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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10화 (10/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10

뭐?! 내가 금고 옮겼다고 그러는 거야? 나 그렇게 파렴치 한 사람 아닌데. 금고도 밟고 올라갈 게 필요해서 옮긴 거라고.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부 말씀입니까?"

"으음, 창문 밑으로 옮겨서 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것들은 전부다."

"……."

아아…. 맞다. 우리 아직 이 문제 해결 안 됐었지.

"폐하, 저 이제 내보내…."

"리오니. 밤이 늦었다. 밖이 위험하니 나갈 생각 말고."

그가 내 이마에 짧게 키스를 한 후 다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내가 무슨 말 할지 알고 내빼는 거 맞지 저거? 아… 진짜 돌아가야 하는데 미치겠네.

"테너! 저 진짜 이제 보내 줘요."

옆에서 알람 마법을 걸 물건들을 살피는 테너에게 말했다.

"폐하 말씀대로 밤이 깊었습니다. 리오니 영애. 내일 오전에 말씀해 보시는 건 어떨는지요."

테일러나 티나에게 쪽지를 전해 달라고 하면 내가 누군지 들키니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 머리만 움켜잡았다.

"두통이 있으십니까? 약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에요. 테너. 저 이제 잘 거니깐 나가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두통으로 인한 불면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테너는 그렇게 정중히 말하더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창문을 잠그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 내일 오전에는 반드시 나간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바람일 뿐이었다.

* * *

황제는 다음 날 아침부터 나를 찾아왔다.

“잘 잤나. 답답할 것 같은데 벗지그래.”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내 머리 장식에 불만이 많은지 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사실은 엄청 답답해 죽을 거 같다. 벗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는데 시종장이 트롤리를 밀며 아침 식사를 내왔다.

아… 후식이 푸딩이야. 이 와중에도 푸딩을 보고 심란한 기분이 풀어지는 나를 보며 자괴감에 빠졌다. 하지만 풀렸던 기분은 1초 만에 다시 침몰당한 배처럼 가라앉았다.

머리 장식 때문에 먹을 때 너무 불편했다. 턱밑으로 음식을 넣고 먹어야 한다니. 분명히 투알린 사람들은 코와 입을 덮은 천은 제거하고 밥을 먹을 텐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하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두고 이렇게나 괴롭게 먹어야 한다니. 이건 음식에 대한 모욕이야.

“내게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가?”

그의 얼굴이 심통이 난 건지 토라진 건지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 얼굴로 그러니깐 섹시한데요. 보기 좋습니다. 나는 한참 감상하다가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걸 보고 얼른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친… 친해지면 보여드릴게요. 낯을 가리는 편이라서….”

아. 나도 모르게 철벽 친 것처럼 되었네. 임기응변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뱉어 놓고 보니 잘되었다 싶었다.

“리오니, 나는 그대의 손목에 흔적까지 남겼는데 그 정도면 친하지 않은가.”

어…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확실히 키스 마크는 연인들 사이에서만 남기는 거니깐. 흔적을 남긴 것조차 사실 왜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아서 그 의도를 알 수는 없었다.

“그대, 손목.”

그가 내게 손을 뻗어 내 손목을 가리켰다. 손목 달라고?

“왜요?”

어제 확인하고 싶어 했으니 그것 때문인가 싶었는데 역시나 흔적 부분이 보이게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헉. 갑자기 사람 놀라게… 꽃 뿌리지 마!

“마음에 들어.”

그가 환한 웃음을 흩뿌리며 내 손목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예. 그러십니까…. 아 내 얼굴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쯤 불타올라서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가 봐야겠는데 슬슬 얘기를 꺼내 볼까.

“폐하,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나중에 다시 정식으로 방문을 할 테니까….”

“곧 국정 회의가 있어서 말이지.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내 이마에 짧게 키스를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가 다시 돌아오겠다는데 왜 안 믿는 거지. 오늘이 지나면 내일부터 리노아 사절단은 왕국으로 돌아간다. 오늘 안에 빠져나가야 하는데 정말 큰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골머리를 안고 있는데 테너가 방에 들어와 내게 책을 건네었다.

"무료하실 것 같아 책을 종류별로 가지고 왔습니다. 영애. 그밖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있어요. 여기서 나가는 게 제가 필요한 거랍니다."

"폐하께서 오시면 한번 말씀드려보시지요."

테너는 이런 식으로 자꾸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테너가 잘 설득해 주세요. 내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데 안 믿는 거 같아요."

"그러겠습니다."

대답만 잘하시면 답니까. 여기 믿을 사람 하나도 없어. 그 뒤로 황제는 종종 들렸지만 내게 머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는 내가 보자마자 내보내 달라고 하자, 내가 잘 있는지 확인만 하고 가는 정도로 말이다. 이럴 바에야 내보내 주는 게 낫지 않나. 그렇게 눈도장만 찍고 갈 거면. 내가 한숨을 쉬며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탈출을 감행했던 창문에서 무언가가 톡 하고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

-톡.

-토톡.

책을 내 던지고 창문 근처에서 주변을 살폈다.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자 창문에 무언가가 박혀 금이 조금씩 가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창문에다 정말 초미니 크기의 수리검 같은 것을 던져서 박아 넣고 있었다.

뭐지…? 그렇게 하나둘 박히던 수리검들이 원의 형태로 모양을 갖추고 있었고 그 원의 모양으로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수리검의 뒤쪽으로는 전부 끈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힘을 잃고 늘어져 있던 끈을 창 너머의 누군가가 한꺼번에 당기자 팽팽해졌다.

그리고 그 당기는 힘으로 금이 갔던 창문이 원 모양으로 파삭 소리를 내며 바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데 창문으로 누군가의 인영이 나타났다.

"샬리 공주님…."

창문 너머에서 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은 아레인이었다.

* * *

"아레인!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모르게 너무 기쁜 나머지 큰소리를 냈다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봤자 이미 막혀 있을 입을….

"공주님은 눈만 보이셔도 예쁘십니다."

아레인이 내가 하고 있는 꼴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공주님, 밖에 왕국 기사단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제가 내려가서 공주님을 끌어올리면 창문을 타고 넘어가서 왕국 기사에게 도움받으세요."

그렇게 말한 아레인이 밧줄 같은 끈을 쥐고 훌쩍 뛰어내렸다. 두리번거리던 그가 테이블로 다가섰다.

"아레인! 물건 건드리면 안 돼요. 알람 마법이 걸려있어요!"

아하. 하고 끄덕인 그가 갑자기 몸을 숙이고 앉더니 내게 끈을 건네었다.

"끈을 잡고 있으세요."

내가 끈을 잡자 아레인이 몇 번 짧고 강하게 끈을 당겼다. 그러자 신호를 받은 반대편에서 서서히 끈을 당기기 시작했다.

"샬리 공주님, 저를 밟고 올라서세요. 어서요. 끈을 당길 때 올라서야 합니다."

어깨를 밟으란 말이야? 내가 머뭇거리자 나를 채근한 아레인이 끈을 가리켰다. 끈은 계속 당겨지고 있었다. 내가 그의 어깨에 올라서자마자 내 종아리를 감싸 안고 일어나 중심을 잡았다. 훌쩍 높아진 시야가 들어왔다. 나는 손쉽게 창문턱에 올라설 수 있었다. 반대편에는 또 다른 기사가 있었다. 내가 끈을 떨어뜨려 다시 아레인에게 건넸다.

"끈을 잡고 반대편으로 내려서시면 기사가 도와드릴 겁니다."

아레인이 잡고 있어 팽팽해진 끈을 잡고 반대편으로 넘어가자 기사가 나를 받았다. 궁 밖으로 순식간에 나온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아레인은 혼자서 끈을 잡고 창턱에 금세 올라서더니 아무 도움 없이 그 높은 곳을 훌쩍 뛰어내렸다. 와 진짜 기사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공주님,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무슨 일 인진 모르겠지만 그 복장은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니 이걸 덮으세요."

마법사들이나 여행자들이 자주 착용한다는 로브였다. 다만 아레인이 건넨 로브는 질이 굉장히 좋아서 여행자보다는 마법사들이 착용할 법한 것이었다. 로브를 두르고 이동하며 내가 궁금한 것을 아레인에게 물었다.

"아레인, 저 어떻게 찾았어요? 오라버니가 걱정 많이 했겠죠?"

테일러가 나보고 사고 칠 거 같다고 걱정했는데, 자의는 아니어도 결과적으로는 사고를 쳤으니 나도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공주님이 공식적으로 제국에 방문한 것이 아니므로 은밀히 알아보고 있었습니다만, 사실 오늘까지 찾지 못하면 제국에 사실을 밝히고 공개수사요청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공개 수사요청을 하려고 했다고? 아아.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나 때문에 왕국이 큰 손해를 입을 뻔한 것이다.

보통 고위 귀족이 나처럼 국외여행을 가듯 신분을 속이고 사절단으로 섞어 들어가는 경우는 꽤 많아서, 신분만 확실하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고 들었다. 왕국에도 제국의 첩자가 이미 깔렸기 때문에 내가 비공식적으로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일만 없다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인 것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밝히게 된다면 그것은 대외적으로 우리가 신분을 속였다고 시인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약점으로 잡혀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덤으로 왕국의 이미지도 국제적으로 실추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이 베고니아를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쳤는지를 생각하면,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것 또한 충분한 전쟁의 빌미를 주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테일러 왕세자가 그런 불리함을 감수하고 나를 찾으려고 했다니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황제에게 잡혀있었다는 거 알면 엄청 기겁하겠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이다.

"모두 공주님 걱정만 했습니다. 다들 물밑에서 찾고 있었는데 황제궁에 딸린 비어있던 작은 궁에 최근 여인 한 명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제국의 시중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더군요. 혹시나 해서 가본 것인데 공주님을 찾아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나 때문에 고생 많았겠네요. 다들…."

"왜 그곳에 갇혀있었습니까?"

아레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황제에게 납치당했다고? 저걸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전쟁으로 왕국이 몰살당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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