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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1화 (1/97)

<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1

1. 미인박명

‘더 이상은 지긋지긋하니까, 너희가 매번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나는 고통스러워.’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점점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을 떠 보니 익숙한 내 방이 아니었다. 나와 연관성 하나 없는 곳이었다.

내가 잠이 덜 깨었나 보지. 잠시 눈을 감고 10초를 세려고 했지만! 너무 긴 거 같아서 5초만 세었다.

"……."

다시 눈을 떴지만 기대했던 변화는 없었다. 셀프로 내 뺨을 치거나 꼬집거나 하는 소란스러운 행동은 잠시 보류하고 고개를 조심스레 오른쪽으로 틀었다. 근처 소파에서 외국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누운 채 낯선 이를 주시했다. 왜 이렇게 머릿속이 붕 뜨고 현실감이 없지. 어제 내가 뭐했더라?

잠이 안 와서 소설책 하나 보고 새벽에 잠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깐 이 화려한 침대다. 집에서 잤으니 납치일 리도 없고. 일단 여기가 어딘지 눈곱만큼도 감이 안 잡힌다. 나랑 연관성 하나 없는 이런 곳에서 대체 왜…. 외국인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졸기만 할 뿐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다시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 시작할 때였다.

-나를 살려, 이 지긋하게 반복되는 고리를 네가 끊어 줘.

이상한 속삭임이 내 귀에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 좀 피곤했나.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막 환청이 들리고 그러네. 나는 혹시나 다시 그 속삭임이 들릴까 싶어 집중했다. 하지만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환청인가. 귀신이나 유령 같은 건 아니겠지. 나한테 메시지 전달을 하고 싶다거나…. 지금 내가 처해있는 이 상황과 관련이 있을 거 같은데 말이다. 낯선 상황을 참지 못하고 결국 몸을 반쯤 일으키는데 소맷자락이 부드럽게 살에 감겨들었다.

'끝단이 레이스 처리된, 촌스러운 동시에 질 좋아 보이는 실크 잠옷'

공주도 아니고 요즘 누가 이런 잠옷 입어? 웃어넘기려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생각하니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방안을 관찰했다. 이거 옷만 그런 게 아닌데? 끝 모를 방의 너비 하며 이 화려한 양식의 가구들이 다 뭔가.

점점 미간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의문의 속삭임을 듣긴 했지만 나는 정상인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한 이 이상한 일도, 분명 상황설명만 들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지성도갖추고 있었다.

정정한다. 설명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게 일어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일은 하나도 수긍할 수 없었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로 설명되는 게 아니었다.

거울.

침대 근처, 화장대 옆에 전신거울이 있었다. 다만 방향이 달라 내 모습이 보이진 않았다. 내려가서 확인할까 하는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 공주님!? 일어나셨…. 아니, 괜찮으세요? 아니, 먼저 의사를 불러와야…."

'공……. 뭐요……?' 횡설수설하던 옆 사람이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아니, 이봐요! 얘기는 다 해 주고 가야지?

! 난 지금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하…. 공주 같다 했더니 진짜 공주님이냐?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 몸뚱이 확인을 위해 이불을 걷어차고 재빠르게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차근차근 생각은 무슨! 진작 이렇게 해야 했는데. 잠이 덜 깨서…. 나는 후다닥 튀어 나가 거울 앞으로 섰다.

'어…. 이건 좀 기대 이상인데?'

매끈하고 하얀 피부, 결 좋은 백금발, 공주님 신분. 이런 것 때문에 대충 예상은 했다만 그래도 이건.

'이보세요. 어디 왕국에 누구 공주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 외모가 아니세요.'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까지. 넋 놓고 보고 있다가 미간을 찌푸려 보았다.

'이런, 미쳤어…. 반하겠네. 심장에 안 좋아.'

이리저리 웃다가 찡그리다가 하다 보니 숨넘어갈 것 같아서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후다닥 뛰는 여러 명의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들어오는 한 무리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누가 봐도 저 두 명은 이 몸의 가족!'

똑 닮은 백금발에 푸른 눈. 뛰어난 외모. 한 명은 남매 같고 저 꽃중년은 이 몸의 아버지인가? 옆으로 눈을 돌리자 적갈색 머리칼에 금안을 한 여성이 있었다. 보자마자 든 생각은.

'이 공주님의 이 세상이 아닌 외모를 만드는데 일조해 주신 어머니 같은데.'

그 외에는 닮은 사람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빨리 이들의 관계를 스캔하고 추측을 끝낸 나는 미동도 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기억상실로 가자. 나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그게 사실이거든. 흔해 빠진 기억상실을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샬리오니! 괜찮으냐?"

아버지라 추정되는 인물이 침대와 나를 번갈아 보며 물어보았다. 왜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인지 의문인 것처럼, 그러나 걱정을 담은 눈으로 말이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준비하고 있었 던 나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샬리오니… 요?"

누가 옥구슬을 굴렸나. 아름다운 목소리 감탄은 나중으로 스킵 좀 하고. 샬리오니가 그 샬리오니는 아니겠지? 듣자마자 오늘 새벽까지 읽은 소설책이 떠올랐다. 주인공인 황태자의 엄마 이름이 '샬리오니였다. 지금 내가 들었던 샬리오니가 내가 생각하는 그 인물이 맞나요. 내가 황태자 엄마라고? 아하하. 그럴 리가…. 이름이 우연히 겹친 모양이지.

"그래, 어떻게 일어났느냐? 서 있어도 괜찮은 게냐?"

그래! 내가 아는 그 샬리오니 일리가 없다. 샬리오니는 소설 시작부터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소설에서도 과거의 사람이고, 불행의 아이콘이고…. 황후 신분에 황태자를 낳은 유부녀인데 이렇게 젊고 어여쁠 리가 없지.

머릿속과는 다르게 내 표정이 심상치 않자, 얼른 침대로 다시 앉혔다.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호들갑이 정신 사나웠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머리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계속 그 샬리오니와 현재 이 상황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황태자 엄마라고 가정해 보자. 지금은 공주니깐 왕국이 아직 정복당하기 전이다. 그러니 물론 황제와 억지 결혼도 하기 전이고. 아니,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황태자. 주인공이 아직 태어났을 리도 없고. 이건 뭐. 소설 시작 한참 전인 것 같은데. 아, 왜 나는 이런 것들을 자꾸 머릿속으로 맞추고 있는 거지. 내 머리 정신 차려! 이러니깐 마치 내가….

아…. 진짜 이 샬리오니가 그 샬리오니?

일단 잠시만. 이걸 금방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기엔 지금 내 멘탈이…. 현실 부정 강하게 오셨고요. 지금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줄 사람들은 역시 내 눈앞에 있는 이분들밖에 없을 것 같다.

"현재 많이 안정된 상태이시고…."

"여기 어딘가요? 제가 누군지 다시 말씀해 주실래요? 죄송하지만 제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아요."

한참 내 상태를 브리핑 중인 의사 말을 끊고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

잠시간 후 경악 어린 그들의 표정을 보자 나도 금세 그들을 따라서 우울해졌다. 제가 지금 좀 많이 급합니다. 내가 진짜 샬리오니면 현실 부정 따위 걷어치우고 내 생존부터 빨리 챙겨야 해서요. 아 여러분의 생존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샬리,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는 게냐?"

샬리는 샬리오니의 애칭인가….

"아까 제가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거울을 봤어요. 혹시 제 아버지신가요?"

나는 꽃중년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래. 내가 아버지다!"

충격을 받았던 그의 표정은, 내가 그가 누군지 맞추자마자 잠시 표정이 풀렸다가 다시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이분은 제 어머니시고요?"

이번에는 확신하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내 딸에게 어찌 이런 일이!'를 반복하셨다.

이 몸이 진짜 그 샬리오니라면 이것보다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예정인데…. 잠시 측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샬리오니 몸속에 들어와 있는 게 나라는 걸 인지하자, 내 표정도 함께 지하 깊은 곳으로 까라졌다. 딱히 부정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어머니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남매처럼 보이는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딱 봐도 오빠 같은데, 동안 기분 좀 느껴보시라고 한마디 아는 척했다.

"남동생이야?"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니 썩 좋아하시는 것 같진 않군.

"오라버니인가 봐요…. 하하…. 저보다 어려 보이셔서…. 동안…."

그래. 이 상황에서 이런 헛소리를 하는 내가 눈치 없는 인간이야. 미안해요.

"샬리…."

슬픈 눈으로 울먹이며 안겨 오기에 등을 토닥이며 샬리오니의 오빠를 위로했다. 그런데 여러분. 확실히 합시다. 샬리오니가 그 샬리오니가 아닐 수도 있지 않겠어요? 사람이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포기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평소 누가 그런 소리 하면 어디서 헛소리하냐며 가볍게 면박 줬을 텐데 지금은 저 1%에 제 모든 희망이 걸려있어서요.

"여기는 어디인가요? 저는 정확히 누구이고요?"

아까 던진 내 질문에 답이 없어서 나는 다시 '여기 어디, 나는 누구'를 시작했다. 제일 중요하다. 밑줄 긋고 별 다섯 개.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오답'이길 간절히 바라며.

"너는 리노아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 '샬리오니 롯트 리노아' 란다."

"……."

1%의 희망은 무슨. 내 책 속 인생 어떻게, 망해 버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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