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모순의 종착지 =========================
토요일의 소풍은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일요일은 적당하게 보냈고, 월요일이 되었다.
키스에 관한 건은 이제 별로 생각이 안 난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신기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나나 이선준은 그런 미묘한 순간의 기억들은 없는 셈 취급하고 지낼 수 있다. 박헌영과도 그렇다. 박헌영이 고백을 했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평범하게 지낸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 일은 꿈 속에나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그래야만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선준의 사과도, 그런 행동들도 모두 그렇다. 우리는 그런 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실제로 벌어졌다. 없는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일들은 계속 쌓이게 될거다. 점점 쌓이게 될수록 그런 순간들은, 우리의 감정들은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는 수준까지 되어버릴 거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결말을 맞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선준은 서혜인과 연애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사귀는 건 아니지만, 곧 고백을 하고 사귀자고 하든, 어떻든 그런 일이 생길거다. 연애 안 한다더니, 이선준도 자기가 한 말을 전부 지키고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연애가 상당수 나로 인해 엮이는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당연히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결심을 내가 멋대로 막을만한 이유는 없다. 막는 게 제일 나쁜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든다. 나는 애매하게 행동해왔다. 짐짓 확실한 태도인 것 같으면서도 나는 어떤 여지를 주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선준이 비참하게 지적했듯 나는 순정파다. 나는 아직 누구도 선택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나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누구도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그렇게 행동한 건 명백한 잘못이다. 그리고 사랑한다 해도, 만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넘어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돈이 없다. 나를 가장 슬프고 힘들게 하는 돈이 문제다. 다른 방을 구해서 살면, 서로 부때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조금 괜찮아 질거다. 하지만 이선준에게도, 박헌영에게도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게 그래야 할 의무가 없다. 그건 더욱 나쁜 짓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냥 나한테 말하지 그랬냐.”
박헌영과 밥을 먹고 카페에 왔다. 나는 과제를 하고, 박헌영은 소설을 쓴다. 방금 전 수업을 박헌영과 같이 들었다. 이선준은 아직 수업 중이다.
카페의 창 밖은 좀 흐리다. 곧 비라도 왕창 쏟아질 것 같은 희끄무레한 날씨다.
박헌영의 밑도끝도 없는 말을 나는 충분히 알아듣는다. 그런 질문을 하기에는 상당히 늦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박헌영도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을거다. 이 말을 해야 될지,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을거다. 그래서 이렇게 좀 느지막한 타이밍에 전혀 뜬금없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짧게 답한다.
“싫었으니까 그랬지.”
“나중에 갚으면 되는 거잖아.”
“한 십 년 뒤에 받으려고?”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평범하게 취직해서 돈을 벌 것이라는 미래도 불투명하다. 박헌영은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한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그 태도가 고맙다.
“그럼 안 될 건 뭐냐?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와줬을 거라는 건 너도 알잖아.”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이 꼴이 되어서 받는 모든 호의는 불건전하게 해석되거든.”
만약 내가 변하지 않은 상태였으면 오히려 뻔뻔하게 돈 좀 빌려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박헌영은 빌려줬을거다. 갚으라는 기약 없이 빌려줬을 것이다. 박헌영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건 네가 비뚤어진 탓이고, 그리고 너 바보냐? 보증금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
박헌영의 말이 맞다. 계약 기간 끝나고 보증금만 돌려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나도 생각하고 있는 문제였다. 중요한 건 그 돈을 돌려줄 수 있냐 없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박헌영에게 손을 벌렸고, 박헌영이 흔쾌히 도와줬다는 것 자체가 나는 신경쓰일거다. 전혀 아무것도 아닌 문제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전혀 아무것도 아닌 의도로 도와준 게 아닐 수 있는거다. 내 말은 좀 이상하지만, 나는 내 생각이 맞다고 여긴다.
과거에도 도와줬을 것이고, 지금도 도와준다고 말하는 박헌영의 행동 자체는 변한 게 없다. 하지만 그 의도는 명백하게 다르다. 친구를 도와주는 것과, 신경쓰이는 사람이 곤란한 게 싫은 것과는 전혀 다르다. 박헌영에게 나는 신경쓰이는 사람이다. 나는 결국 노트북을 덮는다.
화가 난 게 아니다. 박헌영은 속된 말로 나랑 한 번 해보고 싶은 게 아니다. 그건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박헌영은 내게 끌리고 있다. 예전에는 박헌영이 나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봐서 질색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런 시선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박헌영 자신도 나를 그런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게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지점에 끌리고 있는거다. 그리고 그건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다. 전자 쪽에서 원하는 것은 나의 ‘외면’, 즉 내 몸뿐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나’의 전부를 원하는거다. 성욕의 대상이 아니라 애정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쉬운 예로 정현수가 있다. 내 외면에 혹한 것들은 자제력을 발휘해서 내게 심하게 치근거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닌 정현수는 나에게 집착하려고 했다. 내 몸을 원하는 이들과 내 애정을 원하는 이들이 취하는 행동은 전혀 다르다.
박헌영은 내 애정을 얻기 위해서 나를 도와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 녀석은 나의 애정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박헌영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던거다. 그건 박헌영의 마음을 이용하는 거니까.
하지만 뭐, 박헌영은 진짜로 애정결핍이 좀 있다. 모든 인간은 애정결핍이 있다.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내 애매한 태도가 박헌영을 괴롭히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애매하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한다. 박헌영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분명히 못박아뒀지만, 조금 더 확실하게.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선준이 서혜인이랑 연애를 하겠다고 정한 것처럼, 나도 머뭇거리는 나쁜 짓은 그만 해야겠다.
“우리 진지하게 얘기 해볼까?”
“어? 무슨 얘기?”
박헌영은 짐짓 당황한 것 같다.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사람이 꽤 있고, 노랫소리와 대화 소리에 파묻혀 우리의 말들은 들리지 않을거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얘기해버리는 편이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이 썸 타는 단계를 확 건너뛰어서 갑자기 진지하게 ‘너에게 호감이 없다.’ 라고 말해버리면 환멸을 느껴버린다. 조금 매몰차 보여도 그게 낫다. 새내기 정현수에게는 확실히 그렇게 해버렸다. 박헌영에게도 그걸 하는거다.
“너, 내가 왜 좋아?”
내 갑작스러운 말에 박헌영이 나를 쳐다본다.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다. 박헌영은 당황했는지 말한다.
“내, 내가 언제 좋다고….”
“닥쳐, 변죽 울리지 말고 얘기하자구. 단순히 내가 불쌍해서 네가 날 배려하고 도와주려고 하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 너도 알고 나도 알아. 그러니까 얘기해. 나도 성질 안 내고, 화 안 내고, 안 때리고, 소리 안 지르고 진지하게 얘기할거야. 술 같은 거 안 먹어도 이런 얘기 충분히 할 수 있어.”
“…….”
내 말에 한동안 박헌영은 말이 없다. 언젠가 했어야 하는 이야기다. 질질 끌어가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보다 한 번 충격을 줘서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 낫다. 그래서 박헌영을 더 만날 수 없게 된다 해도 그러는 편이 좋다. 무너진 다음 우리가 다시 친구로 지내든, 헤어지게 되든 뭐든 할 수 있을거다.
“서로를 이해하고, 남들한테는 못 하는 속마음 얘기하고, 심지어는 연인한테 못 하는 얘기도 같이 하는 사람이 친구잖아? 살면서 가장 필요한 거고, 솔직히 애인 없는 사람보다 친구 없는 사람이 더 불쌍하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친구라는 건 그렇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전부 친구가 있다. 그리고 우정은 애정보다 끈끈하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듯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친구다. 우정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뭐, 서준영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애초에 관계의 영속성을 생각해보면 사랑보다 우정이 더 질긴 건 보편적 사실이다.
“친구라는 건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이해하고, 다름을 감안하고 만난다는 게 전제되어 있잖아. 하지만 연인이라는 건 안 그래, 다르면 싸우고, 다른 게 틀린 게 되고, 다른 건 잘 안 맞는 게 되고, 잘 안 맞으면 헤어지는 거잖아….”
“응, 계속 말해.”
“그냥, 그럴거면 그냥 친구랑 연애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 말을 듣자 어쩐지 한숨이 나온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있어?
“야, 너랑 나랑 연애하면 안 그럴 것 같아? 애초에 친구끼리 연인하면 친구처럼 만나냐? 데이트도 하고,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그럴 거 아냐. 그럼 그 연애하는 친구끼리 네가 말한 연애의 속성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어 있어. 그냥 뭐 남자사람친구, 여자사람친구라고 하는 사람들끼리도 연애 하고 다 헤어져. 그거 다 환상이야. 연애를 하는 순간부터 친구라는 관계가 없어진다고.”
박헌영의 매니악한 취미를 생각하자 벌써부터 소름이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