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
"하… 하지만 다시 올게요. 왕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정식으로 방문할 테니깐…."
여기서 내 존재를 밝히면 리노아, 투알린, 프레타스 세 개 국가에 걸친 심각한 외교 문제로 변질될 수 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황제를 믿을 수 없으니, 일단 나를 밝히는 건 정식 방문한 뒤로 미뤄야겠다.
"다시 방문한다고?"
"그래요, 다시 방문해서 국빈으로 맞아주시면 되잖아요."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아기 사슴은 제 왕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거 같은데?"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콧방귀까지. 나는 전쟁광인 당신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거든요? 왕국을 하나하나 다 삼키는 소설책 속의 그를 생각하니 눈앞의 사람과 매치가 되지 않았다.
베고니아를 패망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패도를 걷는 황제와 사람을 대하는 핀트가 어긋난 황제. 어린 시절이 어땠기에 이렇게 자랐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잘되었다. 이참에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나 알아봐야지. 이런 질문 던진다고 황제가 내 목을 베어버리진 않겠지.
"폐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들려줄 수 있어요?"
내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자 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린 시절? 뭐가 궁금해서 묻는 거지. 어린 시절이야 다들 그게 그거 아닌가."
사람의 성격이 형성되는 시절인데. 그게 그거라니. 아니에요.
"폐하께서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 궁금해서 그래요. 누가 폐하를 돌보았는지… 그런 것들이요."
"어린 시절 나를 돌보았던 유모는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암살당해 죽었다."
암살… 그러고 보니 책 속에서 황태자의 아빠인 황제는 어떤 환경에 자랐는지 나오지 않지.
"부모님과는 사이가 좋으셨어요?"
"마찬가지로 내가 다섯 살 때 독살당해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아….
"그렇군요…. 어릴 때 많이 힘들었겠어요…."
자신을 돌보아주고 곁에 있던 이들이 전부 한순간에 사라지다니, 지금 내가 원하지 않는 게 그건데. 황제는 어릴 때부터 이런 걸 겪어왔다고…. 그렇다면 황제가 귀족들 목을 잘라 숙청하고 대전을 피로 물들인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해는 가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황제는 뭔가 어긋난 채 성장해 있었다. 그가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향해 꽃을 뿌렸다.
"나를 걱정해주는 건가? 이거 꽤 기분 좋은데."
진짜로 너무…. 좋은데….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선황제가 죽으면 바로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하는 거 아닌가?
왜 그는 다섯 살에 부친을 잃었는데도 1년 전에 즉위한 거지. 그 말은 그동안 제국은 황제 자리가 비어 있었다는 건데 말이 안 된다. 최근의 국제 정세만 속성으로 급히 배웠더니 역시나 여전히 모르는 게 많네. 왕국으로 돌아가면 황제에 대해서 더 자세히 배우고 와야겠다.
“폐하는 1년 전에 즉위하셨잖아요. 그럼 그전까지는 황제 자리가 비어 있었던 거예요?”
“귀족들이 황권이 강화되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이제야 의문점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린 황태자를 붙잡고 귀족들이 황권을 내리누르고 본인들이 득세하려고 한 모양이다. 황태자는 황제가 되자마자 그런 귀족들을 숙청해 버린 것이고 말이지. 뭔가 우리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거 같은데. 처음으로…?
"그럼 폐하의 교육은 누가 담당했나요?"
"테너가 했지. 그가 내 모든 교육을 도맡았다."
역시?! 하지만 아무리 시종장의 뭔가 그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해도…. 모르겠다. 시종장이 아이를 이상하게 키워놨어.
"아마 테너가 없었다면 그대를 볼 수 없었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가 들으면 테너가 우리 소개팅시킨 주선자인 줄 알겠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굉장히 많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테너가 아니었으면 지금 살아서 그대를 보고 있을 수도 없었겠지."
흠…. 그래, 교육보다는 사람 목숨이지. 아니 저 목숨 살려서 다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역시 교육이 먼저…. 그만 생각하자. 황제는 나를 만난 것에 매우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나를 향한 감정이 도대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고민하게 된다. 나를 진짜 동물처럼 생각하는 거면 잘못하다가는 목이 뎅겅. 아, 인간과 동물 구분을 하지 않는 사람이지. 나는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나를 만나서 좋아요?"
"그래."
대답은 참으로 칼같이 나온다.
"어떻게 좋은 거 같아요?"
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냥 좋은데, 뭘 묻는지 모르겠군."
그걸 알아야 내가 당신의 행동 방식에 대한 대응책을 세울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나를 동물로 좋아하는지, 사람으로 좋아하는지, 알고 보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신기하다 싶어서 집착하는 거라든지.
그래도 지금까지는 내 우려와 다르게 우리는 꽤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참에 궁금한 거 다물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제 왜 그렇게 내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문질렀는지.
또 그걸 닦으니까 왜 못마땅해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어제의 그는 그냥 짐승과 다른 바 없었다. 나를 동물처럼 대하더니 자기는 더 심한 짓 해 놓고 자각도 없다.
"어제 내 얼굴에 피는 왜 묻혔어요."
"피? 그냥 눈을 감긴 것뿐이야. 무서워하기에."
"내가 그 피도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죽은 사람의 피잖아요."
내 말을 듣고 있던 황제의 표정이 마치 방금 이치를 깨달은 사람처럼 퍼뜩 놀라더니 이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바로 깨달은 거야?! 역시 말로 해 주니깐 잘 알아듣는구나!
"나는 자주 보니깐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군. 죽은 사람 피를 그렇게 무서워할 줄은…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내 피를 묻히도록 하지."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왁왁- 그게 아니라고 소리 지르려다가, 다시 찬찬히 설명해 주기로 했다.
"눈앞에서 사람을 도륙하고 그걸 보이면, 그게 상대방 피든 폐하 피든 똑같이 무서워요."
"……."
이번에는 황제가 말이 없었다. 왜, 또 뭐가 문젠데….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나한테, 피 묻히고 싶어요?"
"그래."
"…왜 묻히고 싶은데요."
그 이유를 저도 모르는지 황제가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깨달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표시를 남기고 싶어서 그런 것 같군."
그가 한참 만에 답을 내놓았다.
"표시요?"
"어디든, 내 흔적을 남겨 놓고 싶은데."
“어디에 무슨 흔적을요…?”
그가 손끝을 세워 제 턱을 느릿하게 쓸며 고민에 빠졌다.
"지워졌으니 다시 내 피를 묻혀야겠어."
원시인이세요…? 말끔 단정에 금욕적이고 반듯하고 완전한 내 이상형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당신 안에 들어있는 건 짐승이나 다름이 없으시군요.
"그렇게 안 해도 돼요. 피 안 묻혀도 되잖아요."
"나는 묻히고 싶어. 지금이라도."
그가 단호하고 강경하게 제 뜻을 밀어붙였다. 그게 뭐라고 자꾸 흔적을 남기고 싶대. 나는 황제를 살폈다. 그는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고 나 또한 치렁치렁 붙어있던 보석은 다 떼어 내서 서로 주고받을 만한 게 없었다.
"피 묻히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도 있어요."
"그대가 다치는 건 싫군."
제가 왜 다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그래봤자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답니다.
"그냥 내 피를 묻혀야…."
그가 트롤리 쪽으로 가더니 식기용 나이프를 찾아 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칼날을 이리저리 돌리며 어디를 찔러서 피를 베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스톱! 스톱!
"안 다치고! 피 안 묻히고! 흔적 남기는 방법 있다니까요!"
그가 멈칫하더니 나이프를 휙 내다 버리고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걸 왜 이제 말하지?"
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책망했다. 지금까지 계속 다른 방법이 있다고 말했거든요?!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내가 이만큼 저 사람을 이해시켰겠지…? 시켰을 거야. 나는 소매를 걷어 손목에 걸린 얇은 팔찌를 그 앞에 내밀었다.
"……."
황제는 나를 한번 손목을 한번, 뭐 하라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번갈아 보았다.
"이걸로 대신하세요. 팔찌 드릴게요."
이걸 주면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유일하게 하고 있던 장신구를 그에게 주었다.
“그대의 흔적을 내게 주겠다는 거로군. 이건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인 것 같은데?”
“다음에 폐하도 저한테 아무거나….”
“아니, 지금 주지. 피 안 묻히고도 남기는 방법, 나도 생각났거든.”
그가 내 팔목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의아해서 쳐다보자 그가 나른하고 관능적인 미소를 피어 올렸다. 머릿속에서 왠지 모르게 위험신호가 댕댕 울리기 시작했다.
“뭐… 하시려구요?”
“흔적, 내게 팔찌를 줬으니 나도 돌려줘야지.”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유지한 채 바짝 다가와 붙자 그의 체향이 물씬 풍겼다. 아…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내가 손목을 슬며시 거두자 그가 내 팔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잡은 손과 손목 사이로 서로의 뻣뻣하게 굳은,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져왔다. 다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내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전신에 힘이 빠지며 눈앞이 몽롱해졌다. 그의 남청색 눈동자가 무언가의 갈망으로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속이 졸아서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그가 손목 안쪽에 입술을 맞대었다. 그리곤 혀를 내밀어 한 번 할짝대더니, 순간 강하게 깨물었다.
'읏….'
내가 움찔하자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지며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시선이 얼기설기 엉킨 것처럼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입술을 움직여 살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몇 번을 그렇게 빨다가 다시 혀로 끈끈하게 핥아 올렸다. 손목에 마킹이 된 지 오래인데도 그만둘 생각이 없는지 끊임없이 손목을 깨물고 빨고 핥고 있었다.
"그… 그만, 됐어요. 다 됐다구요!!"
그가 아쉬운 눈빛으로 입술을 떼어 냈다. 나는 서둘러 소매 속으로 손목을 감추고 그에게서 후다닥 떨어졌다. 정신 차려라! 정신!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사람이 아니다. 짐승이다.
"그대의 이름을 알려 줘."
…빨리도 물어보십니다.
"리오니… 예요."
"나는 카시카프다."
황제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통성명을 이제야 하다니. 우리 뭔가 순서가 한참은 잘못된 거 같아.
"리오니…."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남긴 흔적을 보고 싶은데."
내가 보여줄 것 같아!? 버럭 화내려다가 그가 황제인 걸 자각하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금 말고 나중에…나중에요!"
그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방을 둘러보더니 밖에서 대기 중인 테너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테너, 이 방에 있는 물건들에 전부 알람 마법을 걸어 놓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