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5
2. 달라진 전개
벌컥-
발로 뻥 차 버린 화려하고 정밀한 세공이 양각되어 있는 문 두 짝이, 거칠게 열리며 큰 소리를 냈다.
"폐하! 어디에 계셨… 그분은?"
시종장으로 보이는 이가 황제 품에 폭 안겨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보고 기겁하며 물었다.
"아아, 테너. 내가 밖에서 꽤 귀여운 걸 주워왔거든."
"그분 말씀이십니까?"
당신도 내가 승전 연회에 축하하러 온 사절단처럼 보이는 거 맞죠? 그래서 그렇게 경악하는 거죠?
"여성분처럼 보이는군요."
아무리 내가 눈만 빼고 다 가렸다지만, 그럼 남자겠어요? 그보다 사절단인 것부터 먼저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부들부들 떨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그래, 겁을 집어먹은 게 꼭… 아기 사슴 같지 않나?"
허억… 미쳤나 봐…. 어쩌다 이런 상황이 오게 되었는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 * *
"티나, 투알린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를 몇 벌 맞추고 싶은데."
"지금이요?"
시녀 티나가 의아한 듯 내게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전부 제국의 승전 연회 사절단으로 가기 위한 짐을 싸기 바빠 죽겠는데 뜬금없이 투알린 왕국의 드레스라니. 익숙지 않은 다른 나라의 드레스는 만드는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응, 아니면 왕궁에 투알린 드레스가 있을까? 급하니까 수선해서 입어도 되는데 말이야."
왕비는 몇 벌 가지고 있지 않을까? 빌려 입을 수 있으려나, 따위의 생각을 하는 참이었다.
"그런 거라면 몇 벌 있어요. 공주님. 2년 전이었나…. 투알린 왕자님이 공주님에게 몇 벌 선물하셨거든요.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으셨지만요."
아하. 테일러가 나보고 질색하면서 내다 버렸다고 하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군그래.
"잘됐네. 맞춰보고 몇 벌은 제국에 가져가야겠어. 지금 한 번 볼까?"
"제국에요?"
도무지 이 공주님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티나는 내가 이 몸속에 들어온 후 종종 저런 표정을 지었다.
아마 곁에서 계속 모시던 공주의 달라진 행동 방식이 영 적응이 되지 않는 듯했다. 제국에도 내가 시녀로 간다고 하니 펄쩍 뛰고 말이지. 내가 들었던 샬리오니는 그저 해맑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다만 거기에 엉뚱함은 없었으니 이런 내가 희한할 것이다.
"맞아. 티나 얼른. 그리고 내가 투알린 드레스 찾은 거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알겠지?"
"네.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티나는 종종 의문 어린 표정을 띄웠지만, 매번 내 말을 순순히 따르고 수행했다. 그나저나 이게 먹힐지 모르겠네. 나는 투알린 드레스를 입고 제국에 황제를 염탐할 예정이다. 만에 하나 황제가 나를 보자마자 납치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눈만 댕그라니 내놓은 투알린 드레스면 황제도 나를 '일반인 1'로 생각하겠지. 아무렴.
"가지고 왔어요, 공주님. 전부 하나같이 굉장히 화려해요. 보석들이 전부 최상등급이구요!"
헉… 이건 보석을 걸어놓은 천인지… 드레스인지. 흰 바탕의 드레스는 여성의 굴곡을 나타내는 뚜렷한 윤곽이 없는 대신, 화려한 패턴과 문양으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드레스에 달린 장식물들이다. 티나가 가지고 온 다섯 벌 모두가 장식물이 그렇게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보석이 아주 그냥 포도도 아니고. 저거만 다 떼서 팔아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겠어. 이거 다시 귀금속 들고 도주하는 방법에 마음이 솔깃하려고 하네.
"티나. 일단 이거 보석은 다 떼자."
"네? 이것들을요? 정말요?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으셨는데!"
티나가 아까운 듯 드레스를 바라보더니 간절하게 빛나는 눈으로 내게 심장 어택을 날렸다. 와아… 티나가 저러는 거 처음 봤어.
"흠… 그… 그럼… 한 벌만 남겨 둘까?"
"네! 네! 이건 어떨까요, 공주님? 여기에 달려 있는 보석들이랑 디자인이 너무 잘 어울려요. 보석의 색도 통일감이 있고 우아해서 많이 달려있어도 오히려 기품이 철철 흘러넘쳐요!"
티나가 침을 튀길 듯 열변을 토하며 내게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그… 그래, 티나 네가 고른 게 제일 예쁜 거 같은데 그걸로 하자."
함빡 웃은 티나가 골랐던 드레스를 고이 보관하며 작게 말했다.
"이제야 조금 공주님으로 돌아오신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저랑 드레스며 보석 얘기도 신나게 하곤 하셨는데…."
저런… 예전 공주님이 사라져서 쓸쓸했구나. 같이 수다도 안 떨고 묵묵히 공부만 했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나도 보석 좋아한다. 예쁜 드레스도 좋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거라면 하루 종일 질리지 않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평소 같았다면 그랬을 거다. 아무런 위협을 못 느끼고 주변을 즐길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골머리를 앓다 보니 우선순위가 뒤바뀌어서 말이야. 나도 한 사치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 괜히 우울해진다.
"나중에 떼어낸 보석들로 장신구를 새로 만들어 볼까?"
"어머, 공주님 정말요? 생각만 해도 좋아요."
보석 진짜 좋아하는구나. 티나. 장신구 만들면 네가 원하는 거로 얼마든지 고르렴.
"티나, 그런데 니캅 같은 건, 아니. 머리에 쓰는 건 어디에 있어? 눈만 빼고 얼굴을 다 가리는 머리 장식 말이야."
"그건 왜 찾으세요? 그걸 착용하시려고요?"
티나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응. 얼굴을 다 가려야 해."
"공주님의 얼굴을 다 가린다니…. 알겠습니다. 가지고 올게요."
얼굴을 가리시다니… 내 즐거움이…. 티나가 중얼거리며 어두운 표정으로 옷을 뒤적였다. 나는 못들은 채 하며 드레스의 보석들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 투알린 드레스를 입을 계획은 나와 티나 밖에 모르기 때문에 손수 떼어 내야 했다.
"공주님, 역시 이것들도 다 보석을 떼어 내야 하죠? 이것도 하나는 남겨 놓는 건 어떨까요?"
머리 장식 역시 정수리부터 귀 옆쪽, 그리고 머리 뒤쪽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티아라 장식처럼 무수히 많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응, 티나가 하나 골라서 남겨 둬. 일단 나머지는 다 떼자."
우리는 온종일 보석을 뗀다고 시간을 다 보내고 앉아 있었다. 종종 차를 마시면서. 보석을 떼고 놀며 마시는 티타임이라니…. 티나는 즐거운 것 같다. 이걸로는 목걸이를 만들면 좋겠다느니 귀걸이로 딱이라느니, 세트로 만들자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면서 차곡차곡 분류까지 하는 것이었다.
* * *
사절단 행렬 속에서 시녀의 차림을 하고 마차에 오르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내 옆으로 큰 그림자가 지며 청량한 향이 전면에 훅 끼쳐왔다. 한참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니 아레인이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손쉽게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에스코트하려는 모양인데, 지금은 드레스가 아닌 시녀복이라서 나 혼자서도 오를 수가 있었다. 거절의 말을 하려다가 그의 표정이 반드시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확고해서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손을 내어주고 성큼 한발을 마차에 내디뎌 올라서는데, 너무 힘차게 올라섰는지 내 이마가 마차 문 테두리와 정면충돌하며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부딪힐 때 콱하며 대차게 소리도 났다.
“아악!”
눈물이 찔끔 날만큼 아픈 건 둘째 치고 너무 쪽팔렸다! 소리도 얼마나 크게 났는지 모른다.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부딪쳤는지 내 얼굴이 다 화끈했다. 만약 혼자서 탈 수 있다고 그를 거절했더라면 아마 수치심에 지하 100층까지 뚫고 들어가 버릴지도 몰랐다.
이마를 부여잡고 아레인이 모른 척해 주기를 바라는데, 그가 큰 손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감싸더니 느릿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많이 아파 보입니다. 신관을 불러 치료를 하고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많이 지체되었는데 수선떨면서 행렬의 출발을 늦추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도로 신관을 부르다니, 누가 비웃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프긴 엄청 아프다. 나중에 혹이 생길 것 같다. 그래도 투알린 머리 장식으로 숨기면 되지 않을까?
“괜찮아요. 아레인. 그냥 조금만 참으면 되는걸.”
내가 거절의 말을 비추자 그가 말에 매달아 놓은 자신의 짐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럼 이거라도 바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꺼낸 것은 약통처럼 보였는데 뚜껑을 열자 점성 있는 크림 형태의 연고가 있었다. 그가 연고를 손가락으로 떠서 내 이마에 조심스럽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아까도 맡았었는데 아레인의 체향인가.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청량한 소나무 향이 은은하게 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아레인 덕분에 혹은 안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진짜 고마웠다. 놀리지 않고 묵묵히 약만 발라 줘서. 내가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아레인은 반대로 눈썹이 팔자로 쳐지기 시작했다.
“혹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이 연고를 드릴 테니 시간이 날 때마다 꼬박 바르세요.”
아마 티나도 연고를 상비로 가지고 있을 테지만 그의 호의를 거절하기 힘들어서 고맙게 받았다.
“둘이서 뭐 해? 마차는 언제 오를 건데.”
테일러가 우리를 번갈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타려구요. 내가 마차에 부딪혀서 아레인이 약을 준 참이에요.”
“샬리 너 요즘 너무 덜렁대는 거 같은데.”
테일러가 웃으며 좀 전 아레인이 했던 것처럼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진짜 조심스럽게 마차에 올라탔다. 근처에서 말의 안장에 안착하는 아레인과 눈인사를 했다. 그는 사절단의 호위 기사로 같이 이동하는 참이다.
"왠지 네가 사고 칠 것 같은 기분이야. 샬리. 전부 네 걱정뿐이라고."
테일러가 나를 보며 입을 삐죽였다. 그는 여전히 내가 동행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진짜 조심할게요. 궁금해서 어쩔 수 없단 말이에요"
현재 제국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앞으로 계획의 방향성을 결정하기 위해서다.
비공식적으로 참석하는 이유는 내가 리노아의 공주라는 신분으로 참석했을 경우 발생하는 문제점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인 점이 가장 크다.
가령 책 내용과 똑같이 황제가 내게 첫눈에 반했는데 그 성격이 개차반일 경우, 당연히 나는 그를 거부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극단적으로 제국이 바로 리노아에 전쟁을 선포할 가능성이 커진다.
만약 황제가 나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그 사람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성격이라면 나는 현재 계획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기적이지만 내가 고통스러운데 나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지 않다. 고통스럽고 괴로울 바에야 차라리 우리 왕국만이라도 설득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진해서 제국의 속국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다만 공부 한 번 안 하던 공주의 말을 대체 누가 들어주겠는가. 그러니 이루어지기 매우 힘든 차선책이었다.
말 한 번 꺼냈다가 공주가 매국노가 되었다며 왕국에서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투알린 드레스로 얼굴을 숨기고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후에 내가 그를 견딜 수만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후에 제국에 정식으로 방문요청을 넣어 황제와 친분을 다지겠다는 게 내 계획의 일부이다. 지금은 부디 황제가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