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고요 =========================
나는 김밥을 꼭꼭 씹어 삼키며 말한다.
“내가 다른 인간관계를 만들었으면 좋겠어?”
“너를 모르던 사람이, 너를 지금부터 알아간다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은 있어.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너를 아니까.”
나를 이제부터 알아가는 새로운 사람이라. 뭐 있긴 있었지. 하지만 내 쪽에서 전부 쳐내고 다가가지 않았다. 몇 걸음만 벗어나도 만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을 가지고 있다. 당장 우리 과 건물만 벗어나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괜찮아 나는.”
“뭐가?”
“지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
나는 말없는 이선준을 바라보면서 계속 말한다.
“너랑 박헌영, 한정운 셋으로 충분해. 만족하고 있거든. 새로운 누군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이선준은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그런 태도, 네 아주 못된 지점이야.”
“어째서?”
“내가 왜 네 인생에 대한 조언을 공짜로 알려주냐? 알고 싶으면 돈 내놔.”
이선준은 돗자리에 누워버린다. 나도 눕고 싶지만, 치마를 입고 있는 탓에 좀 그렇다. 속바지 입고 있어서 누가 내 밑을 보는 건 낯부끄럽다. 이선준은 몸을 돌려 나를 보고 웃는다. 음흉한 표정이 뭔가 짓궃은 장난이라도 칠 것 같은 표정이다.
“그 셋 중에는 그래도 내가 제일 낫지?”
“가장 신뢰하고는 있어.”
“……욕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뻔하게 긍정해버리자 이선준은 얼이 빠진 표정이다. 어제는 이선준에게 너무 신경질적으로 굴었던 것 같다. 물론 잘못과 실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잔잔한 호수를 보며 말한다.
“그래도 너가 날 좋아하는 건 싫어.”
“너 솔직히 말해봐.”
이선준은 돗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갑자기 그렇게 나오자 나는 살짝 몸을 뒤로 뺀다.
“너 나랑 밀당하냐?”
“어? 어…. 그건 무슨 미친 소리지?”
“역시 아니지? 그냥 너 좀 모자란 거지?”
이선준의 물음에 나는 시선을 살짝 피한다. 이거 무슨 썸이야? 내가 왜 한참 알고 지낸 친구랑 밀당을 하고 썸 타는 것 같은 애매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돼?
“내가 모자라고 등신인 부분은 인정하지만, 밀당은 전혀 아닌데?”
“역시 넌 모자란 등신이야.”
“단어 선택이 점점 격해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비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부분인 것 같다만?”
내가 주먹을 들자 이선준은 흠칫 물러선다. 우리는 김밥을 마저 먹는다. 이선준은 누운 채 한 팔로 머리를 괴고 호숫가를 바라본다. 따뜻하고 안온한 토요일의 오전이다. 이런 날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리고, 이선준이 장난처럼 말했던 것들이 어쩐지 무엇보다 강한 진심으로 들려온다.
날 비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다. 나는 조금 더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야나 너라고 하면 싫어?”
“개새끼 씹새끼도 들었는데 그게 싫겠냐. 그런데 되도록이면 하나로 통일했으면 좋겠는데, 너, 야, 아저씨, 형, 오빠 뭐야? 한 사람한테 그런 호칭을 다 들으면. 나는 내가 다중인격체인 것 같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박헌영은 박헌영, 한정운은 한정운이면서 나는 이선준을 부를 때만 호칭이 뒤죽박죽이다. 내킬 때 그 때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불러서 그렇다. 나는 이선준을 잠깐 쳐다본 뒤 다리를 쭉 펴고 앉는다. 원피스 자락도 정돈한다. 이선준의 뻗은 다리와 내 다리 길이 차이가 심하다. 무슨 애랑 어른같다.
“너는 좋은 사람이야.”
“…….”
“내가 가장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고, 나를 배려해주고, 나를 위해주는 게 느껴져. 예전부터 그랬지. 내가 이렇게 되기 전에도. 나를 혼내기도 하고, 내가 힘들 때 계속 얘기도 계속 해줬잖아. 무엇보다 소설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그렇게 오랫동안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게 좋았던 것 같아.”
“음, 너 차이고 담배 피우고 질질 짜고 그랬을 땐 솔직히 좀 병신같았지.”
“닥치고 들어.”
물론 과거 얘기는 내가 먼저 꺼냈다만 헤집을 필요는 없잖아.
“엄격하고, 자기관리 철저하고, 지킬 건 지키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잖아. 대단하다는 생각도 항상 해.”
이선준은 말이 없다. 어쩐지 이선준의 표정은 좋지 않다. 싫은 말을 듣고 있다는 것 같은 표정이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하고 있는걸까?
“그래서 잃고 싶지 않은거야…. 나도.”
“아, 알았어.”
“….”
이선준이 중간에 내 말을 끊는다. 더 할 말이 있었는데 못 하게 되어버렸다.
“네 생각 뭔지 알아.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그렇지. 무시하는 게 아니라. 더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의 감정이 변하면 관계가 변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버린다. 본심을 말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이선준은 내가 힘들까봐 내 말을 그냥 잘라버린거다. 이 또한 배려다. 이선준이 나를 보며 말한다.
“무릎베개 해주면 안돼겠냐.”
“왜 박헌영 닮아가?”
“나는 그 자식 부러워.”
물론 나는 그런 걸 해줄 생각은 없다. 그리고 부럽다니?
“부러울 게 뭐야? 변태가 되고싶어?”
어찌보면 박헌영은 이선준이 상당히 혐오하는 타입이다. 항상 말해왔듯 둘이 친한 것 자체가 나에게도, 과내에서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냥, 여러가지로 부럽지.”
흠, 글쎄. 내 생각에는 박헌영이 이선준을 더 많이 부러워할거다. 따지고 보면 박헌영은 나에게 관심이 있고, 나는 이선준이랑 살고 있으니까 당연한거다. 박헌영의 대체 어디가 부럽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햇빛을 받고 있는 이선준이 지나가듯 말한다.
“미안하다.”
"밑도끝도 없이 뭐가 미안해?"
내 말에 이선준은 아무 말이 없다. 이선준이 사과할 만한 일이라면 어제의 그 입맞춤 사건밖에 없다. 그거에 대해서는 어제 끝난거다. 더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이런저런 부분에서."
"두루뭉술하게 왜 이런대?"
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선준이 이따금 잠 못 들고 괴로워한다는 걸 알고있다. 가끔 잠에서 깨면 쉴새없이 뒤척이는 소리를 듣는다. 이선준의 표정이, 안색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선준은 왜 그 밤을 뒤척이며 보내는 걸까.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그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다. 괴로운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 척 해버리면, 우리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면 안 그래도 불안한 우리의 관계가 더욱 불안해진다.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과, 아는 걸 안다고 말해버리는 것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때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모르는 척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기만이 되기 쉽지만, 어쩔 수 없이 모르는 척을 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을 끄집어내는 순간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선준의 그 변화가 단순히 나와 섹스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두렵다.
그래서 나는 이선준이 잠 못 드는 나날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불을 깨물고 최대한 숨을 죽였다. 결국 참지 못한 이선준이 나를 끌어안으려고 할까봐, 뭔가 말하려고 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선준이 잠못드는 밤에는 나도 함께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선준은 그러지 않았다. 이선준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선준이 참았기 때문에 계속 자책하고, 계속 미안해하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중시키는 기이한 관계다.
이선준이 잠 못 드는 이유가 단순한 성욕 때문이기를 바란다. 차라리 그런 편이 내게 다행이다. 애끓는 다른 감정이 섞인 탓에 그런 것이 아니기를 빈다. 그 편이 내게 덜 불행하다. 그러니까 단순히 이선준이 잠 못 드는 밤들이 단순히 주체할 수 없는 성욕 때문이기를 바란다.
이선준이 사과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선준은 자기검열이 심한 사람이다. 남들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엄격하다.
이선준은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선준은 생각 속에서, 마음 속에서 나를 몇 번쯤 벗겨냈을 수 있다. 함께 살면서, 함께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거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과하는 거다. 충분히 알 수 있다.
"괜찮아, 누구나 다 그럴거야."
나는 이선준의 중의적 사과에 중의적 용서를 한다. 우리 사이라서 가능한 대화다.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이해가 아니라 체념이다.
이 길지 않았던 동거가 점점 불안으로 치닫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선준은 내 용서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선준은 한참동안 말이 없다.
이선준이 다음에 한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서혜인이랑 사귀려고.”
“아…. 그래?”
그냥 평범하게 좋아한다고 옛날에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귄다고 말하는데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다. 나에게는 좋다. 이선준이 이제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그런 식의 고통을 받지는 않을 테니까.
“그, 그럼 내가 빨리 나가줄게. 음…. 아, 뭐 이제 집에도 보증금 구할 여력 있을 거니까.”
지금이야 서혜인이 좋아하는 거라지만, 아예 사귀는 사이가 된다면 내가 붙어있을 수는 없다.
“아니, 됐어. 걔 자취하잖아.”
“설마 거기 살려고? 사귀자마자?”
“설마 그러겠냐, 점진적으로 그래야지.”
이거 참 뻔뻔한 건지 개념이 없는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 서혜인의 행동을 보건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애초에 서혜인은 이선준이 나와 같은 방에 있으니 자기 방으로 오라고 채근이라도 할거다.
뭐, 그런건가.
나는 호숫가를 멍하니 쳐다본다.
“슬프냐?”
“그럴리가 없잖아. 미친놈아.”
나도 안다. 목소리에 별로 힘이 없다. 이선준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한다.
“깨끗하게 써라. 가끔 와서 검사할 테니까.”
“그러시든지.”
나도 마주 웃는다. 우리는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연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아니, 나를 위해선데.”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난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할 말은 없다. 너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겠지. 나는 그 선택에 어떤 강요를 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 있을거야. 다른 데 가야지.”
“아, 그래.”
나는 일어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는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던 탓이다.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돗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난다.
“어디 갈까?”
날씨가 아직 좋다. 시간은 아직 오후를 조금 넘긴 한시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해가 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자꾸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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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