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4
"오라버니. 언제부터 왕국들이랑 관계가 틀어진 거예요? 투알린이랑 포르토 둘은 서로 외교 관계가 어때요?"
"그쪽도,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지…."
테일러도 말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챈 듯 생각에 잠겼다.
"베고니아랑은 전부 관계가 어그러졌고 각 왕국들 사이도 전부 마찬가지라는 거잖아요. 원래 이렇게 틀어지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언제부터 그랬어요?"
"흠…베고니아가 미스릴 광산을 얻고 나서부터인 것 같구나."
베고니아가 미스릴 광산을 얻고 나서부터 모든 왕국이 관계가 틀어졌다고? 미스릴의 저주야 뭐야.
"미스릴 광산은 1년 전에 발견되었잖아요."
"그래. 그때부터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했지. 지금 돌이켜보니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왕국들도 다 그때를 기점으로 서로 외교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구나."
미스릴의 저주일 리가 없지.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누군가 왕국 간에 농탕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서서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1년씩이나. 그게 가능한 사람이 한 명밖에 안 떠오르네. 일단 확인부터 먼저 하고.
"프레타스 제국의 황제가 즉위한 게 언제에요?"
"1년…. 좀 넘었구나. 그런데 이게…."
1년전, 같은 시기에 프레타스 황제가 즉위하며 각 왕국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현재는 전쟁까지 일어나게 된 양상이었다. 테일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침음을 삼켰다. 나는 황제가 왕국들을 모조리 갈아 마시는 걸 알지만 테일러는 그 사실을 모르니깐 아마도 방금 떠올린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오라버니는 제국이 주변 왕국 모두를 상대로 일 년 동안 이간질해왔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은 거죠?"
그러니깐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이미 네 개 왕국 다 먹을 생각으로 빅 픽쳐를 그려 왔다는 거 아냐. 아니, 그보다 더 있을 수도 있지. 샬리오니 아니었으면 그보다 더 있었을 수도. 1년 동안 준비 작업하고 3년 동안 하나씩 먹은 거네. 심심한데 정복이나 해 볼까. 이런 게 아니라 아주 계획적인 놈이었구먼.
제일 큰놈부터 처리해서 성가신 놈부터 처리하고 나중에 다른 왕국들이 경계해도 이미 늦어서 손쓸 도리가 없는 거지…. 연합도 안 되는데 그냥 밥이지 밥. 베고니아에 말도 안 되는 명분 가져다 붙여서 선전 포고하고 바로 쳐들어간 것만 봐도…. 이거 어쩌지.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네. 나 살 수나 있을까?
"일단은 이게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는 더 알아봐야겠다. 오늘 샬리 너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모른 채 그냥 넘어갈 뻔했구나."
테일러가 급격히 피로해진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다급히 뛰어온 테일러의 시종이 말을 쏟아냈다.
"저하, 전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긴급 정무 회의를 열었으니 속히 오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급히 부를 일이 뭐지? 테일러가 급히 일어나더니 시종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언급이 없으셨느냐?"
"프레타스 제국이 베고니아의 왕족과 귀족을 멸족시키고 나라를 복속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한 달, 제국은 나름 강성한 왕국인 베고니아를 고작 한 달 만에 집어삼켰다.
* * *
제국이 베고니아를 복속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반짝반짝 윤이 나는 내 머리칼을 쥐어뜯… 지는 못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괴로움에 내 머리를 헤집었다. 제국이 고작 한 달 만에 베고니아를 집어삼켰는지는 이제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제국은 베고니아와의 협상 중에 각 귀족 가문과 개인 모두에게 암살자와 군병들을 보내 두었다. 그리고 개전하자마자 국경 부근에 군사들을 집결시켜 주의를 끌었다. 게릴라전으로 귀족 가를 모두 소탕하고 상대군사가 징병 되기도 전에 이미 왕궁이 포위되었다고 들었다. 귀족 가를 소탕하는데 일주일, 왕궁에서 소모전을 벌이며 포위하고 왕의 목을 치는데 약 삼 주.
귀족들은 제 가문을 보호하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암살자 붙이고 병사 좀 보낸다고 몰살당하지 않는다는 말. 아마 1년 전부터 귀족 가문에 첩자들을 심어두었을 것이다. 이미 왕국 곳곳에 첩자들이 숨어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왕국 간 사이가 틀어지고 허무하게 당할 리가 없다. 리노아 왕국에도 첩자들이 많겠지….
그런데 생각보다 의외인 점이 하나 있었다. 나는 전쟁이 길어지며 피난민이 떼거리로 생기고 여기저기서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넘쳐날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다. 제국과 베고니아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왕족과 귀족 그리고 대치하던 군사들. 딱 그뿐이었다. 민간인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왕국을 온전히 손상 없이 흡수하기 위해서 그랬을까? 그걸 노린 거라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1년간의 공을 들이더니 결과물이 아주 좋구만. 내가 지금 이걸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요즘은 한숨만 자꾸 나온다.
"공주님,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깊이 생각에 잠긴 나를 시녀 티나가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야?"
"따로 전하는 말은 없으셨습니다."
"그래."
최근에 우리 왕국은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회의, 회의, 회의의 연속이었다. 세 왕국도 아마 곧 제국과의 전쟁에 한층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제국은 전쟁 뒤에 휴식기를 가질 모양이다. 소설 속에서는 3년 동안 네 곳을 복속시켰는데, 베고니아가 한 달 만에 제국의 수중으로 떨어졌으니 말이다.
설마 바로 다음 왕국으로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다음 왕국은 포르토 왕국이다. 아아… 전쟁 진짜 싫다. 눈앞에서 살육을 목도하는 일이 생겨선 안 돼. 사실 진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니 손이 벌벌 떨린다. 현실로 다가오니 고조된 긴장감이 가시질 않는 것이다.
나는 티나와 함께 국왕이 머무는 궁으로 이동했다. 우리 왕궁의 건물들은 전부 우아한 양식이었다. 궁의 지붕은 돔의 형태로 마치 인도의 타지마할처럼 생겼다. 궁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잘 꾸며져 있어서 이동할 때마다 눈이 즐거웠다. 내가 도착하자 시종장이 내게 눈인사를 건넸다.
"샬리오니 롯트 리노아 공주님이 오셨습니다."
궁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시종장은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왕과 왕비 왕세자까지 다 있었다.
"찾으셨어요, 아바마마"
내가 인사를 하자 왕이 손짓했다.
"샬리, 어서 오너라."
응접실에서 자리를 잡자 시녀들이 내 앞으로 티와 다과를 세팅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구성이 되어있네. 흡족한 마음으로 세팅된 다과를 둘러본 후 눈길을 거두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썩 좋지 않다. 다들 표정이 굳어있으신데….
"샬리, 보름 뒤에 제국으로 떠나게 되었어."
제국?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누가 떠난다는 거지? 오라버니가? 내가?
"오라버니, 제국으로 간다니 무슨 말이에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왕비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제국에서 승전 연회를 연다고 하는구나. 주변 왕국 모두를 초대했어. 왕이 갈 수는 없으니 왕세자가 가야지."
군기라도 잡는 거냐.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다 도륙 낼 거면서, 그래도 할 건 다 하는군. 하지만 이것이 내게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했다.
"저도 가고 싶어요."
"뭐?"
내가 뜻을 전하자 전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제국이 어떤 곳인지 보고 와야겠어요. 아바마마, 어마마마 허락해 주세요."
승전 연회에 가서 황제란 놈이 어떤 놈인지 보고 와야겠다. 한참을 기다려야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다. 지금을 놓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너까지 보내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이 맹렬하게 거부했다.
"공주 말고 시녀로 참석할게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 세 쌍의 눈이 집요하게 나를 쏘아보았다.
"이미 왕세자가 참석하는데 공주까지 참석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그러니 네가 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생각보다 너무 완강하시네. 나는 꼭 가야 하는데. 여러분.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랍니다.
"이번에 제국이 어떤 곳인지 가서 견문을 넓히고 싶어요. 기회가 있을 때 가야지요. 왕궁에서만 있으면 우물 안 개구리랑 다를 바가 뭐에요."
"그런데 공주로 참석하지 않겠다는 건 무슨 뜻이지?"
테일러가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공주로 가면 외부 시선을 신경 써야 하잖아요. 자유롭게 견학하고 싶어요."
왕비와 티타임을 하며 알게 된 정보인데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사절단에 끼어 종종 국외여행을 간다고 하였다.
"제국은 리노아보다 훨씬 크단다. 그만큼 위험한데 그곳을 가겠다는 거야?"
왕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손등을 쓸었다. 왕비님. 저번 티타임에 국외 여행 많이 다니셨다면서 왜 난 못 가게 해요. 나도 가게 해 주세요.
"어마마마도 처녀 시절에 국외 여행… 읍읍."
"그래, 그렇구나. 견문을 넓히는 것도 참 좋은 일이지!"
왕비가 내 입을 틀어막으며 호호 웃음 지었다. 구슬땀을 흘리는 왕비를 보던 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부인, 역시… 그때 그 왕자들과 전부 알고 있던 사이…."
"어머, 전하. 오늘 다과가 정말 맛있습니다."
왕비가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삼키며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정적인 분위기에서 오독오독 과자 씹는 소리만 들렸다. 샬리오니에게 이 외모를 물려준 왕비도 처녀 시절 남자들을 들었다 놨다 한가락 하셨나 보다. 왕비를 응시하는 왕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하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그 대신 조심해야 한다. 제국의 뭣 모르는 귀족들한테 홀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다른 왕국의 사절단으로 온 왕자들도 특히 조심해야 하지."
왕이 왕비를 한 번 쏘아보더니 한숨을 쉬며 허락했다. 왕비가 애교 한 번 부리면 그냥 다 풀리실 거 같은데.
"네. 아바마마. 꼭 명심할게요."
왕은 내가 시녀 분장을 하고 사절단에 끼어서 제국여행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왕족이나 황족, 고위 귀족들이 종종 비공식적으로 국외여행을 다니는 방법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행이나 다닐 처지가 아니었다. 제국에 갈 기회가 생기자마자 내 머릿속에 생각해두었던 계획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는 샬리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이 좋지 않아요. 누가 봐도 리노아의 핏줄인데 시녀로 간다는 것도…."
걱정하지 마. 테일러. 내가 생각해둔 게 있어. 공주로 갔다가 황제 성격이 내가 감당 못 할 정도로 더러운데 코 꿰이면 어떻게 해. 시녀로 몰래 가서 인품부터 확인하려고 그러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안 들킬 자신 있어요."
내가 해맑게 웃자 테일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 *
왕의 응접실을 나와 내 궁으로 돌아오는데 궁의 입구에 누가 서성이고 있었다. 쭉 뻗은 키에 잘생긴 얼굴을 보아하니 아레인이었다.
"아레인, 무슨 일이에요?"
그러고 보니 베고니아 침몰 사건으로 아레인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이것 참, 다시 보니 또 미안해진다. 나를 보자마자 아레인이 조급하게 다가와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샬리… 제국으로 간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보다 놔주시겠어요. 아레인?"
"아… 죄송합니다. 공주님이 기억을 잃으신 걸 잠시 깜박했습니다. 습관이 되어서…. 용서해 주십시오. 제국 일은 전하 궁의 호위를 서는 근위 기사에게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다급했나 보다 싶어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옛 연인이라고 제국에 간다고 하니 걱정되나 보다.
"제국으로 가는 거 맞아요. 견문 넓히러 가는 거예요. 공주가 아니라 시녀로 참석하는 거랍니다."
걱정하는 것 같아서 뒷말을 덧붙였더니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데리고 가주십시오, 공주님."
응?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