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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동안 일어난 일
오늘 아침은 유난히 시끄러웠다.
“얼른 준비해!”
하민이 개학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보는 게 낙이었는데 오늘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누난 괜찮아?”
아카데미에 갈 준비를 마친 하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응.”
그의 물음에 난 미소를 머금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그러자 하민은 입을 앙다문 채 아카데미가 있는 로체 도시로 내려갔다.
“언니 많이 아프대?”
“응. 감기 옮을 수도 있으니깐 창고에는 가지 마.”
바루나에게도 핑계를 댄 후 난 각종 의료 약품을 들고 창고로 향했다.
끼익―
오래된 창고라 그런지 녹슨 문의 아우성이 귀를 따갑게 했다.
4평 남짓한 작은 창고. 그곳엔 새벽에 치명상을 입은 채 쓰러진 이에로가 누워 있었다.
“간단한 응급 처치는 했지만, 맞은 칼에 독성 성분이 있어서 그런지 집에 있는 의료 약품으론 치유가 안 돼. 오히려 안 좋아질 뿐이야.”
“······.”
그녀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애들에게는 대충 감기라고 둘러댔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고마워.”
이에로가 내 귀에 작게 들릴 정도로 조그마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난 그녀의 상처 부위를 다시 보았다. 심각한 칼자국. 그리고 독성이 상처 주변뿐만 아니라 이에로의 몸 전체에 점점 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도시에 가서 치유받자.”
“안 돼.”
“···너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 신분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내가 조용히 힐러를 고용할게.”
“아무도 믿지 못해.”
“그럼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게? 동생들은 생각 안 해?”
“······.”
자꾸 회피만 하는 이에로의 행동에 난 화가 났다. 그녀의 속사정은 아직 나도 정확히 들은 바 없지만, 목숨보다 중요할까 싶었다.
“자경단이지?”
“후우.”
내 물음에 이에로는 짧게 신음하며 고통을 견뎌 낸 채 내 방향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내 눈을 마주하는 이에로.
그녀는 복수심과 증오심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족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인 거야?”
“가족은 무슨.”
좋게 설득해도 그녀의 태도는 차가웠다.
“아무도 필요 없으니깐 상관하지 마.”
이에로는 소용돌이 같아 보이는 문양의 가면을 다시 쓴 채로 바깥을 나서려 했다.
“움직이면 안 돼. 독이 더 빠르게 퍼질 거야.”
“상관하지 말라고.”
내 걱정에도 그녀는 창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차갑게 나온다 한들 가족이다.
“옥타비아누스.”
중력으로 묶어 억지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 * *
“바루나. 절대 창고 안에는 들어가지 말고. 만약 이에로가 나오면 내가 알려 준 ‘그것’으로 막고 있어야 해. 오빠 올 때까지. 알았지?”
“응!”
“착하다.”
내 스킬로 기절한 이에로. 난 그녀가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 로체 도시에 내려가 힐러를 고용해서라도 이에로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다.
내가 오기 전에 깨어나 다른 곳으로 도망 못 치게 감시망 바루나를 세워 둔 채 말이다.
난 바루나를 믿고 언데드 가면을 쓴 채 빠르게 로체 도시에 내려갔다.
아직 확답을 듣지 못했지만, 정황상 그녀는 어제 로체 도시에서 잡힌 자경단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에로가 쓴 가면과 칼에 찔린 상처가 그녀의 정체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난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이에로가 걱정되기도 했고, 내가 도착하기 전에 그녀가 깨어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휴우.”
다행히 어두운 밤길이 아니라 그런지 공황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다.
로체 도시에 도착한 나는 힐러들을 고용하러 중구난방 돌아다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하루 고용비는 30만 PT입니다.”
그것은 바로 돈. PT는 루기아 세계의 화폐 단위를 뜻하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30만 PT는커녕 내 주머니엔 3만 PT도 없었다.
“돈 없어요?”
관리인이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한 후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았다.
하루 만에 30만 PT를 구해야 하는 상황. 소환사 제나만 있었으면 돈에 대해 걱정이 없었을 텐데. 생각지도 못하게 난경에 처한 나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발록의 장갑. 파라오의 목걸이.”
돈이 될 만한 물품은 피라미드에서 얻은 고대 유물뿐인데 이건 팔 수 없었다.
“뭐 없나?”
난 주머니를 비롯해 몸 이곳저곳을 확인하여 돈이 될 만한 다른 물건을 찾아봤다.
그러던 중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서 내 시선을 뺏을 만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용병이 된 기념으로 절 한 번이라도 쓰러뜨리기만 한다면 바로 백만 PT 현찰로 지급합니다. 도전자 있을까요?”
그곳으로 이동하자 우락부락한 사내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자신을 상대할 도전자를 구하고 있었다.
“봐주면서 상대할 거니 너무 겁먹지는 마세요.”
아무도 나서지 않자 그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곳에 모여 있는 용병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에도 다른 용병들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저요!”
그러나 나에게 있어선 이 행사는 아주 황금 같은 기회였다.
돈이 필요할 때 이런 좋은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니. 아직 신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며 감사의 기도까지 올렸다. 그런 내 모습에 우락부락한 사내는 헛웃음을 지었다.
“체급이 다른데 괜찮겠어?”
그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내게 물었다.
누가 봐도 그의 체구는 나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나마 약점인 공황장애도 많이 극복한 상태이니 말이다.
“용감한 언데드 가면 보이~ 도전자에게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마이크를 쥐고 있던 행사 진행자가 나를 향해 손을 뻗은 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요구했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애송이.”
사내가 손짓하며 먼저 공격권을 주었다.
“흡!”
시간이 없는 관계로 난 오랜만에 기합과 함께 펀치를 날렸다.
그러자 내 펀치에 맞은 사내가 저 멀리 있던 건물까지 날아간 채 녹다운이 되었다.
자신만만했던 사내는 고작 펀치 한 방에 쓰러졌다.
‘너무 세게 쳤나?’
구경하던 관객들도 내 모습에 놀란 듯 입을 딱 벌리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진행자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끝난 건가요?”
내 물음에 진행자가 정신을 차린 듯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승자는 언데드 가면 보이~!”
* * *
따뜻한 아침 햇살이 지나가고 노을이 하늘을 붉게 태우고 있는 시각.
이에로가 정신을 차린 듯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 이에로 머리에 떨어진 물수건.
상처 부위를 확인하자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독성이 몸에 퍼진 상태였는데 씻은 듯이 나았다. 더구나 칼에 찔린 자국도 보이지 않을 만큼 치유가 잘되었다.
“일어났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하긴. 치유한 거지. 배고프다. 밥 먹자. 오늘 저녁은 특별히 소고기야!”
“지금 밥이 넘어가게 생겼어?”
꼬르륵―
이에로의 말과 반대로 그녀의 배에선 배꼽시계가 울렸다. 그러자 창피함에 얼굴이 불타오르는 이에로.
“애들이랑 할머니도 기다리고 있어. 식기 전에 얼른 와.”
이에로는 다시 한번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말끔히 치유된 상처 부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혼란이 온 듯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 * *
“오늘은 무슨 날이길래 반찬이 고기야?!”
오랜만의 고기반찬에 하민의 입꼬리가 귀에까지 걸렸다.
“어헛! 할머니 먼저.”
하민이 먼저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먹으려 하기에 난 그 손을 저지한 후 할머니 쪽으로 고기 접시를 밀었다.
하민과 바루나는 침을 삼킨 채 할머니가 고기를 먹길 기다렸다.
“고기는 어디서 난 거야?”
한편 이에로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설마 훔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태어나 처음 내 힘으로 번 돈으로 산 거야. 언제까지 빌붙어 있을 순 없잖아. 오늘은 내가 쏜다!”
내가 사 온 고기를 가족들이 맛있게 먹어 주자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뿌듯함이 온몸을 뒤덮었다.
현생에서도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했는데. 게임 속 세상에서 이런 감정을 느껴 보다니, 별일이다.
다행히 가족들도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평소 밥을 별로 드시지 않았던 할머니조차 고기가 입맛에 맞는 듯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어렸을 적 할머니가 내게 했던 말에 공감했다. 남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
차갑게 굴던 이에로 또한 맛있는 듯 살짝궁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언니하고 같이 먹으니깐 좋다.”
그러던 중 바루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에로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해서 같이 오순도순 밥을 먹은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언니가 아픈 건 싫지만 같이 먹으니깐 너무 좋아.”
바루나의 애교에 이에로는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온 듯 훌쩍 코를 먹었다.
그리고 바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하게 쳐다봤다.
“언니랑 앞으로 자주 같이 밥 먹자.”
“웅!”
두 자매의 애틋한 모습이 내 마음마저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저녁 만찬이 끝이 났다.
“아, 맞다. 오늘 대박 사건 있었다!”
“어떤?”
“파레타 신성으로 불리던 막심 용병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한주먹에 쓰러져 하루 만에 파면당했대. 뭐라더라? 이름이 언데드 가면 보이라던데.”
“캑캑.”
하민의 얘기에 당황해 고기가 목에 걸렸다.
오늘 한주먹에 뻗은 사내가 3대 용병 중 하나인 파레타 용병이라니.
하민의 말을 들은 난 내일 가면부터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네가 날 치유한 거야?”
“뭐, 정확히 말하자면 고용된 힐러가 치유한 거지.”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이에로가 가족 몰래 날 뒷마당으로 불러 물었다.
“···고맙다.”
이에로가 고맙다고 얘기하자 나도 모르게 볼이 빨개졌다.
“5년 가까이 가족들을 먹여 살린 건 넌데 뭘. 가족끼리 고마운 게 어딨어. 당연한 거지.”
“···엄연히 따지자면 우리가 진짜 가족은 아니잖아.”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아름답게 뜬 보름달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하민이나 바루나도 그렇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모인 것이지.”
그녀의 말이 맞다. 우린 진짜 가족이 아니었다. 예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있던 하민과 바루나는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온 뒤 할머니를 만나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홀로 헨드릭스와의 전투에서 도망친 나 또한 할머니가 거둬 주시고, 마지막으로 부모를 잃고 도시에서 도망친 이에로까지 할머니가 책임지고 데려온 것이었다.
“피를 나눠야만 가족인가. 그냥 오늘처럼 같이 밥 먹고 같이 생활하면 가족인 거지.”
그러나 난 그녀와 생각이 달랐다. 우린 가족이다.
“그 일은 어쩌다 하게 된 거야? 아니다. 수산 시장 일은 하는 거 맞는 거야?”
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야.”
“그렇지만, 너무 위험해. 오늘 도시에 내려가 신문을 보니깐 자경단 얘기로 도배가 돼 있더라.”
“아서왕이 일으킨 2차 세계대전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많아졌어. 그러나 용병들은 그들을 오히려 이용만 하려 하지. 세상 물정 모르고 있는 애들이니. 우린 그런 애들을 구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뿐이야. 할머니가 날 구원해 준 것처럼. 우리와 같이 고아가 된 아이들을 이용만 하려는 파렴치한 놈들로부터 구원해 주고 싶어.”
속사정을 듣자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도망친 자경단을 잡으려고 용병들이 이곳저곳 수색하고 있으니 잠시나마라도 이곳에서 몸을 숨기라고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