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
지금 당사자 눈앞에 두고, 그것도 눈 마주치면서 동물 얘기하는 거야?
"혹시 폐하께서 개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는지요."
테너가 황제의 피 묻은 옷을 살피며 물었다.
"역시 눈을 감길 걸 그랬군. 투알린인이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황제가 침음을 삼키며 턱을 쓸었다.
"자네 손자가 키우는 고양이에 대해 말해 봐."
"처음에는 경계가 매우 심해서 이틀 동안은 침대 밑에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합니다."
저기요, 저 사람이거든요?
"알겠다. 왜 도망치나 했더니 나를 그렇게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군."
황제가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아무 언급도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진짜 지금 고양이랑 나를 동일시하는 거 아니지?
"저 사람이에요."
내가 테너를 돌아보며 말하자 테너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여성분을 대하는데 서투르셔서 그렇습니다. 전부 귀찮다며 내치셔서요. 처음 있는 일이지요. 아, 그렇다고 남녀상열지사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 그거야 황족이니까 교육을 받았겠지. 그런데,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냐고요. 동물 취급당했는데?
"알겠어요.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는데요."
"폐하의 명이 없으면 힘들 것 같습니다. 영애."
지금 나보고 계속 여기 있으라는 소리야?
"그럼 지금 당장 폐하를 불러서 저는 돌아간다고 전해주세요."
"경계가 풀리실 때까지 안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만."
아이고, 머리야.
"저는 사람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럼 도망가지 않으실 겁니까?"
아니, 이게 도망가고 말고 할 문제인가요? 어째 황제부터 시종장까지 하나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없어! 나와 테너가 눈싸움을 시작했다. 실은 나의 일방적인 노려보기였다.
"빨리 보내 줘요. 테너!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천천히 기다리시면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머리 장식을 바꿔 드릴까요? 피가 묻었습니다."
시종장이 고양이는 경계하네 뭐네 하며 헛소리하니 못 나가는 거 아냐! 씩씩거리던 나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세숫물이랑 머리 장식이요."
일단 피 묻은 것부터 닦아내야겠다. 테너가 세숫물과 타월, 머리 장식도 비슷한 디자인으로 가져왔다.
"연회 도중 나오셨으니 출출하실까 싶어 간단히 드실 것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저게 간단히 먹을 거라고? 눈앞에는 연회 음식을 종류별로 가져다 놓았는지 수십 종의 음식이 몇 개의 이동식 트롤리에 걸쳐 올라와 있었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면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먹을게요. 테너는 이만 나가 보세요. 전 머리 장식도 바꿔야 하구요."
테너가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한꺼번에 많은 일이 일어나서 정신이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몸이 떨리지 않았다. 나는 예전부터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 눈앞에 닥치면 그일 자체를 회피하는 방어 기제가 있었다.
내가 겪은 일이나 사건이 아니라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남 일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해결하지 않고 기억에 묻어도 상관없으면 다시는 그 기억을 꺼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뎌졌다.
그리고 정말로 남의 일처럼 그 일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었다. 억지로 꺼내서 깊게 들여다보면 어찌 될지 모르나 단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해결하기 위해 그 일에 계속 노출되느라 회피할 수 없을 때는 나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지금은 내 눈앞에서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던 암살자들이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범죄자들이 죽은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황제를 암살하려 한 범죄자이기 때문에 남 일처럼 회피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였다. 그런데 만약 눈앞에서 내가 알고 지낸 사람이 그렇게 죽어 나간다면 어떨까. 그것만은… 나는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가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본 황제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회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는 신사적으로 보였고, 사람을 죽일 때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가차 없이 냉혈하고 잔인한 군주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나를 대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야생에서 자란 아이 같았다.
도시인과 정글에 사는 원주민처럼,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 한 박자 어긋나 있는 느낌이었다.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 여자한테 피 묻은 손으로 눈을 감기고 그 행동이 이상하다는 자각이 없는 것 같다.
나를 동물 대하듯 하더니 내가 보기엔 나보다 황제가 더 동물… 아니 짐승 같은데?! 끄으응…. 머리 아파.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오늘은 이게 한계인가 보다. 왕국에 돌아가서 생각해야지 여기서는 뭐 죽도 밥도 안 될 거 같아.
배는 고픈데 이상하게 입맛이 없었다. 트롤리에 쌓여 있는 음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 장식을 벗고 타월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고양이도 사슴도 아닌 사람인데 이게 방치가 아니고 뭐람! 이렇게 사람을 덜렁 던져두고 가면 어떻게 하냐고! 시종장이 저렇게 이상하게 알려 주니깐 황제도 이상해진 거 아닐까? 나는 시종장 탓을 하기 시작했다.
* * *
3시간이 지났고 자정을 넘겼다. 날이 바뀌었어…. 테일러랑 티나가 무지 걱정할 것 같은데. 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하니 한층 더 초조해졌다. 이게 뭐야, 대체. 점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다시 오면 대화라도 해볼까 했더니 안 되겠다. 내가 알아서 나가든지 해야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나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창문이 있긴 한데 너무 높이 있었다. 환기 용도로 쓰이는 것 같다. 나는 근처의 테이블을 낑낑거리며 끌어와 창문 쪽으로 들이밀었다. 테이블 위로 올라와 높이를 가늠하자 창문이 어깨에 왔다. 허리까지는 와야 창문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없나? 네모난 거 네모난 거.
오! 저거야. 황금빛의 번쩍이는 네모난 금속상자가 보였다. 이거 금고 같은데…? 뭐 상관없나? 나가기만 하면 되지.
헉, 엄청 무거워. 하나둘 셋…. 낑낑대며 겨우 옮긴 금고를 테이블 위에 쌓고 위로 올라가서 다시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음…이 정도면 힘들긴 해도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아. 뛰어내릴 때 어떻게 하지? 역시 커튼 같은 거 뜯어야 하나…. 안전하게 나갈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벌컥-
순간 놀란 심장이 쑥 내려앉았다. 이거 아까 황제가 문을 발로 찰 때 들었던 소리랑 비슷한데…? 내 고개가 기름칠 안 한 오래된 기계처럼 뻣뻣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황제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황제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내 영역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간도 크군. 그 금고, 움직이면 내게 알람이 오거든."
보통금고가 아니었어…. 지금까지 내버려 두다가 금고 알람 울려서 왔냐? 황제가 도망가기만 해 보라는 듯, 남청색 눈동자가 푸른 불꽃을 일렁이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러면 겁… 먹을 줄 알고? 나는 창턱을 두 손으로 잡고 고민하고 있었다.
"어서… 위험하다. 내려와."
내가 움직임이 없자 황제가 성큼 다가와 제게 안기라는 듯, 내게 두 팔을 내밀었다. 숫제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방치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붙잡는 거예요?"
내 말을 들은 황제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방치…? 아기 사슴처럼 벌벌 떨기에 숨통 좀 트이라고 놔뒀더니,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모양이야."
"난 사람이니깐 대화를 해야죠, 내가 언제 내버려 두고 가라고 했어요? 난 사! 람! 이라고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황제의 고개가 옆으로 갸웃 넘어갔다.
"당연히 그대는 사람이지. 내가 바보로 보이나?"
"그럼 왜 날 아기 사슴… 이라고 부르는데요."
황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아기 사슴 같아서. 당연한 거 아닌가?"
하나도 안 당연합니다.
"나를 고양이처럼 방치했잖아요. 난 사람이에요, 그러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도망가지 않을 건가?"
으아…. 시종장이랑 똑같은 말 하고 있어! 혹시 황제가 시종장에게 교육받은 걸까. 아니면 둘이 비슷한 인간이라서?
"하아…."
황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아기 사슴.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뭘 원하는 거지?"
"우선은 여기서 날 내보내 주세요."
황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가운 냉미남의 얼굴에 가슴이 선득했다.
"언제까지 서 있을 거지?"
황제가 팔을 쭉 뻗어 손끝으로 까딱하며 오라고 손짓했다.
"내보내 줄 거죠…?"
"잘 알았어. 그대는 사람이니까 방치하면 안 된다고."
이제야 맞는 말을 하긴 하는데 왜 내보내 준다는 말에는 대답이 없는 거냐. 한 번 더 내보내 줄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이 대치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내려가서 다시 설득해야겠다 싶어 발을 밑으로 내디뎠다. 금고에서 내려오자마자 테이블 위에 위태하게 서 있는 나를 낚아채 품에 안은 황제가 창문을 바라보더니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렇게 빠져나가려고 했단 말이지. 참 귀여운 짓을 하는군."
그가 나를 다시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히며 물었다.
"언제까지 코와 입을 막고 있을 거지? 답답하지 않나?"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장식으로 다가왔다. 헉. 눈앞에서 멈춘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고 내 머리 장식을 방어했다.
"절대 안 돼요. 이거 벗기려고 들면 진짜로 도망칠 거니깐!"
내 말을 듣자마자 그가 빠르게 손을 거두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빤히 응시했다.
"이제 방치하는 일은 없을 테니깐, 나도 같이 있고 싶어 힘들었는데 아주 잘 됐어. 앞으로 계속 같이 있도록 하지."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같이 있자고요?"
그가 진한 웃음을 머금고 내 이마에 입 맞추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커다랗고 단단한 가슴팍으로 감싸자 나는 푹 파묻힌 모양새가 되었다.
"이제 계속 그대와 같이 있을 거니깐 걱정할 필요 없어."
그의 진한 머스크 향이 내 몸에 감겨들었다. 팔에 닿은 단단한 가슴에서 따뜻한 체온이 내게로 전해져 와 천천히 몸을 데우기 시작했다. 따뜻하다… 이게 아니야! 나는 그의 몸을 황급히 떼어 내고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폐하,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돌아가야 한다구요. 계속 같이 있을 수 없어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