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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11화 (11/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11

"제가 말할 주제가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공주님이 좀 더 자신을 소중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고생시켜서 엄청 화났나 보다.

"미안해요, 아레인. 다음부터는 정말 조심할게요."

황제라는 사람이 조심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아레인을 위해 그렇게 답했다. 리노아 왕국인이 머무는 궁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테일러와 티나가 이미 나와 있었다.

"너…!"

걱정되고 화나고 뿔이 난 얼굴이었다. 테일러를 보니 조금 전의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다시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나는 테일러에게 달려가 안겼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정말로."

잠시 굳어있던 테일러가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정말 걱정했다. 샬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샬리오니의 몸에 들어오고서부터 내게 제일 가까운 그들의 딸과 여동생을 대신해 들어있다는 죄책감이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래서 더 필사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인정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 있지만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서인 것 같다.

내가 원해서 이 몸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들어온 후로 내 생존이 최우선이었지만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살리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도 싫고, 사람이 죽는 것도 싫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이들은 내게 남이 아니었다. 이 몸에 들어온 뒤로 내내 있던 방어 기제가 사라졌다. 나는 이제 왕과 왕비를 부모님으로, 테일러를 오라버니라고 부르겠지.

* * *

"시녀로 간다고 하더니 투알린 드레스는 왜 입은 거냐."

오라버니가 내 차림새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혹시나 무섭거나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원작처럼 나한테 반할까 봐 눈 빼고 다 가리면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눈만 보고도 반한 거 같아요. 죄송해요…. 계획 완전 실패예요. 이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대답 안 할래? 지금까지 대체 어디에 있었어?"

황제가 나 좋다고 가두고 안 놔줘서…. 저도 연락을 못 해서 너무 답답하고 속상하고 그랬어요. 그러나 이것도 마찬가지로 답할 수 없었다.

"아무 일 없는 건 확실하지? 일단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긴 한데… 휴우."

내가 계속 말이 없으니 오라버니가 매서운 눈으로 나를 질책하듯 쳐다봤다.

"너 이게 얼마나 큰일인 줄 알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할 거야?"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황제가…."

"황제? 프레타스 황제 말이냐?"

"내가 좋대요…. 오라버니."

하?! 오라버니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냐. 그럼 지금까지 황제랑 있었어?"

"황제가 계속 더 있다 가라고 하는데, 제가 투알린 드레스를 입고 있잖아요. 내가 공주라고 밝히면 외교 문제로 넘어가니깐 소식을 전할 수 없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나는 최대한 반성하는 자세로 오라버니의 화를 풀려 애썼다. 오라버니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그 투알린 드레스는 대체 왜 입고 있었던 건데."

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옆에서 듣고 있던 아레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저는 공주님이 그 궁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랬지 않습니까. 황제와 있었다면 가둔 것은 그가 아닙니까."

아레인…. 아레인은 지금 굉장히 화가 나 보였다. 냉막한 얼굴도 그렇고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시리기까지 했다. 아레인의 말에 오라버니도 다시 기세가 사나워졌다.

"샬리, 제대로 설명 안 하지."

황제가 정복 전쟁으로 왕국들을 다 몰살한대요. 안 믿어 주실 거잖아요.

"알겠어요. 솔직히 말할게요. 오라버니. 제가 사실 프레타스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보고 싶은데 제가 워낙 외모가 뛰어나잖아요."

다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내가 외모가 뛰어난 건 맞잖아.

"황제가 나를 보고 반할까 봐서 예방 차원에서 투알린 왕국의 드레스를 입었어요. 눈 빼고 다 가리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가 스스로 객관화를 잘못한 거 같아요. 황제가 눈만 보고도 나한테 반해 버렸어요."

사실은 사실인데 핵심은 빠져 있었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 내 얼굴이 불이 날 것처럼 후끈후끈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내 뻔뻔한 외모 자부심에 다른 사람들은 한동안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래, 아무리 잘난 사람도 자기도취에 빠지면 주변인들은 어이가 없을 거다.

"그러니깐… 황제가 네게 반한 거 같다고?"

"네. 제가 좋다고 가지 말라고 그러는데 다시 온다고 해도 안 믿어 주더라구요."

한동안 가출한 정신을 다잡은 오라버니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그가 너를 감금한 건 사실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너를 투알린 귀족으로 알고 있었다면 투알린에게는 이 사실이 굉장히 모욕적인 일이야.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우리를 승전 연회에 초대해 놓고 이런 식으로 우롱하다니 말이다. 마치 우리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오라버니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손으로 쓸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나도 그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보는 눈들이 많았다.

"오라버니와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다들 나가 주시겠어요."

나는 주위 사람들을 다 물렸다. 방을 나가는 아레인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오라버니. 제국이 왕국들을 이간질한 거요. 정무 회의를 계속하셨잖아요. 어떻게 의견이 나왔어요?"

"절반 이상이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한다."

“아마 그중에 첩자도 절반 이상일 거라고 생각해요.”

리노아는 약소국에 왕권도 힘이 없다. 귀족들이 득세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국이 우리를 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의 동공이 얕게 흔들렸다.

"글쎄…."

그럴 거라고 예상하잖아요. 예전의 나처럼 회피하고 싶은 거예요?

"이번 일은 정말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오라버니 말대로 내가 사고를 쳐 버렸어요. 일단 황제한테는 내가 방문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믿지 않더라구요. 내가 없어진 걸 알면… 저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금 당장 왕국으로 돌아가서 제국에 제 방문 요청을 넣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정말 황제가 네게 반했다고…."

"저는 황제가 전쟁을 멈출 것 같지 않아요. 베고니아로 만족할 것처럼 안 보인다구요."

가라앉아 있던 그의 분위기가 다시 흉흉해졌다.

"그래서,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이 뭐야. 제국에 볼모로 잡혀 들어가겠다는 거라면…."

"저도요. 저도 황제가 좋은 거 같아요."

"뭐?"

이제 그는 아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잘 모르겠다. 오라버니에게 좋다고 말은 했지만 나도 내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최악을 가정했던 것에 비하면 그는 적어도 살육을 즐기는 악마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혹시 알아요? 미인계가 통할지?"

내가 힘 빠진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너 그걸 말이라고…!"

"그냥… 황제가 싫지 않아요. 내가 황제를 설득해 볼게요. 오라버니."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 *

우리는 그날 바로 왕국으로 출발했다. 이미 짐은 다 싸져 있었기 때문에 출발하기만 하면 되었다. 제국의 성문은 부산스러웠다. 아마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초조해져서 오라버니에게 리노아 왕국으로 먼저 도착할 전령을 보내자 했다. 미리 가서 제국에 방문 요청을 넣을 목적으로. 왕국으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각자 생각에 잠겨 거의 말이 없었다.

"샬리.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

우리는 마차 소파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 창밖으로 지는 석양이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여서 현실감이 없었다.

"우리 가족 행복이 내 행복이 됐어요. 오라버니. 그리고… 나는 황제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말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황제의 행복 또한 바라고 있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나 보다.

"네 연인들 뒤처리 담당은 항상 나였는데 말이다. 내가 황제까지는 그럴 자신이 없구나."

오라버니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뒤처리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네가 질려서 헤어진 연인들 말이다. 정말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냥 떨어져 나간 줄 알았어? 아… 샬리, 넌 기억이 안 나겠구나. 그놈들이 좀 질겨야 말이지."

"오라버니가 제 옛 연인들을 다 감당하신 거예요?"

방만한 여동생 뒷바라지 엄청 하셨네요.

"그래. 아레인은 실패한 것 같지만 말이다. 네가 기억 상실이라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못 만나게 했었는데. 그러면 알아서 떨어질 줄 알았지."

어차피 너도 점차 질려 하는 거 같아 보여서 잘되었다 싶었고. 그가 뒷말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래도 그건… 정식으로 헤어진 것도 아닌데 심하셨어요."

만약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샬리, 황제는 정말 감당 못해. 나."

그가 나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 * *

왕국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리노아왕, 아바마마에게 알현신청을 넣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국왕, 아바마마는 우리의 표정이 심각하자 침음을 삼켰다.

"무슨 일이 있었던게냐. 전령이 먼저 와서 샬리를 제국에 방문 요청을 한다 들었는데 혹시 그것 때문이냐."

"그 요청은 처리가 되었습니까?"

오라버니가 물었다.

"그래. 무르지 못한다. 마법 통신으로 벌써 넘어갔지. 며칠 되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이 일로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오라버니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황제가 우리 샬리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아바마마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는 샬리를 첩으로 삼고자 하는가."

내가 벌떡 일어났다.

"아바마마.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황제가 너를 여인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면 어찌 설득하겠다는 것이냐."

그것에 대해 나는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없었다. 나 또한 황제가 나를 어떤 식으로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를 파악하기에는.

"그게 무엇이든 저를 좋아하고 있는 건 맞아요. 아바마마."

그는 내 말에도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

"네 마음은 어떠하냐."

"저는… 황제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바마마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제국에서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때였다. 시종장이 다급하게 들어와서 고했다.

"전하!! 전쟁발발입니다. 프레타스 제국이 투알린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뭐? 어째서!! 마법 통신이 이미 며칠 전에 들어갔을 텐데. 그럴 리가 없다.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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