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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2화 (2/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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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고 싶어요.'

기억상실 걸린 불쌍한 공주님에게는 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주변에 사람들을 물리고 소설에서 샬리오니가 어떠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내가 본 소설책은 간단히 말하면 힐링물이었다. 부모에게 받은 남주인공의 상처를 여주인공이 어루만져주는 달달한 러브스토리다. 남주인공이 태어나기도 전인 정복 전쟁 속에 휘말리며 언제 죽게 되나, 나는 살 수 있을까 공포에 떠는 전쟁 납치 스릴러물이 아니란 말이다!

나도 책 속에 들어가는 소설 몇 번 본 사람인데, 보통은 주인공 아니면 친구, 악녀 및 조연 심지어 엑스트라 역할도 있지 않은가.

예쁜 얼굴 다 필요 없다. 미인박명이라고. 샬리오니라면 이딴 얼굴 개나 주라고 냉큼 던져 줬을 것이다. 작중에 그녀는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할 수 있었다.

남주인공의 부친인 황제는 즉위와 동시에 황권을 강화한다. 말이 황권 강화지 피의 숙청이나 다름없었다. 귀족파의 목이 댕강댕강 잘려나가고 대전에 피 마를 날이 없었다고 서술되어있다.

귀족들을 입맛대로 싹 갈아 치운 황제는 이제 주변국 정복에 나선다. 순서대로 하나하나씩 고작 3년 동안 주변의 네 개 왕국을 갈아 마셨다. 정복당한 왕국 중에 살아남은 왕족과 귀족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샬리오니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척살하고 궁밖에 목을 내걸었다고 한다. 잔인하게도, 그는 자비도 인정도 없는 냉혈한 같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가 정복 전쟁을 멈춘 것은 네 번째 왕국인 현재 샬리오니가 있는 리노아 왕국에서였다. 여느 때처럼 제국군과 함께 샬리오니의 친정을 완전 몰살시키며 샅샅이 궁 안을 뒤지던 그는, 숨어서 벌벌 떠는 샬리오니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전리품처럼 제국으로 끌려온 샬리오니. 제 나라를 뭉개고 가족들을 눈앞에서 학살한 악마와 원치 않을 결혼을 한 그녀는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억지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강압적인 관계로 낳은 자식이 소설의 남주인공인 황태자였다. 그녀는 황태자에게 애정 한 톨은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모진 말과 매질로 황태자에게 학대를 일삼던 그녀는 본인의 정신도 황폐해지고 스스로를 좀먹다가 끝내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황제는 제 자식을 학대하는 황후의 행동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어떠한 제지도 하지 않는다. 황후가 죽고 나서는 황태자에게 국정을 전부 일임하고 수도승처럼 독수공방하면서 산다.

어미의 학대와 아비의 방치 속에서 속이 너덜너덜해진 황태자가 여주인공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그런 내용. 부모의 사정은 작품 설정상 정말짧게 나온다. 황태자가 어린 시절 어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았는지 서술하기 위한 장치일 뿐, 내용 대부분이 주인공 둘이 사랑을 속살거리는 러브 스토리다.

아… 작중인물에 잘못 들어와서 달달한 힐링 로맨스에서 전쟁 생존물로 바뀌는 거 한순간이네. 샬리오니의 몸속에 들어온 게 문제가 아니다.

왜 하필 정복 전쟁 전으로 시대가 맞춰진 것인가. 나는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실제로 체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며,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도륙되는 장면도 두 눈 뜨고 볼 생각이 없다.

그런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면 장담하는데 백의 백 확률로 나는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샬리오니보다 더 미칠 게 분명하다. 아마 주인공인 제 자식도 못 알아볼 수도 있고, 아예 황태자가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지.

지금은 대체 언제일까. 정복 전쟁이 벌써 시작되었는지. 황제 즉위 몇 년 후인지. 그리고 내게 들렸던 그 속삭이던 목소리. 과연 그건 누구였을까. 샬리오니 본인이었을까?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목소리는 내게 무언가를 끊어 달라고 했다. 진행되는 이야기를 바꿔 달라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너무 괴로워서 내게 몸을 넘겨주었을까.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한 가지밖에 없어 보이는데, 결 좋은 머리칼을 쥐어뜯… 지는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악악 소리를 질러 대며 내 연약한 멘탈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한참을 그러다가 내 정신적, 육체적 양쪽 모두의 생존을 위한 모종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리노아 왕에게 알현 신청을 넣었다.

* * *

리노아 왕에게 알현 신청을 넣고 기다리는데 그 소식을 듣고 샬리오니의 어머니와 오빠가 잠시 찾아왔었다.

가족과 화목한 식사 도중 갑자기 쓰러진 공주 샬리오니. 며칠 만에 일어나서 뜬금없이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니, 이 가족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까 싶었다.

그런데 지극정성으로 걱정하고 챙겨주며, 기억의 빈 곳을 살뜰히 살펴 주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황태자와 반대로 사랑만 듬뿍 받는 환경에서 자란 샬리오니였다.

황제 눈에만 안 띄었으면 이 미모 뽐내면서 행복하게 참인생 살고 좋았을 텐데…. 아… 아니지. 눈에 안 들었으면 가족들이랑 같이 그냥 세상 하직했겠지.

처음엔 귀금속 챙겨서 도주할까 했는데 이건 생각하자마자 기각. 황제는 샬리오니를 만나고 전쟁을 멈췄는데, 샬리오니가 리노아 왕국에 없다면 정복 전쟁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살 곳을 찾아 전쟁터를 헤매는 미아가 되겠지. 게다가 전쟁 중에 사람들은 도덕성이 크게 결여된다. 중세를기준으로 삼은 이 세계에 인권이 바닥인 건 안 봐도 뻔하고.

여자 홀몸으로, 그것도 이 외모를 가지고 도주했다가는 나 잡아가소 하는 거밖에 더 될까.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나 혼자 살자고 내빼는 것도 영 탐탁지가 않다.

여기서 만난 샬리오니의 가족들부터 시작해서 왕국 네 곳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 스스로를 희생해서 제국에 제 발로 걸어가 황제에게, 전쟁을 멈추시고 나를 잡아드시지요. 하겠다는 건 아니다.

황제가 원래 소설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할지, 이건 제일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혹시나 정말 반했다 한들 보자마자 전쟁 멈춰 달라는데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면 양반일 것이다. 워낙 귀족들 목을 뎅겅뎅겅 잘 자른다고 하니 나도 아마 목이 뎅겅 잘리겠지? 일단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라고, 내 주변 상황부터 직시하고 계획을 짜기로 결정했다. 그랬는데….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다고요?!"

"그렇단다. 나도 오늘 오전에 받은 소식이지. 오늘 프레타스 제국이 베고니아 왕국에 개전을 선포하였다고 하는구나."

아아… 벌써 시작되었다. 전쟁 일어나기 한참 전으로 들어오든가. 내가 전쟁 체험 데모 게임에 들어왔냐고요. 전쟁 진짜 싫다고!!!

"그… 아바… 마마…?"

"샬리, 네가 기억을 잃었다 해도 내 딸인 건 변치 않는다. 편하게 얘기하거라."

샬리오니의 가족이 화기애애한 건 참으로 다행이다. 가족조차 불행했으면 내 멘탈이 아주 그냥 너덜너덜했을 텐데. 현 정세를 확인한 나는 일단 낙담했다.

황제의 정복 전쟁은 이미 현재 진행 중이다. 바로 오늘부터. 내가 이 몸속으로 들어온 첫날. 황제가 첫 타깃인 베고니아 왕국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리노아 왕국은 마지막인 네 번째. 지금 제국이 우리 다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하면 안 믿겠지? 일단 정보부터 얻어야겠다.

"아바마마, 제게 선생을 붙여 주실 수 있나요?"

"선생이라니?"

정신 차리고 알현하자마자 뜬금없이 선생이라니 의아할 만도 하다.

"기억이 없어서 제가 있는 곳이 어떠한 곳인지 정확히 알고 싶어요. 현재 리노아 왕국의 국제적인 위상이나 정세, 그리고 주변국과의 관계는 어떤지 그런 것들이요"

"기억을 잃기 전에는 그렇게도 공부하기 싫다고 하더니 말이야. 정치나 외교에 관심이 있는 것이냐?"

리노아 왕이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다른 선생들도 다 붙여 주지.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하다니 정말 기쁘구나."

왕은 감격한 눈으로 나를 보며 오른손으로 제 턱을 쓸었다. 아니. 나는 정치 외교 선생만 붙여 주면 되는데.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콕 집어서 얘기한 건데요?

"다른 선생들이요? 어떤…."

"네 다 잊었다 하지 않았느냐, 두루두루 전부 배우는 것이지. 뭐, 샬리 네가 공부를 워낙 싫어하였거든. 다시 배운다 생각하면 될 일이지."

이 나이에 다시 공부라니요! 생존 전략만 짜기도 바쁜 사람인데요! 이거 큰일이구만. 나 점점 망한 노선을 타는 것 같아.

* * *

국왕이 그렇게 말한 뒤로 나는 살인적인 스케줄로 각종 수업을 받아야 했다. 역사부터 시작해서 경제, 정치와 외교 등 예법과 댄스, 악기, 오페라부터 그림 수업까지 말도 안 되게 바빴다. 왕의 말대로 두루두루 모든 수업을 한 번씩 듣던 나는 당장 내게 필요 없는 수업은 전부 퇴짜를 놓았다. 댄스나 악기 수업 같은 것 말이다. 지금 내가 이런 거 배울 시간이 어디 있어?

벌써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초조해져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왜냐하면, 한 번쯤은 제국의 황제가 어떤 인간인지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전쟁 중이니 대체 언제 만날 수 있나 싶어서 말이다.

설마 3개국 다 망하고 마지막 리노아한테 넘어와서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책에서는 단편적인 내용만 나오니, 황제가 쉬지 않고 정복 전쟁을 했는지 아니면 정복 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전쟁에 나섰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휴우…."

"우리 왕국이 약소국이라는 것에 그렇게 속상해할 줄은 몰랐습니다. 공주님. 진작 이렇게 열심히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내 인생의 고달픔에 한숨을 내쉬자 외교 선생인 폴린 경이 나를 미약하게 질책했다. 샬리오니 공주는 얼마나 공부를 싫어했기에, 다시 교육하는 선생들이 전부 나를 미심쩍게 쳐다봤었다.

'네가 정말 스스로 공부한다고 왕에게 청을 넣었다고?'

이런 식의 태도라 처음에는 어찌나 설렁설렁 가르치는지, 내가 한소리 하자 더 의심스럽게 쳐다봤었지.

"우리가 이렇게 힘이 없는지 몰라서 그랬어요. 국력이 왜 이렇게 약한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섭섭하군요. 포르토나 투알린이나 우리랑 별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 그게 문제인 거 아냐. 그렇게 셋 다 고만고만하니까 제국에 다 잡아먹혔지.

"베고니아는 미스릴 광산을 세 곳이나 발견했다면서요."

베고니아는 제국의 제일 첫 타깃이 되는데 나머지 세 곳과는 다르게 군사나 재력 면에서 아주 풍족한 왕국이었다. 제국이 어떤 방식으로 왕국들을 집어삼키는지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이 개고생을 하지 않는 건데.

"그래 봤자 지금 제국과 전쟁 중 아닙니까. 다들 비관적으로 보고 있지요. 자업자득입니다. 아마 다른 왕국에서도 지원이나 협조가 없을 거니까요"

폴린 경은 고소하다는 듯 콧방귀까지 뀌며 말했다.

"그래요. 제가 궁금한 게 그거예요. 제국을 견제하려면 연합이든 뭐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따로 놀면 어떻게 해요?"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보니.

"베고니아는 미스릴 광산을 얻은 뒤부터 제가 제국이라도 된 양 다른 왕국들을 마치 제 아래 속국처럼 대했습니다. 제국도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뭐 제국에 밉보였으니 예정된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 좀 자세히 말해 주세요. 어떻게 밉보였다는 건지."

그 부분을 알아야겠어. 지금 내게는 제국과 다른 왕국들의 외교 관계나 그 정보들이 많이 부족하다. 이렇게나마 선생들이 알려 주는 단편적인 지식 만으로라도 정보를 끌어모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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