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4 고요 =========================
“으응….”
일어나자 몸이 무겁다. 술을 오랜만에 마신 탓이다. 치킨과 술은 다 치우고 잤다. 별 말 없이 자리를 치우고 그냥 자버렸다. 샤워실에서 씻는 소리가 난다.
이선준의 그 싫다는 말이, 내가 신경쓰인다는 말과 동의어인 걸 모르지 않는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잠깐 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너무나 빙빙 돌려서 하는 말들이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절대로 곧이곧대로 하지 않는다.
-덜컥
“어.”
“아.”
화장실 문이 열리고 이선준이 나온다. 아무것도 안 입은 채다. 나는 그 짧은 새에 눈에 박힌 것처럼 그 광경을 인식해버린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친다.
“미, 미미미미친놈아! 왜 그냥나오는데!”
“자는 줄 알았지 뭐.”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선준이 다시 들어갈 줄 알았더니 발소리가 들린다. 방으로 나오는거다.
“뭐야, 내가 널 보는 건 이상해도 니가 날 보는 건 상관없지 않냐?”
“그게 무슨 미친소리야?”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리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남자 몸 같은 건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고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선준이 속옷을 입는 소리가 들린다.
“왜, 부끄러워?”
“이, 이, 미친 또라이….”
나는 이불 속에서 중얼거린다. 어떤 면에서는 이선준이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한다는 거니까 안심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한가? 아니다. 이건 그게 아니다.
“이건 부끄럽거나 그런 게 아니라 수치심의 문제잖아….”
“야, 그런 건 벗는 쪽에서 고려할 문제라고 보는데?”
“보는 쪽의 입장도 있거든?”
내가 버럭 소리치기 무섭게 이선준이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을 벗긴다. 이선준은 어느 새 옷을 다 입고 있다. 이선준은 머리를 수건으로 턴다.
“뭐야, 너 이런 거 바라는 거 아니야?”
“대체 어떤 미친 인간이 아침에 알몸으로 샤워실에서 나오는 친구의 모습을 바라는데?”
“이런 스스럼없음에 대한 바람이 있는 거 아니었어?”
“전혀 아니거든. 최대한 서로에 대해 예의를 지켜가면서 살길 바라거든?”
내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이선준은 피식 웃는다. 젠장, 그 따위로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하지 마.
라고 하지만 그 웃는 모습을 보니 화낼 기력이 없어진다. 열받아. 나만 신경쓰는 것 같잖아?
그리고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나만 신경쓰다니, 나는 대체 뭘 신경쓴다는거지? 나는 뭘 바라는거지? 머리가 혼란스럽다.
“너도 빨랑 씻어, 얼굴에 힘 그만주고.”
이선준이 내 다리를 툭툭 찬다. 나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털고 있는 이선준을 본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꽤 길었다. 전역한 지 좀 지났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나 씻는건 왜 신경써?”
“놀러가자. 심심한데.”
이선준의 말에 나는 좀 어이가 없어진다. 뭐야, 왜 자기 마음대로 어딜 가네 마네를 정하는거야? 하지만 나는 그러면서도 일어난다. 나나 이선준이나 웃기는 것들이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옷을 전부 갈아입고 나온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청바지에 후드티다. 덜 마른 살짝 젖은 몸에 옷이 달라붙는 게 느껴진다. 이 느낌이 나는 정말 싫다. 이선준은 나오는 나를 보며 말한다.
“너는 뭐 맨날 그렇게 입냐….”
“꼬우면 다른 여자랑 살어.”
내가 엿을 날리자 이선준은 피식 웃는다. 하긴, 같은 패션으로 색상만 다르게 돌려입는것도 솔직히 질리긴 한다. 하지만 치마 같은 걸 입기는 싫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들의 시선 때문이다.
쳐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소문 때문이다. 안 그래도 내 이미지는 막장이다. 심심찮게 뒤에서 대놓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다. 여러 문제와 사건들을 거치면서 그렇게 됐다. 뭐 그들이 하던 욕이 내가 이런다고 해서 사그라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치마를 입는 순간부터 다른 욕들이 추가되는 게 싫은거다.
입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이제 별로 들지 않는다.
“야, 이거 한 번 입어보면 안 되겠냐?”
이선준이 옷장을 뒤져 어떤 옷을 꺼낸다. 이선준답지 않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나도 점점 질려가던 참이다. 청바지에 후드티. 옷이 문신도 아니고 정말.
무엇보다 이선준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다. 박헌영이야 수십번도 더 이거 입어보면 안되냐, 저건 어떠냐 이런 식으로 말해대서 이골이 났다. 하지만 이선준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처음이다.
그러니까 그 부탁을 거절하기 싫다. 그렇게 생각한다.
“내놔.”
나는 이선준이 들고 있는 옷을 채서 화장실로 들어간다. 이선준은 오히려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놀라는 것 같다. 뭐야, 저가 시켜놓고 왜 놀라는데? 옷을 갈아입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면재질의 연노랑색 원피스는 입어보니 꽤 괜찮은 느낌이다. 흐음, 평범하게 귀엽다. 피팅해보고 산 다음 입어보는 건 처음이다. 춥지 않으려나, 화장실의 작은 창으로 보이는 바깥 날씨는 꽤 좋다. 따뜻할 것 같다.
뭐, 스타킹은 어제도 신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살면서 입을 일 없을 것 같은 옷들 어제 다 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이선준을 나를 보고 웃는다. 뭔가 흐뭇한 미소다. 상당히 기분이 나쁜걸.
“오십 먹은 아재가 딸래미 쳐다보는 것 같은 그 웃음은 뭐지?”
“정확히 맞췄는데?”
“말을 말자.”
연노랑색의 긴팔 원피스, 안이 비치지도 않고 너무 하늘하늘한 소재도 아니다. 약간 무거운 것 같은 원피스의 느낌 덕분인지, 아래가 허전한 것도 좀 괜찮은 것 같다.
“아, 속바지.”
그러고 보니 속바지도 샀다. 나는 장롱을 뒤적거려 속바지를 꺼낸다. 조금 달라붙는 핫팬츠라고 생각하면 될거다. 나는 그걸 발 안에 집어넣고 위로 슥 올려 입는다. 이선준은 나의 그 대담한 행동을 보며 놀란다. 그래봐야 치마 안쪽으로 손을 넣어서 입는거라 보이지도 않는다.
“가자.”
내 말에 이선준은 일어난다. 그쪽도 어느 새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저번에 산 자주색 단화를 신는다. 이선준은 검은색 맨투맨 셔츠에 하늘색 와이셔츠, 그리고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다. 뭐든 키가 크고 봐야 해. 뭘 입어도 옷빨이 잘 받는다. 우리는 집을 나선다.
나는 이선준이 나가기 전에 바깥을 슬쩍 훑어본다.
“어디 갈거야?”
내가 현관에서 물어보자 이선준은 어깨를 으쓱한다.
“태원공원 갈건데.”
“그럼 먼저 가, 현장에서 만나지.”
내가 무슨 암약하는 특수부대원처럼 말하자 이선준은 눈살을 찌푸린다.
“무슨 개소리야 그게?”
“아는 사람 만나면 오해받을 거 아냐.”
내 말에 이선준은 허탈하다는 듯 숨을 뱉는다.
“야, 남이 뭐라든 무슨 상관인데? 너는 원피스 입으면 안 돼?”
“그, 그래도….”
“시끄럽고 나와.”
“으앗!”
이선준이 내 팔을 잡고 바깥으로 끌어낸다. 눈이 부실 정도로 맑은 날씨다. 그리고 아주 따뜻하다. 이선준이 내 팔목을 잡고 있는 걸 보면서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이선준이 나와 닿으면, 나는 무섭거나 두렵다는 생각이 안 든다.
“으, 눈부셔.”
“봐, 사람 없어.”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혹시나 서혜인이 있을까 했지만 근처에는 아는 사람은커녕 너무 이른 시각이라 아무도 안 보인다.
“그러네. ”
하늘이 부서져버릴 것처럼 보일 만큼 맑고 푸르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싶을 정도다. 전혀 안 어울리는 생각이지만, 나는 이 맑은 하늘이 꼭 마지막 평화처럼 느껴진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처럼. 이선준은 내 팔을 잡은 손을 보더니 황급하게 놓는다.
“아, 미안.”
“성추행으로 고소할거야.”
“뭐, 뭐?”
내 장난에 이선준이 당황한다. 나는 그런 이선준을 보며 씨익 웃는다.
“빨랑 가자 어디든. 이 암울하고 축축한 동네 짜증나 죽겠어.”
내 말에 이선준은 앞장서 걷는다. 나는 뒤를 따라간다. 별로 춥지 않다. 햇살이 따뜻하다. 뭔가, 나는 이 상태와 이 느낌을 기억하려 한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취객과 행인이 버린 쓰레기가 굴러다닌다.
이 풍경도, 내 삶의 지나가버릴 어떤 순간일거다.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태원공원은 당연하게도 태원시에 있는 공원이다. 이제 곧 오월이다. 생각해보니 벚꽃 구경을 못 했다. 뭐 갑자기 난리치는 게 아니라 나는 그냥 평범하게 벚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개화 시기와 맞물려 난리를 겪었으니 꽃 같은 건 당연히 생각 못 했다.
이렇게 외출하는 거, 순수하게 놀러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항상 어떤 일이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날이 좋은 탓에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다. 이선준은 공원 매점에서 돗자리를 산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거 하려고 돗자리까지 사냐?”
“살인 진드기한테 물려서 죽기 싫으면 사야돼.”
이선준은 이따금 신앙적으로 뭔가를 믿기도 한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도 든다. 덩치에 안 맞게 웃긴 지점이 있다. 하긴 뭐, 덩치 크면 담이 크다는 것도 어찌 보면 성차별이나 다름없다. 남자니까 어때야 한다. 여자니까 어때야 한다.
항상 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살지만 항상 지킬 수 없는 말들이다. 그렇게 학습해왔고 교육받아왔으니까 당연한거다. 그래서 그런 말들이 주는 폭력에 대해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남선생이니 남의사니 하는 말 쓰지는 않지만.
태원공원은 꽤 규모가 크다. 대학가 쪽에서는 멀다. 애초에 캠퍼스 내에 공원이 있어서 학생들은 다 거길 가지, 이곳으로 오지는 않는다. 이선준도 나 때문에 굳이 버스까지 타면서 여기 온거다. 결국 내 기분전환을 시켜주려는 목적인가?
이거 참 화가 나다가도 애매하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는 애초에 공원 산책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하잖아?
나무들도 새 잎을 뽑아내고, 이제는 많이 푸르다. 이제 겨울의 흔적은 없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의 봄이다.
“김밥 먹을거냐?”
그러고 보니 아침을 안 먹고 그냥 몸만 나왔다. 이선준은 김밥을 파는 노점 앞에 멈춘다.
“김밥 두 줄 주세요.”
돗자리를 이선준이 삿으니, 김밥은 내가 산다. 김밥은 두 줄 정도면 충분하다. 음료수와 함께 랩으로 포장된 김밥을 든다. 대학가의 생활은 생각해보면 우울하다. 학교를 다니고, 어둑해지면 슬금슬금 야행성 동물처럼 사람들이 기어나와 술을 마신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울고 싸우고 난장판이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들이 자살을 안 하는게 신기하다. 뭐, 이따금 몇 명 죽던가. 하긴,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내 앞에서 자살한 사람도 이 거리에서 자살한거다.
“앉자.”
이선준이 양지바른 잔디밭 앞에 돗자리를 편다. 나는 단화를 벗고 조심스럽게 돗자리 위에 앉는다. 앉은뱅이 다리를 하고, 치맛자락으로 무릎을 덮는다. 내가 산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아는 탓에 별로 걷지도 않고 자리를 잡아버린 건가?
아니, 자꾸 배려라고 생각해봐야 좋을 것 없다. 나는 지나치게 자의식 과잉인 지점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바로 먹어?”
“그럼 먹지.”
내 물음에 이선준이 답한다. 김밥은 그냥 평범한 맛이다. 그렇게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다. 김밥은 그냥 김밥, 나는 그냥 나, 이선준은 그냥 이선준. 속으로 말장난을 해본다.
생각해 보면 그냥이라는 건 없다. 이선준도 여기 그냥 온 건 아닐거다.
“그런데 뜬금없이 여기는 왜 오자고 한거야?”
나는 김밥을 우물거리며 묻는다. 이선준도 김밥을 먹으며 음료수를 마신다. 공원 앞에는 호숫가가 있다. 호숫가에는 오리배도 몇 개 있다. 그걸 타면서 웃고 떠드는 커플도 있다. 사람이 너무 많지도, 그렇다고 너무 없지도 않은 평온한 공원이다.
“그냥, 그런 공간에 갇혀있으면 안 해도 될 생각까지 하게 되니까.”
“안해도 될 생각이 뭔데?”
“그냥, 내 삶의 부피가 딱 이만큼인 거 아닐까. 하고 두려워지는 것도 그렇고. 내 주변의 시선들이 내게 꼭 절대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렇고.”
좁은 공간, 좁은 동네에 갇혀있으면, 그 곳에 계속 있게 되면 사람 자체가 무기력해진다. 버스를 한 번만 타고 와도 이렇게 눈부신 풍경이 있다. 그리고 내 전부인 것 같았던 공간은 여기선 보이지도 않는다. 그 공간은 나에게 다가올 수도 없이 먼 곳에 있다. 버스를 한 번 탔을 뿐인데도 그렇다.
“무엇보다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보는 게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잖아.”
이선준의 그 말은 나에게 하는 것 같다. 하긴, 나랑 온 시점에서 이미 나를 위해서 온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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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끝이 멀지 않았다 제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