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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용병
어두웠던 시야가 맑아지며 서서히 정신이 깨어났다.
잠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니 허름해 보이는 방 안이었다. 나는 푹신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분명히 다시 돌아온 공황 발작으로 기억을 잃은 것 같은데.
“할머니!”
판자촌이 불탔던 그 기억이 선명해지자 할머니의 안위가 걱정되어 급히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다.
“크윽.”
가슴이 찌릿했다.
겨우 다스렸던 공황이 또다시 찾아오자 봇물 터지듯 내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더 쉬시지요.”
그때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목에 걸고 있던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음성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 한잔 마시면서 몸 좀 녹이세요.”
백발에 대나무 삿갓을 쓴 남성의 음성이었다.
“복개차입니다.”
그자가 가져다준 차. 공황 증세가 나타날 때마다 제나가 소환해 준 복개차였다.
“당신은 누구입······.”
난 고개를 들어 그자를 확인했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그저 낭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칭호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치며 그를 경계했다.
“대장?!”
“······.”
그자의 위로 뜬 칭호에 대장이란 단어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관심법이라도 있나 봅니다?”
낭인의 이름은 키라였다. 키라는 내가 대장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내자 잠깐 당황한 듯 입술을 다셨다.
“뭐, 은퇴했으니 상관없습니다. 前 대장이거든요.”
은퇴한 대장이라니, 계급에서 내려온다는 시스템은 없었다. 더욱더 경계가 되는 그의 언행에 복개차를 마시고 심신을 안정시키고 싶었지만, 마실 수가 없었다.
“일어났어?”
그때 또다시 낯선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으니까.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이 안 가는 특이한 음색이었다.
“뭐야? 왜 저러고 있어?”
모습이 보이자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네가 들어오니깐 당황하셨나 보지. 나가 있어. 까불이.”
그자는 대장 키라와 다르게 칭호가 없는 사람이었다. 피렌체라는 이름과 다르게 까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그는 머리에 꽃을 달고 있었다. 그가 어떤 캐릭터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의뢰인도 아닌데 우리가 왜 눈치를 봐야 해?”
그는 키라가 가져온 복개차를 마시며 흥! 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갔다.
“손님에게 건네줄 차가 사라졌네요. 하하. 다시 가져올까요?”
키라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지금 태평하게 이곳에서 차나 마실 때가 아니니깐.
할머니와 이에로의 안위도 모르는 이 마당에 이곳에 계속 있을 수 없었다.
“판자촌에서 쓰러진 기억이 마지막인데 당신이 절 데려온 것입니까?”
“그렇죠.”
“혹시 그곳에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제기랄. 할머니와 이에로가 그곳에 없었다니. 그러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믿지 않았기에 난 다시 판자촌으로 가려고 나섰다.
“전 왜 데려온 겁니까?”
“저도 거기에 볼일이 있었는데. 다 죽고 당신밖에 없더라고요.”
“······?!”
그의 대답을 듣자 불을 지른 용병과 관련이 되어 있는 인물인가 싶어 스킬을 쓸 준비를 했다.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저도 그곳에 아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걱정되어 간 것이니깐요.”
“아무리 前 대장이라 한들 대장급 장군이 판자촌에 친구들이 있다고요?”
“음. 못 믿으실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게 사실인 걸 어떡해요.”
“걱정하던 친구들은 살아 있었습니까?”
“···말했잖습니까. 그곳에 살아 있던 사람은 당신뿐이었다고.”
표정을 보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내 물음에 대답할 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진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난 나가기 전 그에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래도 거기에서 쓰러져 있는 나를 데려온 사람이니.
허겁지겁 그곳을 빠져나와 판잣집으로 향하던 중 난 뒤를 돌아 내가 머물던 곳을 확인하였다.
혹시나 불을 지른 용병들과 관련된 자일 수도 있으니 그들의 거처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인데.
“떠돌이 용병?”
낡아 빠진 사옥의 명패를 확인하자 이곳이 용병 길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떠돌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밟혔다.
멋진 이름도 많은데 떠돌이라니. 다른 용병 길드와는 뭔가 다른 이곳. 무엇보다 대장급 장군이 있기에 난 다시금 뒤를 돌아 수상해 보이는 용병 길드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비키세요!”
그때 시민들 사이로 로체 도시의 경비대들이 미니 감옥을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명령에 시민들이 양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자 보이는 낯익은 인물.
미니 감옥에 갇힌 사람은 다름 아닌 이에로였다.
“처음 있는 일 아니야?”
로체 도시 소속 경비대들이 미니 감옥을 끌고 가는 광경은 처음 보는지 도시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이에로를 손가락질했다.
“아니, 쟤가 우리 도시의 자랑 파레타 용병 길드원에게 꼬리를 쳤대.”
“아냐! 소문에 의하면 다른 지역의 용병인데 스파이로 파레타 용병 길드에 잠입했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으면 노출이 된 감옥에 갇혀 질질 끌려가고 있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
그렇기에 무성한 소문만이 난무했다. 그러나 난 그녀를 알기에 시민들의 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뒤를 따라갔다.
“가만히 둬!”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곳에 온 지 3개월이 되었던 즘이었다. 공황 발작의 빈도수는 줄어들었고, 산책하러 홀로 나갈 수준이었을 무렵. 이에로를 처음 마주했다.
그녀는 판자촌 근처에 있던 굴다리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처음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에로는 몸을 강철로 탈바꿈해 나를 경계했다.
나 또한 그 당시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뒷걸음질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가족이 된 할머니와 하민에게 말했다.
굴다리에 홀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여인이 있다고.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자꾸 눈에 밟혔다. 이성적인 감정이 들어서가 아니라 처음 마주했을 때 그녀의 표정에서 내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마치 죽고 싶다는 표정.
쏴아악―
그때 비까지 오며 걱정되는 마음이 한층 더 쌓여 갈 때 할머니가 나갈 채비를 했다. 하민 또한 바루나를 업고 어디에 있는지 앞장서 가리켜 달라고 말했다.
나는 바루나를 대신 업고 이에로가 있던 장소로 안내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그대로 굴다리에 있었다.
“우어······.”
할머니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소리를 내었다. 동작을 보면 이에로에게 손짓하며 다가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에로는 또다시 경계한 채 우릴 노려봤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죽여 버린다는 협박까지 하며 말이다.
이에로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우린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빵이야.”
그때 하민이 빵을 던져 주었다. 빵은 그녀가 있는 곳까지 날아가지 못했고, 힘없이 땅에 뒹굴었다.
“미안······. 다가오지 말라고 해서.”
그러자 하민이 머쓱한 듯 머리를 만지며 눈치를 보았다.
“내일 새것으로 가져다줄게!”
“내일 또 오면 죽여 버린다!”
“···맛있는 거로 가져올게!”
하민은 또 온다는 대답과 함께 집으로 돌아섰다. 그는 끈기 있는 소년이었다. 비슷한 일을 겪었던 입장에서 하민의 대답은 허풍이 아닐 것이라 짐작되었다. 협박을 받아도 그는 한다면 하는 소년이었다.
그 또한 고아였던 시절이 있었기에 혼자 외롭게 있는 사람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 때도 그랬고, 이에로 때도 그랬다.
다음 날, 비가 그치고 따스한 해가 떴다. 하민과 나는 산책할 겸 굴다리에 갔다.
“다른 데로 갔나 보네.”
그러나 굴다리에 도착하자 그녀의 흔적은 없고, 비에 젖은 빵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어디 갔을까?”
“뭐, 갈 데 있으니 갔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챙긴 빵이랑 우유 놓고 가자.”
하민은 굴다리 밑에 빵과 우유를 고이 놓았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녀석은 왠지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또 흘렀다.
“형, 굴다리에 가 보자. 빵이랑 우유 먹었을지도 모르니깐.”
“괜한 짓일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럴 기분이 아니야.”
오늘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불이 갑자기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그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것일까? 빨라지는 심장 박동과 메스꺼운 속.
무엇보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공황 증세는 생각지도 못할 때 찾아와 나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혔다.
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리고 최대한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한숨. 누군가에겐 한숨이 안 좋은 습관이라 여기지만, 내겐 한숨이란 공황으로 굳어진 몸을 최대한 풀어 주는 행위였다.
“휴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하민도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건들지 않았기에 정신을 다잡으며 공황 증세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때 할머니의 빈 수레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부터 일찍 도시로 내려가 나물 장사를 하는 할머니.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온 것을 보니 손이 큰 손님을 만났거나 단속반에게 걸려 쫓겨났거나 둘 중 하나인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놀라운 광경이 눈에 담겼다.
분명 우릴 죽이려고 협박까지 했던 이에로가 할머니의 수레를 대신 끌어 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할머니, 앞으로 제가 장사할게요. 거동도 불편하신 것 같은데 쉬시죠.”
어젯밤 험악했던 분위기와 달리 싹싹한 이에로의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
“누나, 내가 굴다리에 우유랑 빵 두고 왔는데 먹었어?”
하민이 다가가자 그녀는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미소를 지으며 덕분에 잘 먹었다며 고마움까지 표시했다.
“그런데 집안에 남자가 있는데 할머니 혼자 장사하시는 거예요?”
한편 나를 노려보며 양심에 찔리는 말을 건네는 이에로. 그 말에 뜨끔해 겨우 잠잠하게 만든 공황 증세가 다시 나타나려 했다.
“어제는 죽일 듯이 협박했으면서 왜 갑자기 180도 변한 거야?”
그래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따졌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기에 그녀를 의심하기도 했다.
“나 여기에서 지내기로 했어.”
그런데 의심스러운 그녀가 이곳에 같이 지내기로 했다는 중대 발표까지 하자 할머니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답을 듣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난 일단 방으로 들어가려는 이에로를 막아 세우고 다시 물었다.
“왜 마음이 바뀐 거냐고.”
“할머니가 이미 허락했는데 왜 난리야?”
“무슨 꿍꿍인데 이러는 거야? 분명 어젯밤만 해도 죽일 듯이 노려봤으면서.”
“···살려고.”
“뭐?”
“살아 보려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대답엔 많은 뜻이 담긴 듯했다. 너무 궁금한 게 많았지만, 할머니는 말을 못 하고, 이에로는 말을 안 하니 마음이 바뀐 이유는 나중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