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4장. 호북상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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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호북상회 (2)
가주전으로 향한 백강휘가 본 것은 가주인 백연호와 한 명의 중년 사내였다.
백연호와 대화를 하고 있던 얄팍한 인상의 사내는 백강휘를 보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이분이 일공자이신 백강휘 공자입니까?"
"그렇소."
중년의 사내는 백강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전혀 무공을 모르는 것 같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 서생 같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얕보는 마음이 싹틀 것 같았다.
"크흠! 호북상회의 부회주인 이규라고 합니다, 백강휘 공자."
하지만 이규는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고는 백강휘에게 인사를 했다.
저런 얕보이는 인상이라 하더라도 쉽게 볼 수 없다.
어쨌든 일류의 끝에 다다른 백호대주 조광을 일격에 기절시킨 무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정말 그 정도로 강한 것이 맞을까?'
그 정보를 들었음에도 실제로 백강휘를 만나니 왠지 잘못된 정보가 아닐까 싶었다.
"만나서 반갑소. 백강휘요."
"으음."
이규는 백강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압박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엄청난 고수를 만난 것 같군.'
호북상회의 부회주 정도라면 많은 무림인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호북에 있는 무당파나 제갈세가의 고수들을 많이 만났다.
이규는 지금 백강휘에게서 무당파나 제갈세가의 고수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저 요즘 소문이 자자한 일공자를 만나 뵙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이규의 말에 백강휘가 백연호를 힐끔 보았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아무리 호북상회가 큰 집단이라지만 단순히 소문 때문에 보고 싶다고 백씨세가의 일공자를 보자고 하다니.
'그리고 그것을 허락하는 가주라.'
백강휘의 눈길을 받은 백연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이규는 고개를 돌려 그런 가주를 보았다.
"그럼 가주님, 오늘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
이규는 대답 없는 백연호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백연호는 그런 이규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얼굴을 굳힌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제 절 부른 이유를 말씀해주시지요."
"방금 온 사람이 호북상회의 부회주란 말은 들었겠지?"
호북상회(湖北商會).
호북에 있는 상단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며, 호북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었다.
"호북상회에서 본가와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
"······."
상단과 문파는 서로 공생하는 관계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싸움만 할 줄 아는 무인들이 세가를 운영할 돈을 어떻게 구하겠는가.
보통은 상인들에게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거나 장원에서 재배한 작물 같은 것을 팔아서 자금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상기의 두 가지 방법 모두 상인들과 연관이 있었는데, 그 상인들이 거래를 끊겠다고 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너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맞겠지."
백연호의 말처럼 호북상회가 움직인 것은 백강휘 때문이 맞았다.
백자후의 모친인 장문영의 부친이 호북상회의 회주와 다리건너 아는 사이였으니, 그녀가 분명 손을 쓴 것이리라.
'그것이 어째서 내 탓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백강휘가 돌아왔기에 장문영이 움직였고, 그로 인하여 호북상회가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어도 결국 호북상회는 이와 같은 일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가 백강휘로 인해 조금 앞당겨졌기에 백연호가 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은 그저 부인을 막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 싫은 것뿐이겠지.'
특히 백연호처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은 그것을 더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백연호는 무미건조한 음성을 내뱉으며 백강휘를 보았다.
호북상회의 입김이 있었으니 이제 백씨세가가 호북의 상인들과 거래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백씨세가와 직접적으로 거래하려는 상인들도 없을 것이다. 굳이 호북상회의 눈치를 보면서 백씨세가와 직접 거래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한번 말해보아라. 네가 이 일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호오. 방법이 있다?"
백강휘의 모습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무림에는 무림의 법도가 있는 법이지요."
"무림의 법도라. 무력으로 제압하자는 것이냐?"
"필요하다면 해야지요."
여유 있는 모습과 달리 그 대답이 시원찮기 때문인지 백연호는 얼굴을 구겼다.
힘으로 해결한다는 말을 그 누가 못 할까. 그런 발상은 그의 막내딸인 백서희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으니 이렇게 고민하는 것 아니겠는가.
"오대세가를 목표로 하신다는 분이 겨우 상인 연합이 두려운 것입니까?"
"네놈!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백연호의 생각을 눈치챈 백강휘는 직설적으로 도발했고, 백씨세가의 가주는 그 도발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대세가라는 말은 그에게 예민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으니까.
백씨세가가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목표였고, 한평생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지 않았는가.
"지금 너는 본 가주가 오대세가의 가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냐?"
"지금 모습만 보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과연 저 상인들이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에도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크흠!"
너무 옳은 말이라 백연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불쾌한 듯 헛기침만 하며 백강휘를 노려보았다.
"전쟁이라도 하라는 것이냐?"
"겨우 상인들이 세가를 이렇게 능멸하는 것이 괜찮다면 겁쟁이처럼 쭈그려 있어도 괜찮겠지요."
백강휘는 자극적인 말을 골라서 하듯, 백연호의 심기를 살살 건드렸다.
"상인들을 무시하는 발언이구나. 그리고 백씨세가를 무시하는 말이기도 하고."
정확히는 백연호를 무시하는 말이었지만, 백연호는 일부러 세가를 언급했다.
"그럼 네가 처리하겠느냐? 우일향을 데리고 가서."
"흠. 그러지요."
"······."
백강휘의 담담한 대답에 백연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백강휘는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생각과 달리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 백연호의 판단이었고.
"좋아. 한번 해 보거라."
백연호는 백강휘와 우일향 둘만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 말은 백강휘가 이 일에 실패했을 때는 빠르게 그와 손절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능력을 볼 수 있기도 하고.'
과연 백강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백연호는 흔쾌히 허락했다.
만약 백강휘가 실패하면 그의 독단적인 일이라고 발뺌하면 되는 것이고, 성공하면 세가의 이 위기를 넘길 수 있고.
'다른 방법은 녀석이 실패했을 때 하면 되는 것이지.'
백연호는 처음에 조금 손해 보는 조건을 호북상회의 제시하려고 했다.
세가를 운영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단과의 연결이 끊기면 안 되었으니까.
비록 지금 당장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나중을 기약하려고 했었다.
"기대하고 있으마."
"알겠습니다."
백강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백연호에게 인사를 한 뒤, 곧바로 가주전을 나서 거처로 향했다.
"읏!"
거처로 향하던 백강휘는 조광과 함께 이동하고 있던 백자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백자후의 옆에는 그와 무척이나 닮았지만, 좀 더 어려 보이는 소년도 함께하고 있었다.
"흐음."
잠시 백강휘를 보고 움찔거렸던 백자후였지만, 그는 백강휘가 나온 곳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호북상회에서 일을 벌인 모양이군요. 아버님께서는 그것을 형님께서 해결하라 하셨고요."
"세가의 위기인데 그렇게 웃다니, 기쁜 모양이구나."
"읏!"
백강휘의 말에 백자후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모친이 벌인 일이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심각한 일이었다.
갑자기 세가에서 돈을 벌 구석이 없어진 것이고, 그렇다면 세가를 운영하기도 힘들어지는 것이니까.
게다가 지금 백자후를 노려보는 백호대 무인들은 봉급을 받기 힘들다는 말이기도 했다.
"흥! 방심한 사람들을 이겼다고 기고만장하군."
백자후가 백강휘에게 말에서 밀리자 옆에서 보고 있던 소년, 백성후가 나서며 말했다.
"실전에서도 목이 베이고서는 방심했다고 변명할 텐가? 변명할 기회조차 없을 텐데."
"그건······. 그건 실전이 아니잖아! 비무였다고!"
백강휘의 차가운 말에 백성후가 움찔했지만, 이내 변명거리를 생각해낸 것처럼 크게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을 들은 백자후와 조광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옆에 있던 다른 무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만해라."
"형님?"
"그만하라고 했다."
백자후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백성후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어린 표정이었다. 제 형을 돕기 위해 나섰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니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입니까?"
"무인이 말이 필요한가? 서로 몸으로 대화하는 거지."
"무식한 방법이군요. 형님께 호북상회를 이길 힘이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지만, 괜히 그들과 관계가 악화될까 걱정이군요."
"가주에게 허락은 받았고, 내가 실패하면 내 독단적인 일이라고 발을 뺄 것이다."
백강휘의 차분한 설명에 백자후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금 가주에게 허락받았다는 것보다, 실패한다면이라는 백강휘의 말이 신경 쓰였다.
'마치 그게 가능하다는 듯이 행동하는군.'
실패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적다는 듯이 말하는 백강휘가 아니꼽게 느껴졌다.
"그리고 대화를 하기 전에는 항상 주먹이나 칼을 들이대야지. 그래야 내 말을 잘 듣거든."
"······."
낭인 생활을 하면서 배웠다. 정말 대화가 필요하면 팔 하나 부러뜨리든가 베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흥! 회주와 만날 수는 있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성후가 다시 코웃음을 날리며 끼어들었다.
거래까지 끊은 백씨세가의 일공자를 호북상회의 회주가 만나줄 리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한다."
"읏!"
"그래서 더 할 말이 있나?"
백강휘가 백자후의 일행을 쓰윽 둘러보면서 묻자, 그의 눈빛을 본 사람들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왠지 고개를 젓지 않으면 무슨 사달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가지."
백강휘가 뒤에서 백호대 무인들을 보고 있던 우일향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휙 돌려 백강휘를 따라나섰다.
"배신자······."
그런 우일향의 귀로 백호대 무인들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일향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쥐었지만, 애써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백강휘를 따라나섰다.
"아는 녀석인가?"
"제 부하였던 녀석입니다."
"그런 녀석이 그놈들과 있어?"
우일향이 조광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백호대 무인들이라면 대부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조광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로 우일향을 안 좋게 보고 있다거나, 조광이 처음부터 눈독 들이고 있었다거나 둘 중 하나였다.
"호북상회의 위치는 알고 있지?"
"예."
"그럼 떠날 준비를 하자고."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 후, 서둘러 움직이는 우일향의 뒷모습을 보던 백강휘는 몸을 휙 돌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그의 거처가 아닌, 백서희와 남우혜의 거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