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모순의 종착지 =========================
이선준은 밖에서 박헌영과 카페에서 만나 과제를 하다가 돌아왔다. 나는 집에서 과제를 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하나도 못 했다. 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내 안에서도 계속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 충돌이 생기고 있다. 모르겠다. 정말 도저히 모르겠다.
“뭔 놈의 비가 벌써부터 이렇게 오냐.”
이선준이 투덜거린다.
-쏴아아아
창 밖에서 비가 오고 있다. 봄비인데도 오는 기세가 사뭇 대단하다. 장마철이 오긴 멀었으니 그저 잠깐 오는 비일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세상을 집어삼켜버릴 것 같이 많이 쏟아지고 있다. 이선준은 잔뜩 젖은 채 들어와서 수건으로 머리를 턴다.
“너 박헌영이랑 무슨 일 있었냐?”
“왜?”
이선준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아니, 뭐 아무것도 안하고 계속 멍때리던데. 너도 없어서, 싸우기라도 했나 싶었지.”
“싸우지는 않았어.”
“뭔가 있긴 했다는거네.”
“뭐…. 있긴 있었지. 말 안 할거야.”
나는 확실히 못을 박아둔다. 상담을 해 볼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결론은 내가 내린다. 이선준에게 묻는 것은 박헌영에게 예의가 아니다. 이선준은 캐묻고 싶지는 않은지 저 할 일을 한다. 나는 이선준을 보며 무심코 묻는다.
“서혜인이랑은?”
나는 묻는다. 이선준은 나를 힐끔 보더니 말한다. 어쩐지 짓궃은 표정이다.
“나도 말 안 할건데?”
“어? 아….”
“뭐야 너, 이상하잖아. 네 일은 말 안 하면서 내 일은 궁금하냐?”
이선준의 표정은 장난치는 것 같지만 나는 뭔가에 찔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갑자기 깨달았다. 나는 지금 굉장히 이상한 말을 했다. 나는 이선준의 눈치를 본다. 죄책감이 든다.
“아, 그래…. 미안….”
나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선준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만나기로 했어.”
그렇구나, 오늘인가. 서혜인의 기나긴 짝사랑이 보답받는 시간이구나. 이선준은 발을 씻고 나오다가 바닥에 있는 상자를 본다. 내가 받아놓은 택배품이다. 그 때 찍었던 사진의 액자들이다. 나는 개봉하지 않았다. 그다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어? 이거 왔네?”
말했다시피 웨딩사진이다. 웨딩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뭔가 이상하다. 이선준이 거침없이 포장을 뜯는다. 나는 그 행동이 어쩐지 당황스럽다.
“뭐, 뭐해! 버려 그냥!”
“뭐 어때, 한 번 볼 수도 있지.”
액자는 그리 크지 않다. 책상 위에 올려놓는 크기의 그거다. 이선준은 액자를 보더니 낄낄거리며 웃는다.
“야, 너랑 나 표정 다 뭐 씹은 것 같은데?”
“아, 진짜. 진짜 보기 싫어.”
나는 책상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포장지 뜯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린다. 이선준은 액자들을 확인하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웃기를 반복한다. 뭐야, 찍는 거 엄청 싫어했으면서 왜 저렇게 좋아한대? 게다가 이제 다른 여자랑 연애까지 할 거면서 그건 대체 왜 뜯어보는거야?
갑자기 이선준이 한동안 말이 없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서 나는 고개를 들고 이선준을 쳐다본다.
이선준은 어떤 액자를 빤히 바라본 채 말을 잊고 있다. 그게 무슨 사진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이선준의 손에 있는 액자를 낚아챈다.
“내놔.”
역시나 이선준과 내가 입맞춤 하고 있는 사진이다. 클로즈업 되어 있는 사진은 내가 보기에도 잘 나왔다. 눈물과 나의 당황, 이선준의 감은 눈 같은 것들이 진짜 화보라고 해도 될 정도다. 나는 그 액자를 택배 박스에 집어넣고, 나머지 액자들도 전부 넣어버린다. 액자들이 부딪히며 거친 소리가 울린다.
“야 뭘 그렇게까지….”
“버리기로 했잖아.”
나는 그 말을 한 채 박스를 닫고 테이프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어디에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애초에 이 집에 테이프가 있었나?
“야, 하나 정도는 그냥 재미로….”
“싫어. 하나도 재미 없어.”
나는 딱 잘라 말한다. 나를 방을 분주히 돌아다닌다. 이선준도 말이 없다. 이제 이런 건 필요 없다. 있어봐야 나중에 누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한 상황만 생길 게 뻔하다. 특히 서혜인이 보게 되면 진짜 말도 안 되는 막장드라마가 펼쳐질거다.
내가 한참을 돌아다니고 있자 바닥에 뭔가 떨어진다.
-툭 데구르르
“…….”
나는 이선준을 빤히 쳐다본다. 이선준이 내게 테이프를 던졌다. 내가 못 찾으니까 대신 찾은거다. 하지만 나는 그게 이상하다. 던질 수 있다. 던져서 준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다. 그냥 준 걸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어떤 문제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선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나는 이선준을 쳐다보며 말한다.
“화 났지 지금.”
“아니, 화 안 났어.”
“거짓말 하는 거 싫어. 화 났잖아 지금.”
“내가 왜 화를 내는데? 화 낼 상황 아니잖아.”
유치하다. 이 상황 진짜로 유치하다. 내가 아는 이선준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이 맞다면 지금 화를 내고 있는거다. 그리고 이선준은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분노를 숨기며 거짓말 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 나는 이선준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유치하게 이러지 마. 왜 화 내는거야?”
“화 안 났다니까?”
“나랑 찍은 저런 사진이 소중해? 버리려고 하니까 서운한거야?”
“야, 그런 말 한 적 없어.”
“지금 온몸으로 말하고 있잖아.”
태도에서, 분위기에서, 말투에서 화난 것이 느껴진다. 둘이 찍은 사진인데 내가 너무나 쉽게 버리려 하니까 화가 난거다. 이선준은 이를 악물고 있다. 자신이 화를 내는 게 웃기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을거다.
“제발 이러지 마. 힘들어.”
박헌영 하나도 벅차다. 이선준까지 이러면 정말 힘들다. 나는 가운데서 대체 뭘 감당하라는 거야? 박헌영에 대해서 혼자 생각하는 것도 힘들다. 웃긴다. 이선준과 나는 꼭 연인들이 싸우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아무 말도 안 했고, 아무 행동도 안 했어. 너야말로 민감하게 굴지 마. 너 지금 너무 예민해.”
“꼭 말을 해야 화를 낸게 증명되는거야? 지금 태도를 봐, 엄청…. 엄청 화나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선준이 결국 침착을 잃고 소리친다. 무섭지만, 나는 이를 악문 채 외친다.
“너 주먹 너무 세게 쥐어서 창백할 정도야.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아? 내가 바보야? 내가 멍청이냐고! 일차원적으로 굴지 마! 태도에서 화난 게 다 보인다니까!”
이선준은 그제야 자신이 양손의 주먹을 세게 쥐고 있다는 걸 안다. 이선준이 손을 편다. 양손에 피가 통하며 손이 발갛게 변한다. 이선준은 체념하듯 김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 인정해. 조금…. 조금 화가 났다. 그래, 하지만 너 이상해. 그냥 친구랑 찍은 사진 가지고 있고 싶을 수도 있잖아. 친구들끼리 그런 사진 찍은 적 있냐? 없잖아. 그냥 가지고 있고 싶을 수도 있는건데 그게 뭐 대단히 큰일인 양 그러는 건데?”
“누구도 친구랑 이런 사진 찍고 간직하고 싶어하지 않아!”
나는 분노를 터뜨린다. 이선준은 지금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평소와 다르게 침착하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상황을 이상하게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나는 너무나 똑똑하게 그것을 느끼고 있다.
이선준은 지금 침착을 잃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말하면서도 계속 생각한다. 이럴 만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갑자기 터뜨려야 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홀린 것처럼 멈출 수 없다.
“이러지 말자…. 힘들어. 힘들다고, 너까지 이러면 어떡해….”
박헌영에게 감동한 게 맞다. 박헌영에게 설렌 게 맞다. 하지만 그건 박헌영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민을 해야겠다고 한 건 그 때문이다. 고민 끝에 박헌영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거기에 이선준까지 들어와 버리면 나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대체 왜 이래? 이런데 누군가 다른 사람이랑 연애를 하겠다는 것도 이상하잖아? 대체 뭐야 이게?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인거야?
“야. 설원.”
이선준이 서늘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 물러선다. 이선준은 선고하듯 말한다.
“너 뭔가 이상한 생각 하는 것 같은데, 계속 말하지만 나는 널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끌린다고 말한 적도 없어. 나는 박헌영이랑 달라.”
박헌영의 일에 대해서 이선준은 알고 있다. 나는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 같다. 이선준의 말은 얼핏 들으면 나는 너한테 아무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그 진의는 전혀 다르다.
이건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말한 적 없다고 했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게 아니다. 내게는 이선준이 그런 감정이 있지만 말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말한거다. 하지만 이선준은 계속 쏟아낸다.
“저까짓 것 버려도 돼. 얼마든지 버리고 밟아버려도 상관없어.”
“그러면 왜 화가 나는데? 설명해봐, 그 사진 얼마든 버려도 되는데 왜 화 내는데? 왜 화가 나는데? 왜 기분이 나쁜건데!”
나도 지지 않고 말한다. 이선준을 올려다보게 된다. 그 동안 이선준이랑 이야기하면서는 몰랐던 거다. 알게 모르게 이선준은 나와 이야기할 때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 분노를 터뜨리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이선준은 다시 주먹을 그러쥐며 말한다.
“원래 사람은 그래, 서로 좋아하지 않아도, 원래 사랑하지 않아도. 같이 뭔가 했는데 그걸 쓰레기처럼 취급하면 당연히 기분이 나쁘고, 당연히 서운하고, 당연히 짜증나는거야. 너는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너한테 당신한테는 정말 하나도 관심없어요 라고 열 번 말하면 기분 안 나쁘겠냐! 내가 기분 나쁘면 그 사람 좋아해서 그러는 거냐고! 네가 하는 착각은 지금 딱 그 정도라고!”
그리고 그 말은 내 다른 어떤 부분을 건드린다. 뭐야, 그렇게 심하게 말할 필요가 있는거야? 이선준은 자신의 감정을 그냥 지나가는 행인이 한 말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무슨 말이 그런데? 내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야? 무슨 비유를 그 따위로 해? 너랑 나는…. 겨우, 겨우 그런 정도로 표현할 만한 관계는 아니잖아!”
나도 말하면서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말은 뱉어버렸다. 그리고 그게 내 결정적인 실수였다. 이선준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우리는 서로를 건드리고 있다. 자극하고 있다. 얼마 전에 자존심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존심 때문에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다.
“야…. 너 진짜 가지가지 한다.”
이선준의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문득 겁난다. 이선준의 화난 모습을 지금껏 봐오면서, 이렇게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화내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너는 네가 엄청 모순적이라는 거 몰라?”
“…….”
“너는 내가 널 너무 생각하는 것 같으면 싫어하면서, 동시에 지나가는 행인 취급 하면 기분 나쁘냐? 바라는 게 뭐야? 내가 널 사랑하는 건 싫고, 너무 멀다는 식으로 말하면 오히려 네가 서운해하잖아. 너 미쳤어? 네가 진짜로 바라는 게 뭔데! 원하는 게 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딱 중간이야? 너를 사랑하지도 않고, 너를 남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딱 중간의 친구냐고!”
이선준이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마주 노려본다. 이상하다. 나와 이선준 둘 다 이상할 정도로 날을 세우고 있다.
“그래, 나는 그걸 바라, 그게 나쁜거야?”
“그래 엄청. 아주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지 않냐?.”
이선준의 독설에 나는 몸이 떨린다. 저건 진심이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왔던 진심이다.
============================ 작품 후기 ============================
마지막 파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