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97화 (97/224)

00097 모순의 종착지 =========================

하지만 박헌영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야,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내 말 다 끝나지 않았어.”

“무슨 착각을 해?”

“나는 친구랑 연애를 하고 싶은 게 아니잖아. 그럴 거면 선준이 형이랑도 연애 할 수 있지.”

박헌영의 입에서 뭔가 무서운 말이 나올 것 같다. 그리고 예상이 들어맞는다.

“나는 내 친구인 설원이랑 연애를 하고 싶은거야. ‘친구’라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설원’이라는게 중요한 거라고. 앞뒤 바꾸지 마. 전혀 다른 말이 되니까.”

음, 지뢰를 밟았군. 내 실수인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버린 물을 되돌릴 수는 없다.

“나랑 이선준이 다른 게 뭔지 모르겠어. 똑같잖아 친구라는 지점에서.”

“아니, 두 지점은 전혀 달라. 나는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 같은 성격 가진 여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들 하지 않나? 정말 잘 맞고 친한 친구가 있고, 그 친구의 성격을 가진 이성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거.”

“…이거 실례되는 질문인 건 알지만, 너 예전부터….”

“물론 아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네가 변하지 않았어도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지.”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 모든 인간의 80%는 양성애자라고,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가능성이 모든 인간들에게 있다고는 생각한다. 절대로 안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박헌영은 대체 내 성격의 어떤 지점이 좋다는 거지? 나는 내 등신 같은 성격이 싫다.

“도대체 성격 파탄자에다가 성질 더럽고, 폭력적인 내 성격의 어느 부분이 매력적이라는 거야?”

“네 그런 지점을 잘 알고 있는 그런 부분.”

할 말이 없다. 점점 말려들고 있는 것 같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말한다.

“너는 누군가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하지 않아. 선준이 형도 내가 처음에 장르문학 하겠다고 할 때 엄청 심하게 말했어. 선준이 형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랬지. 그런데 너는 내 글의 도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런 말 하지 않았잖아.”

맞다. 나는 이 학과에서 문학의 순수성 어쩌니 하면서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게 싫었다. 나도 어느 정도 그러한 대세에 편승한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을 쓰레기니 뭐니 하면서 매도하는 게 더욱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나를 인정하고, 나를 이해했어. 내가 헛소리라고 일부러 과잉된 면 보여주면 너는 내 농담 받아주거나 어울려 줬잖아. 기억 안 나?”

하긴, 예전에도 그랬고 박헌영이 그럴 때마다 욕 하고 때리기는 했지만 그것도 전부 장난이었다. 어느 정도 박헌영의 장단에 맞춰서 그랬던 것도 있다. 뭐, 등신같기는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그랬던거다. 정말 싫었다면 박헌영을 안 만났고, 말도 안 섞었을거다.

“그리고 너는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건 묻지 않잖아. 친구라는 걸 무기로 모든 걸 알아야만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랑 달라.”

때로 우정이라는 것을 무기로 상대의 모든 비밀과 과거를 알아내고,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기 싫은 건 말하기 싫은거다. 모든 걸 알아야만 친구가 되는 게 아니다. 박헌영은 그 지점에서 나와 생각이 같다. 박헌영이 말할수록 나는 녀석의 감정이 가벼운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게 두렵다. 박헌영의 말을 자르고 싶다. 하지만 내가 먼저 꺼낸 말이다. 나는 박헌영의 입을 다물게 할 권리가 없다.

“물론 너는 폭력적이고, 가끔씩 비이성적이고, 분노조절 장애도 조금 있는 것 같고, 하고 싶은 말은 무조건 해야 하고, 자책이 엄청 심해서 언제 갑자기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데다가, 이렇게 변한 다음에는 더 심해졌지. 네 자기비하 듣고 있으면 가끔씩 나도 우울해진다니까?”

“잘 나가다가 왜 시비냐?”

“그래도. 있잖아.”

내가 이를 악물며 말해도 박헌영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녀석은 웃는다. 비웃는 것 같지 않고 그저 웃는 모습이다.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박헌영이 입을 연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야.”

“…….”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진다.

“너는 사랑받을 만한 지점이 있어. 네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도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내가 이렇게 된 뒤 들은 말들 중에 가장 가슴 속에 깊게 박히는 말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울리는 말이다. 내 외모가 아름답다. 예쁘다는 말은 계속 들었다. 눈앞에서뿐 아니라 뒤에서도,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내 외모만큼은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마음에 대해서 말하는 건, 언급하는 건 처음이다. 그리고 그런 내 내면이 사랑받을 만한 지점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처음이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단순히 내가 여자가 되어서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 정도의 진심이라면, 이 정도로 나를 좋아한다면, 이 정도로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박헌영은 이 정도로 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한 휘발적 관심이 아니라 이 만큼의 진심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해 버렸다.

나는 나를 싫어한다. 나의 모순을 싫어한다. 내 성격을 싫어한다. 내 인격 자체를 부정한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고, 내 안의 그러한 지점들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걸 누군가가 긍정한다. 사랑받을 만한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 내가 정신적 동성애자가 되는거든 뭐든 좋다. 그런 것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진심을 본거다.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나 생각한다.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나 좋아한다. 그 사람이 이렇게나 나를 필요로 한다. 애정한다. 사랑한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상한 게 아니다.

내가 흔들리는 것도, 내가 반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거다.

“야, 왜 울어?”

“닥쳐…. 그, 그만 얘기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살짝 흐른 눈물을 닦는다.

“너 개새끼…. 진짜….”

“왜, 왜 갑자기 욕이야?”

“진짜…. 너 뭔데…. 꺼지라고 하려고 했는데….”

박헌영을 무너뜨리려고 하다가 오히려 내가 무너져 버린다. 심장이 뛴다.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지금 두근거리고 있는거다. 나는 그 정도로 감동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때려부수며 울부짖고 싶을 정도로 감동했다. 박헌영은 내가 우는 걸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많이 울지는 않는다. 노트북을 챙겨 가방에 넣으며 맨다.

“뭐, 뭐야. 화났어?”

“미쳤냐, 이 상황에서 화내게?”

나는 박헌영에게 쏘아붙인다.

“나쁜새끼야.”

“왜, 왜 그러는데? 욕 안 한다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굴이 뜨겁다. 아마 엄청 빨개져있을거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박헌영을 쳐다본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결국 말한다.

“진지하게 생각해볼거야.”

내 말에 박헌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된다. 전혀 기대도 안 하고 있었을 테니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오래 생각할거야. 그러니까 재촉하지 마. 알았어?”

“어…. 응….”

나는 카페에서 나온다. 하늘이 미친 것처럼 맑다. 그리고 따뜻하다. 박헌영은 아마 날 쳐다보고 있을거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간다.

-쿠르르릉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하늘이 뿌옇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곧 비가 쏟아진다.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