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3장. 백씨세가로 돌아오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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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백씨세가로 돌아오다 (1)
백씨세가는 호북 함녕에 있는 정의맹 소속의 세가다.
오대세가에는 미치지 못하는 세가였지만, 호북에서는 무당파나 제갈세가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세가이기도 했다.
"하암!"
그 백씨세가의 파수지기인 아두는 오늘도 아무 일 없다는 사실에 길게 하품을 하며 입맛을 쩝 다셨다.
백씨세가는 호북에서 영향력이 큰 편이긴 했지만, 제갈세가와 무당파 역시 호북에 있었기에 방문하는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음?"
굳어지는 몸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던 아두의 눈에 두 사람이 세가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우 조장님이 아니십니까?"
"이제는 조장이 아니라네."
우일향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말했지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이분은······."
아두는 우일향과 함께 있는, 약관이 살짝 안 되어 보이는 청년을 보며 물었다.
그가 백씨세가에 온 것은 불과 이 년 전이었고, 그때는 이미 백강휘가 두문불출하고 한참이 지난 후였기에 백강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세가의 일공자시라네."
"이, 일공자님이라고요?"
우일향의 소개에 아두가 깜짝 놀라며 백강휘를 살펴보았다.
두문불출하던 백강휘의 모습을 본 것도 놀랐지만, 세가의 보물을 훔쳐 도망갔다는 백강휘가 제 발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렇게 바뀌었나?'
이전이었다면 백강휘는 유람을 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백호대가 움직였고, 세가가 백강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세가는 백강휘가 보물을 훔쳐서 달아났다며 입단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자라서 죽이려고 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한 것이겠지.'
이것은 백강휘의 전생에서도 일어났던 일이었지만, 백강휘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세가가 사라진 상태였기에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모두 오해였다네. 그래서 가주님을 뵙고 그 오해를 풀고자 한다네."
"으음."
당장 백강휘를 구속한다면 이 지겨운 파수지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옆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우일향 때문에 그런 생각을 당장 집어넣어야만 했다.
'그런데 정말 일공자가 맞나?'
우일향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백강휘의 얼굴은 가주와 너무 닮지 않았다.
가주인 백연호는 선이 굵은 부리부리한 인상이었지만, 백강휘는 반대로 선이 얇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마치 서생처럼.'
서글서글한 인상이면서 입가에 감도는 은은한 미소 때문인지 아두는 백강휘가 무척이나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아직도 확인이 필요한가?"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나오는 말투는 생각보다 강압적이었다.
'이공자와 삼공자에 비하면 훨씬 낫긴 하지만.'
그 둘이었다면 아마 아두는 지금쯤 얻어맞았을 것이다.
"신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있습니까?"
우일향이 일공자라고 소개했다지만, 아두가 그것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무엇인가 그가 알 수 있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럼 가서 내 얼굴을 알 만한 녀석을 불러와."
"예?"
"조광도 괜찮고, 가주도 괜찮겠군. 정 안 되면 장 부인이라도 부르던가."
아두는 백강휘가 언급하는 사람들을 들으며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그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분들은 없는 것입니까?"
물론 있다.
아무리 그가 두문불출했다지만,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한 명도 없겠는가.
하지만 백강휘는 대답 없이 그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아두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장난은 그만하시지요."
"재미있지 않나?"
"전혀 재미없습니다."
아두는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우일향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 역시도 백강휘의 저 말이 전혀 재밌다고 느끼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전혀 농으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흠. 그럼 누구를 불러야 할까."
"그냥 간단히 시녀나 백호대 무인을 부르시지요."
"여기가 시끄러워질 것 같지만 말이지."
시녀의 말은 어쨌든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백호대 무인이 오면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과연 누구를 불러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백강휘의 귀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희구나."
"오라버니!"
백강휘의 얼굴을 확인한 소녀가 곧바로 그에게 폭 안겼다.
"잘 있었느냐?"
"네!"
소녀를 안아 든 백강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두는 그 미소가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정말 인상과 어울릴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라고 생각했다.
백서희.
백강휘의 배다른 동생이다.
다만 그를 죽이려 했던 정실부인인 장문영의 딸이 아니라 첩인 남우혜의 딸이었다.
"오라버니, 정말 어떻게 된 건가요?"
백서희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백강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백강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열두 살의 그녀는 백강휘를 무척이나 잘 따랐다. 그리고 백강휘 역시 그녀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그랬기에 백강휘가 세가의 보물을 훔치고 도망갔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보물을 훔쳐서 도망가신 건가요?"
"넌 그 말을 믿느냐?"
"아뇨! 오라버니가 그럴 리가 없죠."
백강휘는 단호하게 대답하는 백서희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주었고, 그녀는 헤헤 웃으며 그 손길을 즐겼다.
"그리고 이 세가에 그 정도로 대단한 보물이 있을 것 같으냐?"
굉장히 불경스럽다고 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씨세가가 호북에서 강한 위세를 떨친다고 하더라도 결국 호북에서일 뿐이었다.
중원에는 그보다 더 대단한 문파와 세가들이 넘쳐났고, 결국 그저그런 세가라 할 수 있는 백씨세가에서 누구나 탐낼 그런 보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헤헤! 전 오라버니를 믿었어요."
"고맙구나. 그런데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잠깐 마을을 돌아다니고 왔어요. 아, 이걸 오라버니에게 드릴게요."
그것은 그리 비싸 보이지 않은 환이었다.
"싫으신가요?"
싸구려로 보일 정도로 조잡한 모양의 환이었기에 백서희는 백강휘가 싫어할까 조마조마한 표정이었다.
"아니다. 고맙구나."
아마 시장에서 고르고 골라서 산 것이리라. 게다가 비싼 것을 살 수가 없으니 한참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환을 선뜻 선물하는 백서희가 너무나 예쁘게 보였다.
'선물을 하나 해줘야겠구나.'
백서희가 가주의 딸이고, 모친인 남우혜가 가주의 첩이라 하더라도 그녀들의 생활은 풍족하지 못했다.
그것은 남우혜가 배경이 없는 시골 여인이란 점도 있었지만, 정실부인인 장문영이 손을 썼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들어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시장을 가봐야겠군."
"예? 예, 알겠습니다!"
백서희의 등장으로 인해 백강휘의 신분은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아두로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장 가시게요?"
"그래. 내가 선물을 받았으니, 네게도 선물을 줘야겠구나."
"정말요?"
백강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강휘를 이끌며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백서희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추어 섰다.
바로 여러 장신구가 있는 좌판이었다.
"하나 고르려무나."
"네? 정말인가요?"
백서희가 반색하며 좌판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백강휘는 그런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웅. 이거요!"
한참을 고민하던 백서희가 하나의 비녀를 골랐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오히려 싸구려로 보일 정도의 비녀였다.
"이건 얼마요?"
"그건 좀 비싼데. 옥으로 만든 거라서 말이오."
백강휘는 백서희가 계속해서 힐끔힐끔 보던 화려한 모양의 비녀를 집어 들고는 품속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좌판 주인에게 건넸다.
"이건 너무 많은데······."
"그럼 이거 하나 더."
백강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인을 보며 또 하나의 비녀를 집어 들고는 두 개를 모두 백서희에게 주었다.
"하나는 네 것이고, 하나는 네 모친에게 주면 된단다."
"너무 비싸요. 전 그냥 이거면 충분해요."
백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비녀를 내밀었지만, 백강휘는 그 비녀를 잽싸게 빼앗아 좌판에 올려놓았다.
"가자."
그리고는 백서희를 이끌고 곧바로 세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돈은 다 썼군.'
무한에서 배를 타기 위해 사람을 구할 때 많은 돈을 썼으며, 왕평과 헤어질 때 그에게 대부분의 돈을 주었다.
그리고 오늘 장신구를 사며 모든 돈을 다 썼기에 이제 정말 그에게 남은 돈은 단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백강휘는 돈이 단 한 푼도 남지 않았음에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두가 가주에게 백강휘에 대해서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당장?"
"예. 돌아오면 곧바로······."
"흠."
가주가 찾는다는데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백강휘를 보며 아두는 조마조마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나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겠지.'
괜히 백강휘가 가주에게 가지 않아서, 자신이 경을 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들어가도 되겠지?"
"무, 물론입니다. 그보다 가주님께는······."
아두는 대문을 열며 다시 한번 물어보려고 했지만, 백강휘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끼이익!
백강휘가 백서희, 우일향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대문을 닫은 아두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일공자가 소심하다고 한 거야?'
백강휘는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만약 거기서 말을 계속 이어갔다면 아두는 우일향에 의해서 목이 베어졌을지도 모른다.
'에휴,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무슨 생각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하지만 백강휘가 가주에게 가지 않아 불려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무엇이 말이냐?"
"가주님께 가보셔야 하잖아요."
"널 데려다주고 가도 충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백강휘의 말에도 백서희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본인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아두와 달리 그녀는 순수하게 백강휘를 걱정하고 있었다.
"서희야."
"어머님!"
그녀가 생활하는 전각에 도착하자, 곧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젊은 여인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예, 오랜만입니다."
남우혜는 백서희의 옆에 서있는 백강휘를 보며 인사했고, 백강휘 역시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렇게 돌아오셔도 되는 건가요?"
"한 번 봐야죠."
부드럽게 미소 짓는 백강휘를 보며 남우혜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아.'
호굴(虎窟)로 들어왔음에도 백강휘의 모습에는 여유가 넘쳤다. 이전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그럼 전 가주에게 가봐야 하기 때문에."
백강휘는 남우혜에게 간단히 예를 보이고는 우일향과 함께 전각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 어머님. 오라버니가 이걸 사주셨어요."
"참으로 예쁘구나."
"이건 어머님 거예요."
백서희는 백강휘가 선물했던 비녀 중 하나를 남우혜에게 건넸다.
'어째서······.'
백서희가 백강휘를 따랐던 것과 달리 남우혜는 그와 접점이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강휘가 그녀의 것까지 선물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차라도 같이 해야겠구나."
"예!"
남우혜의 말에 백서희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강휘가 떠난 방향, 즉 가주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슬슬 들어가자꾸나."
남우혜는 딸의 손을 잡고 거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인지 백강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분명 백씨세가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