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시궁창이라도 나만은 내 삶을 사랑해줘야지 =========================
나는 책에 빠져들어 있는 이선준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왜 자꾸 아저씨래?”
“구닌아저씨자나.”
혀 짧은 소리로 말하자 이선준의 얼굴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짬 안 되는 것도 서러운데 이렇게 놀리면 정말 이를 갈았다. 나는 과하게 여자인 척을 했다.
“나 그러고보니까 대한민국 여성 유일의 예비역 육군 병장이잖아? 희소성 미쳤네. 여자도 예비역인 시대에 남자가 현역이라니, 개불쌍해라.”
“내 인내심을 시험한 거라면 칭찬해주지.”
“왜?”
“방금 바닥났으니까!”
“으, 으아아앗!”
큼지막한 손이 내 머리를 짓눌렀다. 아파! 진짜 아파! 예전에 할 때는 그냥 아픈 수준이었는데 이건 진짜로 아팠다. 피부가 약해졌는지 뼈가 약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아귀 힘 때문에 부서질 것 같았다.
“아, 아퍼! 아퍼!”
“그러게 현역 육군 병장을 놀리면 쓰냐?”
“지, 진짜 아퍼! 아파! 아프다고!”
내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자 이선준은 그제야 손을 놨다. 진짜 아프다. 거짓말이 아니라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선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야, 너 우냐?”
“아, 아 진짜… 진짜 아프다고….”
나는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숙였는데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내가 미쳤나? 왜 이까짓걸로 울고 있지? 근데 진짜로, 진심으로 아팠다.
나는 잠시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골랐다. 이선준은 내가 갑자기 질질 짜자 벙찐 표정이었다. 나는 눈가를 슥 훔치며 말했다.
“기분도 드러운데 술이나 먹자.”
“어? 어, 뭐 그러지.”
“나가서 치킨사와. 치킨이랑 소주.”
“뭐? 내가?”
“이럼 내가 이 꼴로 나갈까? 젖꼭지 보여주고? 팬티 헐렁헐렁한데 중요한 데까지 다 보여주고?”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배달 시키면 되잖아.”
“아냐, 형이 나가서 사올 게 있어.”
내 말에 이선준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나가서 여자 팬티랑 브래지어 사와.”
“뭐? 너 미쳤냐?”
아직 너무 늦은 밤이 아니라서 속옷 매장은 열려있을 것이었다.
“그럼 내가갈까? 이 꼬라지로? 경찰에 신고당해! 아 머리아파…. 아이고 이 아저씨가 여자를 막 패네… 군인이 민간인 폭행했어요! 누가 이 사람 말년휴가 짜르고 영창보내서 전역좀 늦게 하도록 도와주세요! 도와줘요 국방 헬프콜!”
마법의 단어까지 외치자 이선준은 결국 못 견디겠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국방 헬프콜, 모든 군인들을 침묵시키는 마법의 단어였다.
“야, 간다, 간다고!“
“감사합니다 형님!”
작은 여자애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 내가 생각해도 이거 좀 반칙인 것 같다. 그리고 형님이라니, 뭔가 병신같지만 귀여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갑을 뒤져서 물품 구매에 필요한 금액을 전달하려 했다. 비상금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생필품이다.
“여기 돈.”
“됐어 새끼야.”
“아냐 내껀데 당연히 내 돈으로….”
-쾅!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선준은 문을 격하게 닫고 나가버렸다. 여자친구 생리대는커녕 스타킹도 못 사던 인간이 남자였던 동기가 입을 속옷을 사러 밤길을 떠나고 있었다. 배웅해줘야 친구된 도리였다.
“이보쇼! 군인아저씨!”
“왜!”
가시돋친 음성이 들려왔다. 원룸은 3층에 있었다. 이선준은 고개를 돌린 채 내가 있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반에 소주는 후레쉬로 사와! 맥주 사오지 말고!”
“알았으니까 꺼져!”
응원이 아니라 추가 요구사항을 전달받자 이선준은 내게 엿을 날렸다. 나는 창문을 닫고 찬바람 때문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아, 웃긴다. 여자가 되니까 남자일때와는 다른 묘한 재미가 있었다. 놀리는 맛이 아주 찰졌다. 솔직히 내가 봐도 나 엄청 예쁘게 생겼다. 목소리도 꽤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살지. 시궁창 같은 내 인생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유가 생기지 않겠어?
끊임없는 자기위로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잘 못 하겠는데.”
나는 끙끙거리며 브래지어를 착용하려 애썼다. 팬티를 입는거야 뭐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브래지어가 난관이었다. 톡 하면 떨어지던 브래지어는 막상 입어보려고 하니 뭔가 짜증났다.
“별로 크지도 않은 가슴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진짜.”
나는 투덜거리며 양손을 뒤로하고 브래지어를 채우려 했다. 이선준은 뭐가 부끄러운지 내 쪽은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뭐 그래, 대놓고 본다면 그거대로 뻘줌하다. 내가 계속 끙끙대며 못 입고 있자 이선준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야 이 자식아, 힘들면 앞에서 채우고 뒤로 돌린 다음에 어깨끈 올려서 입으면 되잖아.”
“뭐? 제대로 설명해봐.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너 옷 입어봐.”
이선준의 말에 따라 나는 셔츠를 입었다. 이선준은 답답하다는 듯 내 손에 들려있는 브래지어를 낚아챘다.
“아오 내가 이걸 왜…. 잘 봐.”
마초 중의 상마초 이선준이 내 앞에서 브래지어 입는 법을 시연하고 있었다. 살다살다 이런 날이 오다니, 인생은 역시나 오래살아야 한다. 이런 웃기는 꼴을 돈도 안 주고 볼 수 있으니까.
이선준은 브래지어 후크가 있는 쪽을 등이 아니라 배 쪽으로 당겨서 채웠다. 그리고 브래지어를 잡고 휙 돌려 컵 부분이 앞쪽으로 오게 했다.
“이러고 어깨끈에 손 넣고 위로 올리면 되잖아. 어?”
“천재야?”
“천재가 아니라 안되면 생각을 좀 해!”
“형이야 여자 많이 후려봐서 이런저런거 많이 봤겠지만 나는 딱 두 명밖에 없었는데. 걔네들은 잘 하더라고.”
“후리긴 뭘 후려? 나 좋다는 여자 만난게 죄냐? 그리고 이건 뭐 봐서 아는게 아니거든?”
“허허, 그러시군요. 형님 잘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벽봐.“
나는 속옷을 다시 받아들고 알려준 방식대로 입었다. 왜 이런 단순한 걸 생각 못했는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항상 백후크를 벗기는 쪽에 있어서 당연히 이 상태로 입을거라 생각했던 고정관념 때문일수도 있다.
“후크 앞에 달린것도 있으니까 나중에 그거 사던가.”
“그런것도 있어?”
내가 만난 여자들중에 앞후크 브래지어를 입고있던 여자는 없었다. 나는 셔츠를 다시 입었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뭔가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밑에는 여자팬티에 트렁크를 입은, 팬티 위에 팬티 입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뭐 팬티 정도야 보여도 상관없겠지 싶었다.
애초에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이 선비를 이 방에 모셔왔으니 어느 정도는 자존심을 지켜줘야겠다 싶어서 속옷도 기껏 착용한 것이었다. 이걸 입기 전에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뭘 그렇게 잘 알아? 차라리 내가 아니라 형이 TS됐으면 쉽게 적응했을텐데.”
“이런 미친, 그걸 말이라고 그런 악담을….”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다가 그 악담의 희생자가 눈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불쌍하다는 식으로 쳐다보면 좀 짜증난다. 나도 내가 불쌍해서 더욱 그렇다.
“술이나 먹자.”
나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치킨 포장을 뜯었다. 치킨은 옳다. 항상 옳다. 소주와 먹으면 더욱 옳다.
“야 너 그런데 술 마셔도 괜찮을…. 이미 먹었네.”
말도 끝내기 전에 나는 일단 소주를 한 잔 들이킨 상태였다.
“뭐 어때, 뻗어봐야 집인데.”
“거 참….”
그러면서 이선준도 치킨을 뜯었다. 하긴, 어차피 집이니까 상관이야 없었다.
(여기부터 3인칭)
예전부터 둘은 술을 좋아했고, 마시면서 밤새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소설 얘기도 하고, 힘든 학교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정치 이야기도 했으며, 이념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이제 둘은 군대도 갔으니 이제 거기에 군대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설원은 누구라도 한 번쯤 쳐다볼 만큼 귀엽고 예뻤다. 가슴이 없다고 본인은 툴툴거렸지만 사실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설원이 만났던 여자들이 좀 과하게 컸던 것이었다. 그런 여성이 군대 이야기랍시고 그런 얘기를 해대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귀엽게도 느낄 것이다.
치킨 한 마리를 뜯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둘은 안주로 라면을 하나 끓였다. 인덕션에 냄비를 올려놓고 설원은 팔짱을 낀 채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둘은 술을 더 오래 마셨다. 설원은 몸이 아예 바뀌기는 했지만 주량 자체는 그리 약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설원은 지금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원래 주량의 절반도 먹지 않았는데 눈앞이 흔들렸다.
원래도 이선준은 설원보다 술을 잘 마셨다. 비어있는 소주는 이제 네 병이었다.
“너 괜찮냐?”
“으응? 뭐 괜찮지….”
말끝이 늘어졌다. 몸은 바뀌어도 술버릇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말할 때가 항상 제일 위험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