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9 모순의 종착지 =========================
이선준의 독설에 나는 몸이 떨린다. 저건 진심이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왔던 진심이다.
“내가 화를 냈다고? 화를 낸건 너야.”
이선준은 나를 바라보고 말한다. 나는 반박하려 하지만 이선준이 먼저 말한다.
“너, 내가 서혜인이랑 연애하는 거 싫지.”
“……무슨 소리야?”
이선준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 이상한 소리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뭔가에 맞은 것처럼 몸이 굳어버린다.
더 이상은 안된다. 더 말하면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차라리 이선준이 소리를 지르고 방을 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선준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
“싫은 거야 좋은 거야? 말해봐.”
“내가 싫어할 이유도 없고, 좋아할 이유도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럼 대체 왜 그 주제에 대해서 얘기할 때마다 표정이 그 따위야?"
이선준이 무서운 표정으로 따진다.
"왜 토요일에 그 얘기 듣자마자 넋이 나갔어? 말해봐, 왜 그 이후로 무슨 얘기를 해도 멍청하게 응 아니만 하면서 끈 떨어진 인형처럼 굴었잖아. 말해보라고! 너 엄청 속 보이는거 몰라?"
"속이 보이다니? 무슨 소리야, 전혀 모르겠어. 너도 이상해 지금! 내 모순이 어쩌니 하면서 너도 계속 그 따위로 말하잖아. 너는 나한테 뭘 바라는데? 내가 싫어하면 어쩔건데? 좋아하면 또 어쩔건데! 내 어떤 지점에서 속이 보인다는 건데? 내 속이 뭐야? 내 뭘 안다는거야?"
내 말에 이선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너무나 명백한 분노다. 이렇게 싸운 적이 있었나? 우리의 생각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때문에 싸운 적이 있었나? 내 기억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고, 서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항상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였다. 생각의 차이 때문에 싸우기는 했어도, 마음의 문제로 싸운 기억은 없다.
우리가 진심으로 싸우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끝까지 기만적으로 나오겠다 이거냐?"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기만을 했어?"
"......그래, 꺼져. 필요없어 이제."
이선준은 시계를 본다.
“시간 됐네, 나 간다.”
“응, 가.”
나는 최대한 건조하게 말한다. 이선준이 가면, 이선준은 오늘부터 서혜인과 사귀게 된다. 이선준은 내가 보건 말건 옷을 갈아입는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다. 이것으로 되는건가? 이걸로 끝인가? 이선준은 옷을 갈아입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선준은 화가 나 있다. 어째서 화가 난 건지 잘 모르겠다.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날 거면서, 나랑 찍은 사진을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거지? 그걸 내가 버리려고 하니까 왜 화를 내는거지? 왜 내게 그런 걸 묻는거지? 내가 서혜인과의 연애를 질투하면? 그러면 어쩌라는 거지? 그걸 알아서 대체 뭘 해결하고, 뭘 얻어내려는 거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이선준의 말이 맞다.
내가 화를 내고 있었다. 이선준이 화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선준이 화를 내도록 일부러 매몰차게, 신경질적으로, 차갑게 굴었다. 그래서 이선준이 분노의 기색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 물어뜯었다. 내가 이선준을 먼저 자극했다.
이선준이 신발을 신는다.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금 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나도 아직 모르는 뭔가가 이제 사라져 버린다. 감각할 수 없는 뭔가로 남아버린 채 숨어버린다. 그게 너무 싫다.
문득 내 진짜 마음을 알아버린다. 동시에 뭔가 내 안에서 끊어져 버린 것 같은 묘한 감각을 느낀다. 맞다. 너무 늦어버렸다. 어떤 다른 방식으로 해피엔딩을 맞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우리가 어딘가로 흐르고 있는 줄 알았다.
전혀 아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이미 도착했고, 그 곳에 고여있다. 그리고 고인 채 썩어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선준을 말리면 안 된다.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선준을 잡는 순간, 우리의 이미 부서져버린 마음은 가루가 되어버릴거다. 우리는 처음 부딪힌다. 처음인 만큼 우리는 너무나 미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세게 부딪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선준의 뒷모습이 두렵다.
이선준이 떠나가버리는 게 싫다.
나는 작게 말한다.
“가지 마.”
“왜?”
“신발 벗고 다시 얘기해.”
“설득해봐. 내가 왜 가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나는 울지 않는다. 나는 화내며 이선준을 붙잡고 있다.
“싫어, 설득 안 해. 가지 마.”
“너 미쳤구나.”
“응, 나 미쳤어.”
이선준은 신발을 벗고, 다시 내 앞에 와 선다. 나는 왜 이선준을 붙잡은 걸까? 잘 모르겠다. 나는 이선준을 사랑하는 건가? 집착하는 건가? 아, 아, 그렇다. 이선준이 나를 구속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 반대다.
내가 이선준을 구속하고 있다. 나는 이선준에게 집착하고 있다.
“뭐야, 왜 말리는건데. 내가 너를 친구로 보려면 내가 연애를 하는 쪽이 제일 좋은 거 아니냐?”
이선준은 냉엄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문득 창밖을 본다. 비가 좀 심하게 많이 온다. 번개도 이따금 친다. 엿 같은 날씨다. 몸이 무겁다. 마치 어딘가로 잠겨버리는 것 같은 감각이다.
뭔가 가라앉으면서, 뭔가 떠오른다. 아, 어딘가 망가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내 옆에 있어 그냥. 연애 같은 거 하지 말고. 연애 하면 시간 없어.”
말하면서도 나는 내가 미쳐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나는 지금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이선준은 나를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너는 내가 네 소유물이길 바라냐? 너 정신병자야? 무슨 개소리야 그게!”
그 말이 나를 자극한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번개가 치고, 곧 천둥소리가 방 안을 뒤흔든다.
“그래, 나 미쳤어! 나는 정신병자야! 미칠 수밖에 없잖아! 대체 어느 누가 나 같은 상황에서 제정신일 수 있는데! 친구가 날 강간하려고 하고! 동생이 자는 나를 성추행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날 여자가 되자마자 신나서 섹스나 하러 다니는 걸레라고 욕하는 이 상황에서 어느 누가 제정신일 수 있는데!”
설훈에 대한 이야기는 이선준에게도 처음 한다. 이선준은 내 분노에 약간 기가 눌린다. 나는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이 난다. 나는 슬퍼서 울지 않는다. 화가 나서, 분노에 치를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무데도 가지 마! 어디에도 가지 마! 내 옆에만 있어, 그냥 가만히 있어. 제발. 날 따먹으려고 하지도 말고, 날 좋아하지도 말고! 나를 사랑하지도 말고! 그게 어려워?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나는,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래도 되는 거잖아! 연애 같은 거 안 해도 죽지 않잖아! 나도 알아. 나도 내가 미친 사람 같은 거 알아! 너랑 연애는 못 하겠어. 너랑 사랑하는 거 그런 거 못 해. 이건 그냥 집착이야. 나는 너한테 엄청 집착해! 내가 그렇게 이상해?”
“그래, 이상해. 너도 알잖아? 네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
이선준의 분노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이선준은 분노를 폭발시키는 나를 전혀 동정하지 않고 있다. 그 시선은 너무나 두렵다. 나는 두려워 하면서도 소리친다.
“나도 알아! 안다고! 그래도, 그래도 한 명쯤은, 단 한 명 정도는 그래야 하는 거 아냐? 그럴 수 있는 거 아냐? 나를 그냥, 나 자체로만 대하고, 나를 비난과 폭력과 애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그런 과거의 인연이 하나 정도는 남아있어도 되는 거 아니야? 그냥 나만 바라보고 살면 안 되는거야? 친구인 상태로 계속 같이 있으면 안 되는거야? 내가 이기적이고 기만적이고 독선적인 거 알아. 하지만 한 명 정도는, 응? 너 정도는 그래줘도 되잖아. 나 때문에 연애 하는 거면 안 해도 돼. 나는 너가 내 옆에 있으면 돼. 그게 다야. 다른 아무것도 안 바라. 할 수 있잖아. 너는 그런 사람이잖아…. 으윽….”
순식간에 분노를 쏟아낸 탓에 잠깐 숨이 막힌다. 나는 숨을 고르며 가슴을 몇 차례 두드린다. 이선준은 그런 나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박헌영이랑 진지하게 사귀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솔직히 그 자식이 나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있다는 거 알고 놀랐어. 그 정도면, 솔직히 만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
그 말에 이선준은 놀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 사귈거야. 그러니까 너도 연애 하지 마. 너가 연애하는 거 싫어. 네가 다른 여자랑 손잡고 걸어다는 거 싫어. 그런 생각 하는것도 싫고 짜증나. 하지만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하고 나는 연애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미친 것 같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만나면 끝이야. 언젠가 끝나. 헤어지는 순간 부서져버리는 관계 지긋지긋해. 엄청 좋은 사람 만나도 지독하게 짓이겨져서 끝나는 거 진짜 혐오스러워. 그러니까 나는 너한테 그런 감정 느껴도 절대로 너랑 연애 같은 거 안 해.”
이선준은 기가 질린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이선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듣고 싶은 거 아니었어? 이게 내 진심이야. 거짓말 같은 건 없어. 너가 내 곁에서 일 분 일 초도 떨어져 있는 게 싫어. 진심이야. 그리고 너랑 연애 할 생각 같은 것도 없어. 이것도 진심이야. 만족해?"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이선준은 이를 악물고 말한다. 나를 때리고 싶을거다.
“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나도 알아. 나는 미쳤어. 나는 정신병자야. 나는 병들었어. 나는 미친놈이고, 미친년이야. 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너는 정상이잖아. 나를 항상 이해해주고 돌봐줬잖아. 그러니까 내 억지에 어울려줘, 부탁이야. 이렇게 원해, 우리 서로 건드리지 않는 채로…. 계속 같이 있으면 안 되는거야?”
사람은 함께 지내면 결국 닮아간다. 이선준은 결국 나의 광기(狂氣)를 이기지 못한다. 나의 빛깔에 이선준이 물들어간다. 이선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표정이 무너진다.
“미친놈, 네 안의 기준에 나를 맞추지 마.”
나는 그 말에 놀란다. 눈물에 젖은 얼굴로 이선준을 올려다본다. 애처롭게 바라본다. 이러면 혹시 용서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미 어딘가 망가져 버렸다. 이선준의 연애를 말리면서, 부정하면서부터다. 돌이킬 수 없어졌다.
“그리고, 필요할 때만 여자가 되지 마.”
나는 입술을 깨문다. 이선준의 거친 말이 내 망가진 마음을 난도질한다. 나는 시선을 피해버린다. 나는 무너져버렸다. 이선준도 무너져버렸다.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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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