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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살아남는 법
내 공황 발작을 막아 줄 유일한 동료가 제나였기에 난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그쪽으로 기어갔다.
그런데 제나 뒤로 또다시 카모라의 촉수가 다가섰다.
“도망쳐!”
카모라는 내 주변에 있는 동료를 모두 죽일 작정이었다.
지금이라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공황 발작이라도 멈추어 동료들을 보호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또다시 카모라의 촉수가 제나 몸 이곳저곳을 뚫어 버렸다.
난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패배자처럼 오열하기만 했다.
그때 제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왕님 놔두고 안 갑니다.”
제나가 카모라의 공격을 받기 전 소환한 사람.
아틀란티스 길잡이 반 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반 할이 소환되자마자 나를 어디론가 이동시키려 했다.
“어디 가려고!”
카모라가 제지하려 했지만, 제나가 그녀의 공격을 겨우 막은 채 내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었다.
“꼭 살아남으세요. 마왕님.”
“안 돼! 마왕 브라고! 이대로 도망치면 너의 주변 사람들을 죽이고 너 또한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카모라의 외침과 함께 난 반 할의 텔레포트로 이동했다.
도망치듯 이동된 공간은 황폐해진 아틀란티스와 달리 평온했다.
마치 악몽이라도 꾼 것같이 지금껏 겪었던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실이었고, 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유일하게 도망친 생존자가 되었다.
‘꼭 살아남으세요. 마왕님.’
매일 밤. 그때의 사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크라운의 죽음과 제나의 음성이 내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마왕 브라고! 이대로 도망치면 너의 주변 사람들을 죽이고 너 또한 어떻게서든 찾아내 죽여 버릴 것이다!’
카모라의 저주도 매일 밤 들려왔다.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 * *
요란한 빈 수레 소리에 방문을 열었다.
“······.”
길잡이 반 할의 도움으로 난 퍼플우드 남쪽에 위치한 시골 판자촌에서 5년간 살았다.
빈 수레에 수확한 벼를 가득 실은 할머니가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새벽부터 벼를 수확하러 나가신 겁니까?”
“······.”
내가 묻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바라보는 할머니는 내가 5년간 몸을 숨기며 살아가게 해 준 은인과도 같은 인물이다.
나를 거둬 준 할머니는 언어 장애인 즉 벙어리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 덕분에 이곳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나를 거둬 준 할머니께서 벙어리란 이유로 내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치지만 그것이 고마웠다. 매일 밤 꿈속에서 주마등처럼 그때의 사건이 지나가는데 꿈에서 깬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쉬엄쉬엄하세요.”
난 벽면에 걸려 있는 언데드 가면을 머리에 쓴 채 마당으로 나갔다.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은 3성 괴수 언데드의 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가면으로 난 정체를 숨긴 채 용병의 대륙 퍼플우드에서 몸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
게임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뜻이다.
“후우, 하.”
새벽 공기가 차가우면서도 상쾌했다.
용병 길드가 즐비한 도시와는 달리 퍼플우드의 시골은 평화롭고 한적했다.
그래서 단잉의 반지가 없는데도 공황 증세가 쉽게 오지 않았다.
물론 5년간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 할의 텔레포트로 이곳에 처음 떨어졌을 당시를 생각하면 매일 공황 증세로 고생했던 기억만 떠오를 정도였다.
“나머지 수확은 제가 할게요. 쉬세요.”
그러나 지금은 이제 단잉의 반지 없이도 홀로 농사할 수 있을 만큼 정신력을 강화했다.
물론 공황이란 대개 긴장한 순간이나 답답한 순간에 찾아오는 정신병이라 아직 완전히 극복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난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 절대 없으니 괜찮다 싶었다.
물론 죄책감은 매일 느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동료를 해친 카모라를 당장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잠잠하던 공황도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텔레포트하기 전 카모라의 외침이 머릿속으로 각인되었다.
‘마왕 브라고! 이대로 도망치면 너의 주변 사람들을 죽이고 너 또한 어떻게서든 찾아내 죽여 버릴 것이다!’
두렵다.
또다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짹짹!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차가운 새벽이 가고 따뜻한 해가 떴다.
난 잠시 낫을 바닥에 놓고 구비된 의자에 앉아 해를 맞이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자연이 느껴졌다.
햇볕의 따스함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내 마음을 조금 녹여 주는 느낌이었다.
“영수 형! 또 일하다 말고 농땡이 부리지!”
그러나 어딜 가든 시련은 늘 존재하는 법.
판잣집에서 같이 사는 동생 하민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녹슨 가면은 왜 매일 쓰는 거야. 냄새도 고약하던데.”
“아카데미 안 가니?”
“오늘 방학이야. 형으로서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
하민은 벙어리 할머니의 손자로 내가 할머니에게 거둬질 때부터 나를 진절머리나게 했던 아이였다.
공황 증세로 힘들어했을 때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비아냥대기만 했던 사춘기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하민! 형에게 무슨 말버릇이니?!”
그때 이곳의 희망이자 장녀 이에로가 남동생인 하민을 꾸중했다.
“영수 형이 농땡이 부리잖아.”
“넌 돕지도 않고 늦잠 잤으면서 그게 할 말이니?”
“난 방학이고, 형은 백수잖아.”
하민의 말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난 게임 세계에서도 백수였다. 취업은 게임 세계에 떨어졌어도 힘들었다.
“그리고 난 최강의 용병이 될 몸이라고!”
하민이 나무 위로 올라가서 목검을 위로 든 채 외쳤다.
사춘기가 세게 온 청소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저 나이 땐 저 당찬 모습이 멋져 보일 테니. 난 그저 맞장구쳐 줬다.
“영수 오빠. 오늘은 나랑 산책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하민 때문에 아침부터 떠들썩하던 중 막내인 바루나가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며 내게 다가왔다.
“영수 오빠. 언제 갈 거야?”
“여기 마당에 있는 옥수수만 수확하고 가자. 이번엔 뒷동산까지 가 보자.”
“우왕!”
일곱 살 남짓한 여자아이로 추정되는 바루나. 그나마 나를 제일 따라 주는 귀여운 동생이다.
난 이곳에서 현생의 본명을 다시 쓰고 있었다.
브라고가 아무리 35년 전 가이곤에게 죽임을 당했어도, 몇천 년간 루기아 세계를 제패한 존재.
동명이인이라 해도 사람들 눈에 띄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를 본명 기영수란 이름을 쓰기로 했다.
“이에로 누나! 나도 방학했는데 누나도 볼 겸 도시 구경하러 가도 돼?”
한편 하민이 나무에서 내려와 이 집안의 장녀 이에로에게 애걸하며 도시 구경을 추진하려 했다. 물론 이에로의 답은 냉랭했다.
“또 무슨 사고 치려고.”
“아니~ 로체 도시 최강의 용병 길드인 파레타 용병 구경하고 싶어서.”
용병이란 보수를 받고 복무하는 군인을 뜻하는 말이다.
그중 파레타 용병은 퍼플우드 용병 길드에서 세 손가락에 들 만한 거대 용병 길드.
최강 용병을 꿈꾸는 하민에게는 파레타가 꿈의 길드였다.
“내가 파레타 길드에만 들어가면 힘들게 장사하는 것도 끝이라고.”
“헛소리하지 말고 공부나 해.”
“어차피 내 성적으로 들어갈 학교도 없어. 지금부터라도 용병 준비하는 게 맞대니깐.”
“아이고, 자랑이다. 용병은 무슨 아무나 하는 줄 아니? 밤에 무서워서 혼자 화장실도 못 가는 주제에.”
이에로의 말에 하민은 삐진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기영수. 나 일하는 동안 애들 허튼짓 못 하게 잘 감시해.”
이곳에 온 뒤로 난 이 집안에서 둘째가 되었다.
뭐, 이 집안을 홀로 먹여 살리는 사람은 장녀 이에로였기에 나 또한 그녀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
“나 싸움은 쫌 하거든!”
그런데 하민이 갑자기 이에로의 왼쪽 다리를 들어 엎어치기를 하려 했다.
아마 누나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 급발진을 한 것 같은데.
이에로는 생각보다 강한 자였다.
“아얏!”
단숨에 사춘기가 온 남동생을 제압하는 이에로. 그녀는 온몸을 강철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능력자였다.
“저기, 로체 도시엔 나보다 강한 용병들만 몇천 명이 있어. 그런데 이 실력으로 용병이 되겠다고?”
이에로는 하민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모두 긁어 버린 후 냉정히 뒤돌아 장사하러 도시로 내려갔다.
“어이, 괜찮아?”
난 조심스럽게 벌러덩 넘어진 하민에게 물었다.
“흐엉!”
아직 애는 애다. 누나의 말에 상처를 크게 입었는지 통곡하는 하민.
귀여운 막내 바루나가 자신의 사탕을 양보해도 하민은 이미 상처 입은 듯 홀로 뒷동산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흐음.”
나는 아직 수확해야 할 벼가 많이 남았기 때문에 하민을 잡지 않았다.
내가 잡는 것보다 혼자 마음을 추스르는 게 더 효과적이기도 하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네.”
애늙은이 같은 말이 막내 바루나의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게.”
그런 바루나의 모습이 귀여워서 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귀여운 막내 바루나가 몰래 하민 오빠에게 다가가 위로 좀 해 줘.”
이에로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난 그래도 일을 해야 했기에 하민의 위로를 바루나에게 넘긴 후 벼를 마저 수확했다.
이곳에 온 지도 어언 5년.
5년이 지난 지금. 보시다시피 난 게임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 * *
“뿌에에엥!”
그 많던 벼를 모두 수확하고 마루에서 쉬던 와중에 하민을 위로하러 뒷동산에 올라간 바루나가 오열하며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난 할머니가 있는 안방을 슬며시 곁눈질하며 바루나의 울음소리를 혹여나 들었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할머니는 새벽부터 일했는지, 낮잠을 주무시는 듯했다.
난 할머니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오열하는 바루나를 데리고 동산에 올라갔다.
“아니, 훌쩍. 하민 오빠가··· 흐규.”
겨우 바루나를 달래고 나서야 막내가 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뭐라고?!”
그것은 생각보다 머리가 지끈해지는 이유였다.
“하민 오빠가 몰래 도시로 내려갔어.”
“하아.”
자연스럽게 짙은 한숨이 나왔다. 분명 이에로가 애들을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바로 가출하다니. 그녀가 알면 난 죽은 목숨이다.
“어느 도시로 갔는데?”
“바로 밑에 로체 도시 쪽으로.”
“후우.”
로체 도시면 아마 아침부터 앵무새처럼 계속 얘기하던 파레타 용병 길드를 구경하러 내려간 모양이다.
퍼플우드의 시골은 한적하고 조용하지만, 도시는 용병들이 많은 탓에 위험하고 싸움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다.
같은 용병이라도 그들은 돈을 목적으로 한 병사들.
강함을 증명해야 더 보수 높은 세력에서 의뢰가 오니 길드 다툼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다.
나 또한 게임을 할 때 재미로 용병으로 나선 적이 있었는데.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매일 시비를 걸어왔었다.
물론 그땐 시비를 거는 용병들의 길드를 묵사발 냈지만, 지금의 난 주변 이들을 더는 잃고 싶지 않아 정체를 숨기는 중이라 도시에 내려간다 한들 마음껏 무력을 휘두르지 못하는 신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