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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입니다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내 잠을 깨웠다.
화창한 날씨. 은은하고 향긋한 피톤치드의 풀 냄새.
“마왕(魔王)님!!”
그러나 어떤 소녀의 땍땍거리는 외침이 평화로운 나의 아침을 망가뜨렸다.
눈을 떠 보니 새하얀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한 소녀가 내 뺨을 때리고 있다.
“뭐야?!”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놀라 일어서니 나는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드디어 제 기도가 통했군요.”
왠지 낯익은 초원. 그리고 낯익은 소녀의 모습. 난 이곳이 내가 즐기던 게임, 브라고 속 세계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에이 씨, 꿈이네.’
그래서 난 다시 들판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일어나세요!”
다시 들판에 눕자 내 뺨을 후려갈기는 소녀. 아프다.
꿈인데도 고통이 느껴지고 볼도 부은 듯 봉긋 올라왔다.
“당신 뭐야.”
흐릿한 정신을 붙잡고 나서야 그녀에게 질문했다.
“마왕님의 시녀 제나입니다.”
정신을 다잡으니 서서히 시야가 넓어진다. 그리고 날 깨우는 소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3일 전. 진보스인 브라고를 토벌하러 마왕의 소굴로 들어가던 중. 그 앞을 지키고 있던 NPC.
새하얀 피부와 불그스름한 입술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귀여운 외모와 다르게 위협적인 악마의 뿔이 인상적인 캐릭터.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 떠오른 칭호가 보였다.
[악마(惡魔) 소환사 제나]
악마의 칭호를 가진 캐릭터는 브라고의 수하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마왕이라며 모시는 사람은 한 명뿐.
바로 진엔딩 보스인 마왕(魔王) 브라고.
난 고개를 들어 내 칭호도 확인했다.
[마왕(魔王) 브라고]
진보스 브라고만이 불릴 수 있는 칭호.
말 그대로 난 게임 속 마왕의 몸으로 다시 깨어난 것이다.
‘하.’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상. 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여기가 어딘지 물었다.
“여긴 어딥니까?”
“그린우드 외곽에 있는 풍차 마을입니다.”
낯익은 지명 또한 그녀의 입에 담기자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점점 실감되었다.
아직도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이 꿈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에도 너무나 선명한 뺨의 고통과 눈에 담긴 광활한 들판이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가위에 눌린 건가? 아니면 드디어 미친 건가?’
생각을 되짚어 보니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분명 공황 발작으로 길 한복판에 쓰러진 기억이 있긴 한데.
“크윽.”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또다시 공황이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세요?”
게임 속 캐릭터에 빙의됐으면 공황은 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평범한 캐릭터가 아닌 게임 세계관 속 최강의 캐릭터 브라고로 빙의됐는데.
그런데도 공황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난 가슴을 부여잡고 본능적으로 제나의 손에 의지했다.
그러나 온기가 하나도 없는 그녀의 손은 날 진정시키지 못했고, 그대로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 * *
“이제 좀 괜찮으세요?”
그린우드 풍차 마을에 위치한 보사노바 찻집.
다행히 제나의 도움으로 풍차 마을로 와서 심신을 안정시켰다.
[복개차]
심신을 안정시키고 고통을 잠시 가라앉혀 주는 차.
물건을 만지면 간단한 설명이 눈앞에 떠오른다.
“하.”
헛웃음이 나오는 현실. 그러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은 비현실적이지만 꿈이 아니다.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복개차를 마시니 내 머릿속을 휘저었던 불안감과 두려움이 잠시 사라졌다.
덕분에 난 이성적으로 지금 내가 처한 일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고민했다.
“네, 마왕님. 우리 같이 블랙우드에 있는 마왕의 소굴로 돌아갑시다.”
답이 없다. 내 앞에 앉은 악마 제나는 자꾸 헛소리만 하고, 다시 현생으로 돌아가는 방법 따위는 말해 주지 않았다.
“블랙우드 말고 절 지구에 데려가 주세요.”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마왕님이 원하는 곳이면 언제든 약탈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 여기는 내가 즐겨 했던 게임 세계 속이다.
답이 없어 보이지만, 나 스스로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생에서 먹던 공황장애 약보다 지금 마시는 복개차가 내 공황 증세를 약화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
게임 속에 들어왔다면 다시 현생으로 돌아갈 방법 또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작은 희망과 함께 찻집 창가에 비친 풍차 마을을 둘러보았다.
유럽풍의 건축물이 특징인 아기자기한 풍차 마을.
브라고 게임 세계관인 루기아 행성엔 아홉 개의 대륙이 있다.
풍차 마을이 있는 대륙은 그린우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곳은 튜토리얼을 막 시작하는 신생 유저가 태어나는 시작점이기에 이곳에서 깨어난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피비린내와 고레벨의 몬스터가 가득한 레드우드에서 깨어났으면 그들에게 이미 잡아먹혔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찻집 벽에 걸린 달력이다.
3052년. 1월 11일.
“3052년이 오늘이에요?”
내 질문에 제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머릿속이 또다시 뒤죽박죽 어지럽혀졌다.
불과 3일 전. 내가 진엔딩 보스인 브라고를 공략할 때 루기아 날짜는 분명히 3022년이었기 때문이다.
“마왕님은 30년 만에 부활했습니다.”
마왕 브라고가 죽은 뒤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부활했다는 제나의 한마디.
브라고가 죽은 날짜가 내가 브라고를 해치운 날짜와 일치했다.
‘그럼 내 캐릭터는?’
콰쾅!
그런데 그때.
게임 세계관에 의문을 갖던 중. 갑자기 아래층 테라스에서 귀가 찢어질 정도의 폭발음이 들렸다.
* * *
한편.
철컹.
굳게 잠겨 있던 그린우드 수감실 문이 활짝 열렸다.
“출감이다. 나와!”
수감실 문이 열리자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오는 한 청년.
머리카락을 자른 지 오래된 듯 긴 앞머리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교도관들은 그가 수감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그때 청년의 앞을 막는 중년 남성. 교도장이다.
“갈 곳은 있나? 자네 정도의 마력이면 그린우드의 수호자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됐습니다. 앞으로 마력 따위 쓸 생각이 없습니다.”
교도장은 삶에 미련이 없어 보이는 청년의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끝내 아쉽다는 듯 길을 비켜 주었다.
“교도장님. 저 청년이 1년 전. 범죄 집단 헨드릭스의 정찰대 수십 명을 홀로 궤멸시킨 그자가 맞습니까?”
“음.”
“그 사실이 맞다면 아까운 인재이긴 하네요.”
“야! 뭐가 아까워. 자신의 마력조차 통제하지 못해 우리 그린우드 경호대까지 몰살시켜서 이곳으로 들어온 거잖아.”
교도관들의 의견도 나뉘었다. 청년이 그린우드로 침범한 헨드릭스의 정찰대를 몰살시켰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이들과 그래도 그린우드 경호대까지 몰살시킨 범죄자라는 반대 의견으로 말이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마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지.”
교도장 또한 청년의 능력이 아쉬우면서도 포용하기엔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청년의 마력을 썩히기엔 너무나 아까운 수준.
그러나 이미 떠난 버스는 다시 잡을 수 없는 법.
청년은 수감실을 떠나 저 멀리 어딘가로 향했다.
* * *
그린우드 외곽에 위치한 풍차 마을.
그곳을 걷다 보면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가 들리며 평화로운 햇살을 만끽할 수 있다.
수감실에서 오늘 출감한 청년 역시. 풍차 마을 보사노바 찻집의 테라스에 앉아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펄럭―
그러던 중. 매서운 눈빛과 산만 한 덩치. 그리고 날카로운 흉기를 등에 지닌 괴인들이 보사노바 찻집에 들어왔다.
“여기 불광차 네 잔 좀 갖다 주쇼!”
찻집에 있던 손님들은 그들이 등에 지닌 무시무시한 흉기를 보고 한둘씩 자리를 떠났다. 직원 또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을까요?”
“잠깐 누굴 찾으러 왔는데···.”
그들은 무언가 찾는 듯 찻집을 수색하며 돌아다녔다.
얼굴의 큰 X자 흉터가 눈에 띄는 거구가 남아 있는 손님들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이 찻집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테라스에서 여유를 즐기는 청년을 발견한 거구.
그 거구가 테라스에 들어가 청년의 머리를 잡아 올렸다.
“남자야, 여자야?!”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지 않던 청년의 얼굴이 드디어 드러났다.
그러나 그 행동으로 청년의 심기를 건드린 거구.
쿠쿵―
청년 주변으로 어두운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거구를 삼켜 버렸다.
* * *
“무슨 소리야?”
내 귀가 찌릿할 만큼 엄청난 폭발음이 찻집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때 순식간에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다행히 물컹한 감촉이 느껴지는 곳에 떨어졌다.
뭔가 싶어 손으로 더듬어 보니 사람의 피부 같았다.
조심스럽게 일어서 확인하니 날 받쳐 준 것은 사지가 찢어발겨진 사람의 몸통이었다.
“으악!!”
“마왕님, 괜찮으세요?!”
사람의 사체를 처음 봤기에 제나의 말이 내 귀에 닿지 않았다.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복개차 또한 효능이 끝난 듯. 불안감과 두려움이 내 뼛속까지 전해졌다.
마치 악마의 손이 내 심장을 잡을락 말락 하는 것처럼 오묘하고 더러운 기분.
진자 운동처럼 일정한 패턴으로 두근거렸던 심장이 요동치며 끝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난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왕님, 피하세요!”
그 순간 내 앞으로 찻집을 집어삼킨 소용돌이가 지나쳤다.
그리고 그 뒤로 서서히 나를 향해 걸어오는 한 청년.
청년의 머리 위에 떠오른 칭호를 확인하자 그가 얼마나 강한 자인지 알 수 있었다.
[암살 집단 흑사협의 그림자 론 대령(大領)]
암살 집단 어쩌고는 뭔지 모르겠지만 대령이란 칭호가 눈에 띄었다.
브라고 게임 세계관에선 숫자가 아닌 계급으로 레벨이 나뉘었다. 대령이란 칭호를 달 정도면 랭커에 속할 만큼 레벨이 높다는 뜻이다.
물론 대장(大將)이었던 내 캐릭터와 비교하면 매우 낮은 계급이지만, 대령 또한 한 마을을 통치할 만큼 높은 직급.
그러나 그를 마주한 나는 공황 발작으로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
론 대령은 날 향해 걸어왔고, 그자가 일으킨 소용돌이 또한 내게 돌아왔다.
“살려 줘······.”
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제나의 이름을 외쳤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듯. 그녀의 행방은 묘연했다.
찰나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내게 스킬 창이 번뜩 나타났다.
[블럭]
중력 에너지를 이용한 에너지파.
맞다. 내 몸은 마왕 브라고의 몸이다.
브라고는 중력을 이용하는 최고의 스킬과 최강의 무력까지 겸비한 캐릭터.
난 얼른 스킬 창에 써진 스킬 이름을 눈이 뒤집힌 듯 동공이 보이지 않는 론 대령을 향해 외쳤다.
“블럭!”
그러나 스킬은 발동하지 않았다.
위급할수록 점점 아득해지는 내 정신과 계속 날 향해 다가오는 론 대령.
‘누군데 왜 계속 나에게 다가오는 거야!’
지옥이 있으면 여기일까? 난 고개를 숙인 채 두 팔을 벌려 가드를 세웠다.
가드를 세운다 한들 저자의 소용돌이에 내 사지가 잘려 나가겠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눈 감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
그런데 그때 내 손에서 느껴지는 에너지.
난 또다시 스킬 창에 쓰여 있던 기술 이름을 외쳤다.
“블럭!”
외침과 동시에 손에서 중력 에너지 파동이 론 대령의 머리를 향해 발사됐다.
털썩―
스킬을 맞은 론 대령의 머리가 풍선처럼 맥없이 터졌다.
그리고 그 뒤로 중력 에너지가 발사된 방향으로 풍차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
“역시 마왕님!”
론 대령을 해치우니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제나.
그러나 난 충격과 공포로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