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3
미스릴이라는 광물은 아주 희귀한 자원이었다. 무기나 갑옷, 각종 무구에 섞어 쓰기만 해도 강도와 내구도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온전한 미스릴로 만든 무구는 황제에게 진상품으로 쓰일 정도라 하니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1년 전 베고니아에서 그 귀한 미스릴 광산을 세 곳이나 발견했다. 제국에는 맞먹으려 들고 우리 같은 소국들에는 갑질을 시작했으니 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게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전쟁 명분이었다. 제국은 베고니아로 여행을 떠난 백작가의 영애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겁간을 당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며 베고니아에 압박을 가했다.
그 백작가의 영애가 진짜 귀족 여식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외적으로 베고니아는 제국에게 고인에 대한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한데 제국이 베고니아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미스릴 광산이었다. 그것도 무려 세 곳이나 원했다. 한 곳도 넘겨주기 힘든 곳을 말이다. 베고니아에서 거절하자 제국이 바로 선전 포고를 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일주일 전의 전쟁이 시작된 전말이다.
"아예 전쟁을 빌미로 한 협상이나 다름이 없었네요."
"협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요. 보통 나라 간 선전 포고를 하면 군대를 준비할 유예 기간을 가집니다. 한데 제국은 이번에 선전 포고를 하자마자 국경 지대에서 군사들을 미리 집결시켜 주의를 끌었다 하니 협상은 그저 시간 끌기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용서해 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고 그냥 싸우고 싶은 것처럼 보이네.
"아니, 그건 정말 억지잖아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선례를 남기면 어떻게 해요. 왜 우리나 다른 왕국에서는 항의 한 번 하지 않았나요?"
"이미 모든 왕국들이 베고니아와 틀어졌습니다. 제 왕국 일도 아닌데 나설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너네 다 망해 버렸다고! 왕국들이 연합하기만 했어도 그렇게 쉽게 안 당했을 텐데.
"강성한 베고니아조차 그렇게 쉽게 전쟁할 빌미를 주었는데, 우리 같은 소국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나요. 폴린 경."
네가 말해 봐. 어떻게 되는지. 어? 그냥 한 줌의 재가 돼서 흩날리겠지. 에휴.
"배운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공부 한 번 안 하시던 공주님의 식견이 넓어져서 정말 놀랐습니다. 다만, 공주님. 그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국이 우리를 치다니요. 베고니아는 그 태도와 미스릴 광산 때문에 제국의 먹이가 된 것이지 우리 같은 소국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니까요.
지난 이백 년간 쭉 그래왔습니다. 제국은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한 번씩 본보기로 전쟁을 일으키니까요. 그게 이번에는 베고니아가 되었을뿐입니다."
그래도 왕국끼리 연합을 유지하면서 제국을 경계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어떻게 옆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긴장도 안 하고 대체…. 이 타성에 젖어 있는 공무원 같은 모습은 뭐란 말이냐. 배우는 입장에서 백날 얘기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거 같고 미치겠네.
"이번에 즉위한 카시카프…."
"카시카프 메디온 프레타스 황제입니다, 공주님."
카시카프가 현 프레타스 황제 이름이다. 그리고 소설 속 남주인공인 황태자의 아빠가 되시겠다. 만약 나랑 결혼해서 애를 낳는다면 말이지.
"그래요. 그 새로 즉위한 황제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장담하는 건 대체 어디서 나온 근거 없는 자신감이에요?"
"하지만 공주님, 이건 보통 제국의 관례와 같은 거라…."
"카시카프가 그냥 정복 전쟁에 미친 전쟁광이면 어떻게 하실 거냐고요."
아니, 전쟁을 관례와 같다고 하는 사람이 바로 이 인간인가요?
"공주님이 우리 왕국을 이렇게 소중히 하고 걱정하고 계시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하지만 아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 왕국에도 유능한 관료들이 많으니까요."
"그 유능한 관료 중 한 분이 폴린 경이시겠죠?"
내가 폴린 경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물론이지요. 공주님."
망했다. 망했어. 이 왕국은 망해 버렸어. 리노아는 왕권이 유명무실하다. 이미 귀족들이 득세한 판이다. 옆나라 투알린은 억압된 사회제도와 과한 세수로 왕국민들이 피고름을 흘려 대고 있었다. 특히나 폴린 경의 말에 의하면, 투알린 국왕은 제 잘난 맛에 사는 멍청이라고 하였다.
포르토는 좀 나은 편인가.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항구를 끼고 벌어들이는 수입이 많은 만큼, 호사스러운 사치와 낭비로 말미암아 제 왕국민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굶주리게 하고 있었다. 모든 왕국이 다 엉망이었다.
원래 역사가 오래된 국가들이 쇄신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일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군주제라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백성들은 불평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는 왕국민들이 살기 어려워 제국으로 몰래 넘어가는 일들도 허다하다고 했다.
근 한 달 동안 내가 선생들에게 배우고, 또 나 혼자 추측하며 주변 국가들에 대해 알아낸 것들이다. 상황이 이러니 제국이라는 큰 위협이 있는데도 연합이 안 될 만도 하다. 나는 다시 머리를 싸매었다. 쥐가 날 것 같다.
* * *
"공주님, 기억을 잃으셨다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오빠인 왕세자와의 티타임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지난 한 달간 빡빡하게 공부했더니 머리에 쥐가 날 정도라서 말이다. 내가 하소연했더니 왕세자 테일러는 종종 왕자 궁의 티타임에 나를 초대하곤 했다.
"실례지만 경의 말씀대로 내가 기억을 잃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왕실 기사 제복을 입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아주 훤칠한 키에 잘생긴 미남자였다. 다만 그는 매우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흑발에 자색 눈동자라니 좀 섹시하네. 내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자 미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누구 홀리려고 그러세요? 엄청 섹시해. 입술 깨물지 마. 그러지 마, 나한테.
"저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미안해요…."
나한테는 누구라도 전부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기사로 보이는 미남자가 마른세수하더니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 눈 뚫어지겠다. 무슨 말이라도 해 줘. 티타임 가야 하는데 사람 세워 놓고 뭐 하는 거지…. 잠시간 말이 없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아레인 벨라스라고 합니다. 공주님."
이제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 안타까워지는 표정이었다. 저렇게 말해도 모르는데 정말 미안하네. 옆에서 시녀가 내게 속삭였다.
'왕실 기사단장이에요. 공주님.'
아 그렇구나. 기사단장이라니. 안면 익혀 두고 사이좋게 지내야겠다.
"왕실 기사단장인 아레인 벨라스 경이시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답니다."
들은 거 하나 없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겸사겸사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아레인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헉.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정말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제가 공주님의 연인이었던 것도 전부… 한 달간 연락이 없으셔도… 기억이 돌아오실 거라 여겨 계속 기다렸습니다만…."
뭐? 당신이 샬리오니의 연인이라고? 나는 잽싸게 시녀를 돌아보았다. 시녀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머릿속에 황제 생각하기도 버거운데 다른 남자라니. 어라, 잠시만. 그러면 황제는 샬리오니의 연인도 죽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정말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겠는데. 황제의 정복 전쟁 기간은 3년이다. 샬리오니는 19살이고 황제를 만난 건 22살.
샬리오니가 이 사람을 3년 동안 만났을까? 일단 얼마나 깊은 사이였는지부터 알아봐야겠는데. 정말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이라면 크게 곤란해진다. 이걸 어쩌면 좋다니. 지금은 티타임이 급하니 나중에 만나서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벨라스 경, 저는 지금 왕세자 저하를 뵈러 가는 길이랍니다. 오후에는 수업이… 많아서 안 되겠군요. 벨라스 경이 방금 말 한 내용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나는 언제 시간이 날지 가늠하고 있었다.
"왕실 기사단에 기별을 넣으시면 제가 공주님을 찾아가겠습니다."
그가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벨라스 경."
그가 동공을 세차게 흔들더니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 그놈의 입술. 그만 좀 깨물어. 눈이 막 그냥 막 계속 가잖아.
"이름을 불러 주시면…."
이름? 아레인이라고 했었지.
"알겠어요. 아레인. 곧 보도록 해요."
* * *
"늦었구나, 수업이 늦게 끝났어?"
"죄송해요 오라버니. 오는 길에 아레인 벨라스 경을 만났어요."
나는 혹시나 아레인과 깊은 사이라면 왕실에서도 알지 않을까 싶어 살짝 말을 흘렸다.
"아레인? 아아, 너의 네 번째 연인 말이구나. 그런데 샬리 넌 기억이…."
뭐? 네 번째 연인? 공주님이 얼굴값 좀 하셨나 본데…?
"네. 안 그래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저는 기억이 안 나서 난감했어요."
"그래, 뭐 이번엔 기억상실 때문이긴 하지만 어차피 그게 아니더라도 오래가지는 못했을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건 또 무슨 소리신가요?
"네 번째 연인이라는 건 지금까지 제가 사귀었던 사람이 네 명이란 말이죠? 오래가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내가 심각하게 묻자 왕세자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도 안 막은 건가요?"
샬리오니, 사람 막 사귄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네가 간택하고 금방 질려 했지. 네 주위엔 목매는 남자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네가 진지하게 만남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샬리오니…. 넌 황제한테 안 갔어도 언젠간 뒤에서 칼침 맞았을 거 같아. 그나저나 리노아 왕국은 연애에 있어서 자유 분방한가 보네. 보통 정략결혼 하지 않나. 귀족이나 왕족들은.
"그럼 아레인과는 깊은 사이가 아닌 거예요?"
"당사자가 아닌데 내가 어찌 알까.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네가 가볍게 만나는 중이라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아… 이 죄 많은 여인이여.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갑갑하네. 내가 울상을 하고 있자 테일러가 진한 웃음을 흘리며 내게 물었다.
"아레인이 네게 찾아왔어? 기억상실이라고 말하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보통은 그냥 나가떨어지던데 말이야…. 테일러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뒷말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가볍게 사귄 사이라 해도 연인이 기억상실에 걸렸다면 중간에 한 번쯤 왔을 법한데 왜 한 달이나 지나서 왔을까.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아레인 벨라스 경에게 미안하네요. 저는 기억을 못 하는데 말이에요.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어요."
"뭐, 다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더구나.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그가 너를 계속 귀찮게 한다면 내게 말하고."
딱히 그럴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테일러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오늘 투알린 여성의 복식에 대해서 배웠는데 정말 여자들이 그렇게 입고 다니나요? 눈만 내놓고 얼굴이랑 몸통을 다 가린다면서요."
이건 마치 몇몇 중동 국가에서 여자들이 차도르를 입고 니캅을 머리에 씌우고 다니는 것과 매우 흡사한데 말이야.
"그 복식에 관심이 있어? 전에는 네가 질색했던 것 같았는데 말이다. 선물 받았던 것도 내다 버리고 그랬던 거 같은데."
관심이라기보다는 생각해 둔 바가 있어서 그런 거지만 테일러에게 길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맞아요. 투알린의 귀족 영애들이 입고 다니는 드레스를 몇 벌 맞출까 싶어요."
"투알린의 왕자와 꽤 친하게 지냈는데, 예전 같았다면 부탁을 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흐음…."
예전엔 됐었는데 지금은 안 된다니 무슨 말일까.
"사이가 멀어지셨어요?"
테일러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 사이가 멀어졌다기보다는 왕국 간 사이가 멀어졌다고 해야겠구나.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아니, 연합해도 모자랄 판에 고만고만한 왕국끼리 사이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하냐. 베고니아와 척을 지는 거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오라버니, 우리는 베고니아랑 투알린하고도 사이가 안 좋은 거예요? 그래도 포르토… 랑은 아직 괜찮은 거죠?"
제발 그렇다고 해 줘요. 우리랑 사이좋은 왕국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거 심각한 거 아냐?
"요즘 포르토와도 외교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무역협정에 의견이 상충하는 점이 많아서 말이다.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어서 아바마마가 여간 화가 나신 게 아니거든."
지금 포르토까지 사이가 안 좋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근처 이웃 국가 모두와 사이가 안 좋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이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