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6
"대체 뭘 보고 오겠다는 거야? 제도 거리가 궁금한 거야? 저번처럼 쇼핑하려고 그러니?"
황제와는 빼도 박도 못하게 엮이게 생겼으니 얼굴도 좀 보고 인성도 보고 그러려고 그러죠.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사람이면 미안하지만 저 도망칠지도 몰라요. 그때는 우리 왕국만이라도 살아남기로 해요. 속마음을 길게 주절거린 나는 테일러에게 짧게 대답했다.
"맞아요. 왕국에는 신상품이 늦게 들어오잖아요."
"요즘은 그런데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샬리오니의 몸에 들어온 뒤로 공부에만 열을 올리는 나를 두고 하는 소리다.
"티나가 그러는데 요즘 제국에 야자 열매 기름을 이용한 화장품이 그렇게 인기래요."
"그러니…."
테일러가 관심 없는 주제인지 건성건성 대답하기에 나는 티나처럼 더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질린 얼굴로 그래도 계속 맞장구쳐주는 게 재밌어서 나는 오랜만에 신나게 입을 놀렸다.
"페리안이 오랜만에 널 보면 어떨지, 궁금하구나. 지금도 흥미 없다고 할지 말이야."
테일러가 내 말을 더 들어주기 힘들었는지 화제를 바꾸었다.
"페리안이 누구예요?"
"페리안 쇼오 투알린."
"아, 나한테 투알린의 드레스를 선물한 왕자요?"
테일러의 동공이 커지며 자세를 바로잡고 물었다.
"페리안이 기억나?"
"티나에게 들었어요. 선물했다고."
테일러의 표정이 다시 흥미를 잃고 시들해졌다.
"그래, 네가 유일하게 거절한 남자지."
"그 왕자가 나를 좋아했어요?"
샬리오니는 다른 왕국의 왕자까지 홀리는 마성의 여자였어….
"그럼, 투알린에서는 드레스를 선물하는 게 구애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하더라고. 어릴 때 한번 보고 졸졸 따라다닌 거 기억… 아… 기억 안 나지. 그런데 선물하고 나서 너랑 대화를 나누더니 돌연 흥미가 사라졌다고 하더구나. 그전에 너한테 거절당해서 자존심 챙기려고 그러는 걸 수도 있고. 이번에 보면 알겠지, 뭐."
테일러가 짓궂은 표정으로 턱을 괴며 나를 응시했다.
“제가 왜 거절했는데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네 타입이 아니었다고 한 것도 같고. 아무튼, 네가 거절한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지. 그 녀석 꽤 충격받았었거든. 그래서 너랑 대화하자면서 쫓아다니더니 자기도 금세 흥미 없어졌다고 그러더라고.”
“그럼 대화할 일이 딱히 없을 거 같은데요?”
흐음… 나는 제국에 도착하면 방에 있을 때 말고는 무조건 눈만 빼고 온몸을 둘둘 감을 예정인데 말이야. 그쪽도 흥미를 잃었다 했으니 만날 일이 있을까? 순전히 테일러 본인의 재미를 위해서 그러는 것 같다만.
* * *
제국에 도착한 왕국인들은 곧 저녁에 있을 승전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려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만 빼고. 나는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티나를 응시하다가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석을 다 떼었어도 여전히 화려한 문양들이 많아서 점잖게 돌아다니려 했던 내 계획에 좀 어긋나긴 한다.
티나가 바빠 보이니 알아서 갈아입어야겠다. 여타 드레스와 달리 품이 넓은 원피스 느낌이라서 혼자서도 쉽게 갈아입을 수 있었다. 방을 왔다 갔다 하던 티나는 바빠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 장식까지 착용하고 잠시만 둘러보기로 했다.
"티나, 나 잠시만 둘러보고 올게."
"어머, 공주님. 혼자서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여행하러 오신 거라도 조심하셔야 해요. 더군다나 여기는 제국인걸요."
으음…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사전조사 때문인데…. 현재 투알린 드레스를 입은 나를 아는 건 티나밖에 없어서 아레인을 호위로 붙일 수도 없다. 애초에 투알린 사람처럼 보이는데 리노아 왕국 기사가 옆에 붙어있으면 이상한 모양새일 것이다.
"티나, 정말 잠깐만 살펴보고 올게, 응? 금방 올게."
나는 머리 장식을 벗어던지고 티나의 팔에 매달려 살랑살랑 흔들었다. 티나가 내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에 머리 장식을 덮어쓰고 조르는 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약속하세요. 꼭! 꼭! 살펴만 보고 오셔야 해요!"
"응. 걱정하지 마. 진짜로 살펴만 보고 올 거야. 안심하렴."
내 짧은 외출을 알렸으니 이제 제국이 어떤 곳인지 좀 알아볼까?
* * *
여기를 봐도 금칠, 저기를 봐도 금칠. 아주 휘황찬란하다. 건물마다 금이 번쩍번쩍해서 눈이 부셨다. 그야말로 웅장함과 화려함이 가득한 황궁이었다.
마차 없이는 돌아다닐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래서는 황궁의 구조를 다 알기 힘들겠는데…. 마차를 잡아타고 잠시 돌았는데도 이런 크기라니. 어림잡아 리노아 왕궁의 열 배는 되어 보이는 면적에 기가 질려 황궁의 정보를 얻으려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마차 밖으로 절경이 펼쳐졌다.
저렇게 아름다운 정원이 있어? 흐드러진 꽃밭에 정원수와 함께 대형 온실까지. 마부 석을 향해 똑똑 두드리고 여기서 내린다는 신호를 보냈다. 마차에서 내려 정원으로 발을 디디자 향긋한 꽃 냄새가 물씬 풍겼다.
와 진짜 좋다. 오랜만에 편안해지는 기분이야. 향기 좋은 향수를 한 번에 들이키는 몽롱한 기분에 휩싸였다. 역시 제국답게 정원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다. 여태 쌓였던 긴장된 몸이 단번에 풀어지며 절로 입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꽃밭 사이로 드러눕고 싶었지만 내 궁도 아닌데 그런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아쉽다.
한참을 구경하고 대형 온실로 들어서자 온갖 귀해 보이는 식물들과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다. 티타임을 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도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 진짜 통째로 떼어 내서 왕국으로 옮기고 싶다. 탐욕스러운 눈길로 대형 온실을 둘러보다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누군가 있었다. 곧 멀리서 나를 지켜보던 사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뭐야… 이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사람은?! 남자는 채도 높은 붉은 머리를 뒤로 넘겨 깔끔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근 정복을 입고 있어 매우 금욕적이었다.
짙은 남청색 눈동자와 윤이나는 붉은 머리.
아. 잠시만 이거 책 속 남자주인공인 황태자 외양 묘사랑 굉장히 흡사한데, 혹시 이 사람? 황태자는 부친인 황제를 닮은 붉은 머리에 샬리오니를 닮은 옅은 벽안을 가지고 있다고 서술되어있었다. 묘사와 굉장히 흡사한데 이 사람, 황제인가. 맞는 거 같은데. 맞는 거 같은데에….
심장이 벌렁거리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았다. 진정하자. 진정해. 갑자기 이렇게 난데없이 출연하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내 앞에 멈춰선 그가 짙은 남청색 눈동자로 내 눈을 집요하게 옭아매기라도 할 것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대는 투알린의 귀족인가?"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어 온몸을 눅진눅진하게 만들었다. 아…. 저렇게 금욕적이고 신사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저 사람이 정말로 귀족들 목을 댕강댕강 자르며 피비린내를 풍긴다는 이란 말인가. 잘못하면 그 잘난 껍데기에 홀랑 넘어갈 뻔했다. 나도 모르게 몽롱해지는 눈을 깜박이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투알린 귀족이냐고 묻는 말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투알린 귀족이 아니니 말이다. 그곳의 드레스를 이미 입고 있어서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애초에 이렇게 황제와 바로 맞닥뜨리게 될 거라곤 생각을 못 했으니…. 나는 술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말을 못하나?”
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는 열 발자국 정도의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아니요. 할 수 있어요.”
내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사절단으로 왔나 보군.”
그가 식물의 잎줄기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물었다. 안온하던 우리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맞아요….”
황제를 염탐하러 오긴 왔는데 이렇게 마주치고 대화까지 나눌 수 있을지는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꽤 당황하고 있었다. 시녀로서 참석해서 내 존재를 숨긴 채 멀리서 바라보며 어떤 성격과 모습을 가졌는지에 대해 1차적으로 알아보려고만 했으니 말이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 것 같던데.”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계속 띄엄띄엄 공백을 가진 채 단답형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의 기묘한 공기에 마음이 꽉 쪼이며 눌린 것처럼 제대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눈치챘을 때는 이미 우리 사이엔 다섯 발자국만이 남았다. 아니 자연스럽긴 무슨, 그런 거 아니다.
그냥 그가 다가오는지도모를 정도로 내가 그에게 홀려 있어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가… 너무나도 내 취향이다. 큰일이다. 그를 내게 반하게 해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게 생겼다.
“마음에… 들어요.”
일단 당신 외모부터 시작해서, 깔끔하고 반듯한 스타일 하며 금욕적인 모습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그냥 다 마음에 드네요. 첫눈에 뿅 하고 반한 거냐고 묻는다면 그런 거 같다. 이 남자의 인간성이 어떨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제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성격이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그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색이 무척 예뻐.”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내 눈앞에 큰 그림자가 지고 커다란 남자 손이 내게 뻗어 왔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그가 내 한쪽 볼을 감싼 채 속눈썹을 엄지로 느릿하게 쓸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감긴 눈에 엄지가 부드럽게 둥근 원을 그렸다. 그러다 다시 속눈썹을 좌우로 쓸며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아…. 정신을 차린 내가 눈을 깜박이며 크게 떴다. 눈앞에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술이 내 눈 위로 가볍게 맞대었다가 떨어졌다.
"……."
시선은 내게 마주한 채 그의 손이 내 얼굴을 가린 머리 장식에 손이 닿았다. 그가 내 머리 장식을 벗기려 드는 찰나였다.
아… 안 돼.
흠칫 놀란 내가 뒷걸음질을 치자 머리에 닿은 그의 손도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그의 짙푸른 눈동자는 내 움직임을 쫓으며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