"잘못 보지 않았네. 샬리오니 공주는 우리의 인질이 되어 주어야겠어. 그대라는 깜짝 선물이 제 발로 들어와서 얼마나 기쁜지 알겠나. 이런. 차를 마셨다면 좀 더 편했을 것인데, 공주."
그 말을 끝으로 무장한 투알린 기사들이 우리에게 바짝 다가왔다. 베고니아가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으면서. 제국인도 아닌 리노아 왕국인인 나를 잡은 인질극에 제국이 놀아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오히려 화만 자극하게 되는 꼴이 아닌가. 대체 국왕은 무슨 생각인 거지.
"투항하는 게 좋을 걸세. 자네의 기사들은 맨손이지 않은가. 다섯으로 어떻게 수십을 상대하겠나. 의미 없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 낫지 않겠냔 말이지. 내 귀하고 소중한 인질이니 이렇게 관대하게 베푸는 것일세. 굳이 인질이 되지 않아도 좋네만 뭐 그건 나중에 공주가 알아서 선택하시게."
국왕의 말 대로였다. 상대는 무장한 기사에 우리는 수적으로도 크게 열세인 상황이었다. 아레인과 기사들이 목숨을 버리면서 이미 정해져 있는 결과에 불나방처럼 달려들 필요가 없었다.
"아레인, 투항하세요. 나를 두고 목숨을 도외시한 채 먼저 갈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공주님… 그건…."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나를 지키기란 요원하다. 차라리 나중을 위해 버티는 것이 낫다는 것을.
"잘 생각했네. 공주는 말이 잘 통하는군. 이렇게 고분고분하니 내가 따로 차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겠어. 그들을 투옥하고 공주는 준비된 방으로 모셔라."
그가 나를 대하는 처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에 크게 패하실 겁니다. 저는 인질로 가치가 없으니 쓰시면 제국에 화만 자극하는 꼴이 날 겁니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거라면…."
국왕이 내 말을 듣더니 가가대소하였다.
"리노아에서는 이번 전쟁에 그대들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실은 그게 아니네. 우리는 그대들과 상관없이 이미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일세. 아까 말했지 않나. 그대는 그 중간에 들어온 굴러온 복덩이라고. 우리가 여분의 조커 카드를 얻은 것과 다르지 않네. 하늘은 우리에게 손을 들어준 것 같군."
나는 그 말에 아연실색해졌다. 투알린 국왕, 그는 진심으로 제국과 맞붙을 생각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리노아와도 척을 지려 하십니까."
"그것은 공주의 선택에 달렸네.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가 굳이 인질이 될 필요는 없어. 조커 카드라고 했지만, 딱히 쓸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야. 사용하기도 전에 전쟁은 끝날 것이네."
그들이 그렇게 자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실례하겠습니다. 따라주십시오."
투알린 기사가 나를 제압하고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아레인과 기사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공주님 곁에서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레인이 나지막이 국왕에게 말을 전했다.
"자네의 충심이 갸륵하네만, 그건 공주의 선택에 달렸네. 공주가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그대는 다시 복직할 수 있을 것이야."
국왕은 혼자 다른 장소에 있는 듯 허허롭게 웃으며 답했다. 외떨어지는 나를 보며 아레인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었다. 아직은. 부디 나를 생각한다면.
그들이 대체 무엇을 믿고 제국을 상대한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원작과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전쟁의 시기가 달라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순서가 뒤바뀌어 그런 것인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원작에서도 이랬을까? 투알린이 제국에 대항한다 했을까? 대항했는데도 망해 버린 것인지, 아니면 나 때문에 그 방향이 뒤틀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더는 원작에 기댈 수 없었다. 심지어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제국의 승리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더 이상 1년 전부터 차근차근 계획대로 왕국을 점령했던 황제가 아니다. 어째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로 인해 황제는 계획에 없던 출정을 시작했다. 제국은 무조건 점령에 성공하고 이길 것이라는, 원작 안에만 갇혀 있던 판에 박힌 나의 생각 때문에…. 모든 것이 내 예상과 정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좁은 독방에 가두고 나를 압박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들어간 곳은 전형적인 화려한 귀부인의 방이었다.
"얌전히 계십시오.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전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시중인이 곧 들어올 겁니다."
"시중인은 필요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이만 나가 주세요."
감시인 따위 필요 없다. 지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현재 두 가지 말고 다른 생각은 없었다.
투알린이 무엇을 믿고 제국과 전쟁을 하려 하는지. 원작과 향방이 달라져 제국에 혹여나 다른 결말이 벌어지게 된다든지.
그 두 가지가 걱정이었다. 우선 그들은 나를 인질로 이용할 거라 했다. 그런데 또 이어진 말로는 꼭 인질이 되지 않아도 좋단다.
제국을 이길 비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인질로잡히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타개할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똑똑.
필요 없다고 했는데, 시중인이 왔나 보다. 대답하지 않았다.
벌컥-.
역시 답이 없는데도 문은 알아서 잘 열린다. 인질이라서 뭐.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 앞에 나타난 이는 시종이 아니었다. 남자는 문가에 기대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야. 갈수록 예뻐지네."
문에 느슨하게 기대어 있던 그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그는 내가 승전 연회 때 본 투알린의 사절단 대표였다. 그을린 피부에 푸른빛이 도는 은발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이제는 모른 척하는 거야? 섭섭하네. 정말로. 승전 연회에서는 긴가민가했지. 내가 준 드레스인데 보석이 하나도 안 달려 있잖아? 샬리, 네가 내가 준 드레스를 다른 사람한테 넘겨 버린 줄 알고 얼마나 짜증이 일었는데. 처음엔 눈만 봐서 헷갈리긴 했는데, 왠지 너일 거 같더라고."
그가 말한 대로라면 내게 투알린 드레스를 선물 해 준 사람은 한사람밖에 없었다.
"페리안 쇼오 투알린 왕자님?"
"우리 사이에 웬 왕자님이야?"
그가 킥킥거리며 가볍게 웃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이 의아스러웠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하하, 호호 할 때인가?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사실이야?"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가벼워 보였지만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황제가 너 때문에 투알린을 친다는 게 사실이냐고."
"그게 아니라면 제가 여기에 올 이유가 없지요."
그의 눈이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가늘게 휘었다.
"아까부터 나한테 존댓말 하는 거 알아? 왜 그렇게 거리를 두고 그래?"
"왕자님, 제가 얼마 전 기억을 잃었습니다. 전에 알고 지낸 분들을 기억하지 못해요."
그는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 말이 사실인지 가늠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뜬금없이 내가 기억을 잃어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안 믿길 만도 했다.
"뭐 좋아. 그렇다고 치자. 확실히 예전이랑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 내가 다시 반할지도 모르겠다."
이 인간. 아까부터 헛소리가 심하네.
"왕자님,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알려 주세요."
더 이상 의미 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서 방문목적을 다시 물었다.
"황제가 너 때문에 우리를 치려 한다는 거 말이야. 그거 우리 왕국에서 믿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게 무슨 말이시죠?"
나는 왕자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아까의 투알린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국이 우리한텐 대체 어떤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쳐들어올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랬는데 리노아에서 통신 마법으로 우리한테 전하는 말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거야."
제국이 왕국들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어? 그냥 제국을 치겠다는 게 아니라 제국이 쳐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리노아 왕국보다는 나은 처세네. 대체 우리 왕국에는 첩자가 몇 명인지…. 리노아가 투알린보다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시금 우울해졌다.
"제국이 전쟁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럼, 우리가 첩자들 다 잡아 족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빌어먹게도 삼분지 일 이상이 첩자였단 말이야. 기가 막히지 않냐고."
첩자들까지 다 처리했단 말인가. 그래도 투알린의 이렇게 여유로운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대는 제국이었다. 강성했던 베고니아도 최소한의 피해로 복속시켰다. 민간인들 중 전쟁의 피해에 휘말린 사람들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 대신 귀족들과 왕족들은 모조리 말살시켰지만 말이다.
"아무리 미인이라 소문난 너라고 해도 황제가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진심으로 전쟁을 벌일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지. 넌 그저 중간에 끼인 명분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는. 뭐 처음에는 리노아가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줄 알았지 뭐야."
"제국의 앞잡이라니요…. 말이 심하시군요."
"그래, 미안해.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 리노아에서 조금 전에 전쟁 배상 목록이 들어왔거든. 그걸 보니깐 리노아가 앞잡이가 아닌 건 알겠더라고."
아바마마가 배상금으로 얼마나 제시하였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