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7
그 집요한 눈길에서 벗어나 서둘러 대형 온실을 빠져나왔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듯 나왔더니 너무 숨이 찼다. 아니, 어쩌면 온실에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참고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다행이다… 저기 있었어. 나를 기다리던 마차를 다시 잡아타고 마부를 재촉하며 리노아 사절단이 있는 궁의 내 방으로 다급하게 돌아갔다.
* * *
내가 돌아가자 티나가 나를 반겼다.
"공주님. 정말로 일찍 돌아오셨네요. 호기심이 많으셔서 한참 뒤에나 올 줄 알았어요."
내 말 하나도 안 믿는구나. 티나. 아… 황제만 아니었어도 더 돌아보는 건데. 황궁 내부구조도 알아보려고 했던 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티나. 황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음…. 저는 잘 모르죠, 지금까지 들은 소문을 조합해 보면…. 아마 엄청 무섭게 생겼을 것 같아요."
"그… 그렇지?"
그건 뭐였을까…. 황제가… 왜 그렇게 눈을… 쓸어대… 고… 입술을…. 가슴 떨리게…. 아… 큰일이네. 아직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황제가 너무 내 스타일이라서 겉모습에 홀라당 넘어갈까 봐 위험하다.
내가 반하면 안 되고! 네가 반해야 하는데! 단정하고 깔끔하고 반듯하고 금욕적이고… 으으.
"공주님, 왜 그러세요?"
"응. 심호흡을 좀. 궁 밖이 정말 휘황찬란해서 내 심장이 다 떨리더라고."
"저의 오랜 소원이 풀리겠네요. 저도 짐 정리 거의 다 했어요. 나중에 같이 가요."
그래 맞아. 티나 반짝이 좋아하지.
"응. 티나 나 잠시 혼자 있고 싶은데…."
"밖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티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중에 필요하면 불러 달라며 방을 나갔다.
나갔지…? 나는 침대에 다이빙하고 고개를 처박았다. …진정이 안 돼! 귀신에게 홀린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다음번엔 진짜 정신을 단단히 차리자. 단단히! 나는 양 볼에 손바닥을 스스로 찰싹찰싹 두드리며 다짐했다.
황제를 멀리서 주시하며 살펴본다는 계획은 망했다. 완전히. 그는 승전 연회가 끝나고 다시 리노아 왕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가 누군지 몰라야 했다.
아까 온실에서 마주치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나중에 승전 연회에서 들키지는 않겠지. 옷도 다른 거로 갈아입고 눈 화장하고 투알린 여자들 속에 숨어들면 모를 거야. 나는 일반인 1이다. 일반인 1… 로 보인다.
* * *
승전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와 티나는 투알린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낮에 입은 것과는 완전 다른 디자인의 드레스로 말이다. 눈 화장으로 분위기도 다르게 연출했다.
"아까 낮에 공주님이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셨을 때 벨라스 경이 다녀갔어요."
"아, 아레인이랑 얘기한다고 해 놓고 계속 못 했네. 내일은 진짜 이야기를 나눠야겠어."
승전 연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달아오른 연회 분위기에 한껏 취했을 때 들어가기로 했다. 이제 막 연회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갈 때 즈음. 입장을 알리는 시종이 우리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단장하느라 좀 늦었답니다. 알리지 않아도 좋아요."
우리는 초대권을 보이며 서둘러 입구로 들어섰다.
"공주님, 너무 답답해요. 낮에 이거 입고 돌아다니신 거예요?"
아무래도 코와 입이 막혀 있다 보니 답답하긴 하다.
"응. 그런데 나중에는 별생각이 없었…."
…생각하지 말자. 하면 안 돼. 뚝! 두리번거리며 황제를 찾았다. 나는 티나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티나, 저기로 옮기자."
황제는 각국의 사절단 대표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중에는 테일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복을 입고 있는 황제는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는 신사적이고 점잖은 모습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정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정신 차려야 해! 정신! 티나와 나는 황제의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주님, 제가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티나가 음료를 가지러 가고 나도 조심조심 옮기고 자리 잡는데 황제의 맞은편에서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나를 쳐다보더니 눈썹 한쪽을 씰룩였다.
아. 투알린 사절단 대표였다. 그는 내 옷과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도 아니고 투알린 대표한테 들키는 거야? 후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다시 자리를 옮기려 할 때였다. 투알린 대표가 내게 계속 눈길을 주자 황제가 뒤돌아보았다.
아, 이런…. 딱 마주친 황제의 두 눈이 휘어지며 진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찾았다-. 그가 입 모양으로 내게 말했다. 이번 연회에서 황제가 내게 말을 건네면 모두 주목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소속 없는 유령 같은 존재기 때문에 절대 눈에 띄면 안 된다. 안 되는데 황제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오지 마! 나는 황제가 끝까지 따라올까 봐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한숨 돌리고 티나 찾아서 돌아가야겠다. 염탐이고 뭐고 글렀다. 그의 성격을 대충이라도 파악하겠다는 내 계획이…. 아, 역시 온실에서 만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럴 바에야 차라리 공주님 신분으로 다음번에 제대로 방문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황제가 혹시라도 성격파탄자일까 봐 정식방문으로 알아본다는 선택지는 최대한 피하려고 한 거였는데, 연회에서 잠깐 지켜본 바로는 황제가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나쁘다기보다 오히려 신사적이었는데…. 계획을 변경해야겠네. 사절단 방문 끝날 때까지 궁 안에서 꼼짝 안 하고 있어야겠다.
아직 연회는 초반이라서 연회장 밖에는 나와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나는 정원수 근처에 있는 장식이 화려한 벤치에 앉아서 숨을 돌리려는 참이었다.
"투알린인은 하나하나 다 살펴봤는데 그대는 없더군."
"콜… 콜록…."
등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사레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뒤돌아보았다.
"또 도망갈 수도 있으니 잡고 있지."
그가 내 손을 끌어당겨 제 앞으로 바짝 붙였다. 진한 머스크 향이 체취에 묻어났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다시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
"낮에 나를 홀리고 도망가서… 내가 그 온실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멍청하게 서 있었는지 아나?"
억울하다… 홀린 게 누군데!
"그래놓고 다시 도망을 치는군, 대체 정체가 뭐지?"
"나중에…."
그건 지금 말고 나중에…. 내가 왕국 돌아가고 제국으로 정식으로 방문해서 밝히려고 했는데 이렇게 쫓아오면 어떻게 하나.
"나중에?"
그만 좀 쳐다볼까요. 부담스럽게. 온실에서부터 집요한 남청색 눈동자가 나를 잡고 안 놔준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도 나를 따라 방향을 틀어 나를 마주 본다. 왜… 왜 이래. 내가 반대쪽으로 돌리자 또 따라온다.
"하아…."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대는 왜 이렇게…."
“…….”
왜 이렇게… 뭐요?
쌔-액-.
날카로운 파공음이 귓가에 박히는 순간 황제가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몸을 반대로 확 틀었다. 어둠 속에서 날아온 단도가 발 앞의 잔디 속으로 처박혔다.
뭐… 뭐야 이게??
황제는 나를 덥석 안아 들더니 벤치 뒤에 나를 숨겼다.
"도망가지 말고 여기 있어. 알겠지? 도망가다 칼 맞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데… 벤치 너머 잔디에 꽂힌 단도를 보자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려왔다.
"패망한 무리가 아직도 남아 있었나 보군."
그가 말을 꺼내자 낮은 덤불 뒤로 검은 옷에 복면으로 무장한 새까만 인영들이 한 무리가 튀어나왔다. 암살자…? 베고니아의 잔당들인가. 몸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승전 연회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되리라고 예상도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황제는 칼이 없는데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는 거지? 여기서 황제도 죽고 나도 죽는 건가…. 참 절망적이네. 이렇게 빨리? 뭘 해 보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그건 내 기우였다. 그는 가까이 있던 복면인의 단검을 빼앗아 그의 목에 찔러 넣었다가 뽑고는 바로 다음 타깃인 복면인의 머리로 단검을 날렸다.
쒜-엑-.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등줄기를 휘감았다. 단검이 머리에 박힌 두 번째 복면인이 쓰러지자 복면인이 들고 있던 장검을 집어 들며 황제가 말했다.
"나는 내 주변에 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 정말 싫어하지…."
장검을 복부에 찔러 넣고 동시에 다른 이를 발로 가격하는 등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모든 복면인들을 처리한 황제가 마지막 암살자의 손바닥에 칼을 꽂아 넣었다.
"아아악…. 차라리 죽여라!!"
"한 놈은 남겨둬야 내 아랫놈들이 일을 할 거 아냐. 꽤 시끄러운 놈이군."
암살자의 머리를 걷어차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아까 네가 말한 녀석들인가?”
황제가 허공에 대고 말하자 어디선가 검은 정복을 입고 있는 황실기사단처럼 보이는 자들이 튀어나왔다. 저 사람들은 뭐하다가 이제 나온 거야…? 그 중 한 사람이 황제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한곳으로 모으는 중이었는데….”
“한동안 암살자들이 없어서 허전했는데 간만에 몸 풀었군, 처리해.”
그 남자가 복면인들을 처리하는 동안 황제는 예복을 핏자국 낭자하게 물을 들인 채로 내게 다가왔다.
"왜 이렇게 벌벌 떨지? 암살자들을 처음 보나? 투알린에서 흔히 있는 일인 걸로 알고 있는데."
투알린이고 뭐고 나는 처음 본다고,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도륙당하는 거…그런 거 보기 싫다고 했더니 황제와 엮이자마자 보게 되었다.
"흐음…."
황제가 피 묻은 손으로 내 눈을 감겼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눈을 감고 있어라."
"피…."
착각인가. 축축한 것 같은데, 내 눈이. 지금 내 얼굴에 피 흥건한 거 아냐?
"아아, 상처 입은 아기 사슴이 되었군."
이런… 미친…. 남의 얼굴에 피를 묻혀 놓고! 황제가 내 피 묻은 눈 위로 입 맞추며 말했다.
"돌아가서 치료하자. 아기 사슴아."
* * *
그가 나를 품 안에 안고 돌아가는 동안 나는 미친 듯이 소매로 눈 주위를 문질러 닦았다. 황제가 못마땅한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무시했다. 그런데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그가 화려한 궁 문 두 짝을 발로 뻥 찼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폐하, 그 여성분은 사절단인지요?"
시종장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드디어 물어봐 주는 거예요? 이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된다고요! 물론 투알린이 아니라 리노아 왕국과…. 아, 우리만 외교 문제가 되나? 이 인간은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나도 신경 안 쓸 것 같아. 빨리 안 돌아가면 테일러랑 티나가 걱정할 텐데….
"연회는 어떻게 되었나요?"
"연회는 아직 한창 진행 중이지.”
황제가 나를 침대에 앉히고 눈을 마주했다. 진짜 눈 마주치는 거 좋아하는 거 같다.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테너에게 말을 꺼냈다.
"테너, 손자가 동물을 키운다고 하지 않았나?"
"예, 고양이를 키우지요."
황제가 안다시피 다가와서 내 등을 찬찬히 쓸었다.
"아기 사슴이 제대로 겁을 먹었는지 아직도 몸을 떨고 있는데 이럴 땐 어찌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