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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93화 (9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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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야…. 그게…….”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엎어진다. 부모님은 우리를 내려준 뒤 가셨다. 사진은 다음 주 내로 받아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있었다. 제발, 사진 필요 없다. 너무 피곤하다. 이선준은 내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피곤하니까 조용히 해.”

내 말에 이선준은 입을 꾹 다문다.

“치킨 시켜.”

“그래!”

“술이나 먹자.”

내일은 토요일이다. 이런 개막장 같은 기분에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것 같다. 카톡 알림음이 온다.

[원아, 오늘 너무 재미있었고 고맙다. 선준이랑 그렇게 오래 얘기하고 같이 있었던 것도 엄청 오랜만이었어. 엄마는 다 네 덕분이라고 생각해. 선준이 많이 부족한 아이지만 네가 좀 봐주기도 하고, 이해하면서 잘 만나길 바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나 연락하고, 나중에 또 봤으면 좋겠구나.]

정말, 너무 착한 분이라 화가 나지도 않는다. 그냥 얼빠진 상황에서 얼빠진 거짓말을 해버린 게 문제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엄마라고 칭하는 부분에서 나는 어쩐지 가슴이 찡해진다. 곧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온다. 정황상 아버지인 것 같다.

[오늘 수고 많았다. 고맙다.]

두 카톡에 전부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답장을 보낸다. 이거 진짜 어쩌지. 나 이미 이 집안의 며느리로 낙점된 것 같은데? 두 분 다 나를 정도 이상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이선준은 안절부절하며 전단지를 뒤적이고 있다.

“너는 진짜 너네 부모님 아니었으면 오늘 뒤졌어 진짜.”

“미안하다….”

나는 어쩐지 이상한 궤변으로 이선준을 협박했다. 부모님들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생길리도 없는데. 나는 치킨이 올 때까지 그대로 누워있는다.

치킨이 도착하고 이선준이 세팅을 마칠 때까지 나는 부동자세다.

“야, 치킨…. 식는다….”

“어.”

치킨과 소주, 맥주가 부려져 있다. 나는 소주 뚜껑을 따서 병나발로 들이킨다. 대체 이 상황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닭다리를 가차없이 물어뜯는다. 이선준도 보조를 맞춰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구 술을 들이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도저히 감도 안 온다. 순식간에 소주 한 병을 다 마셔버린다. 일단 취해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그 감촉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당황과, 긴장이 잊혀지지 않는다. 심장이 내려앉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저히 이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화장도 안 지웠다. 리무버도 없는데, 폼클렌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건가?

이선준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술만 마시고 있다.

“부모님이랑 운동 때문에 싸웠어?”

“어…. 뭐 그렇지.”

이선준이 문예창작과에 오는 것도 많이 반대를 한 모양이었다. 이선준은 부모님이 무슨 사업을 하는지,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시작했을 때. 계속 할거면 연을 끊느니 어쩌니 하면서 대판 싸운 모양이었다. 이선준은 집에서 모든 지원을 받지 않으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그리고 계속 이 상태인 모양이었다. 그 동안 어떻게 원룸을 구하고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뭐 개인의 고충이 있었을 거다.

생각해 보면 이선준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엄살 한 번 부린 적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대단하기도 하다. 군에 입대하고,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 이선준은 운동에는 손을 뗐다. 지금 집에서 지원을 받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전히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오늘 일로 뭔가 달라진 것 같기는 하다. 상처에 대해서 말하는 건 싫어한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말해온다면, 나도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물론 그걸 떠나서, 나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있잖아.”

이선준이 나를 본다. 속이 뜨뜻하다. 이런 얘길 서준영 이외의 사람에게 하는 건 처음이다.

“나는 내가 입양되었다는 걸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알았어.”

그 말에 이선준은 입을 살짝 벌린다.

“친척들이 나보고 뻐꾸기 새끼라면서, 파양이 어떻다는 둥 말하는 걸 뒤에서 몰래 들었어.”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나한테 잘해줘. 정말 잘해준다고. 그래도 항상 남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더라. 내가 조금만 잘못하면, 조금만 미운 짓을 하면 나를 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어.”

그런 시절이었다. 세상의 따스함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공포와 두려움부터 익혀야 했던 시간이었다. 착하지도 않은 주제에 착한 아이를 연기하면서, ‘나는 이렇게나 상냥한 아이입니다.’ 라고 자꾸 자꾸만 보여주려 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계속 말한다. 내가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의 불행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불행자랑 하는 거 완전 싫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어.”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그 일로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나는 이선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해. 많이 힘들었을 거 알아. 너의 고통과 불행이 고작 그 정도였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른 이유가 많겠지. 내가 아는 이선준은 공정한 사람이고, 그런 거에 분노하고 부모를 싫어할 정도로 글러먹은 인간은 아니니까. 그래도…. 그래도 있잖아.”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토해내듯 말한다.

“가끔은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해야만 해.”

내 불행에 대해서도, 내 처지에 대해서도. 낙관론이 결국 패배주의를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따금 감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놓치고 있는 다른 것들을 붙잡을 수 있다.

“부모님이 다시 다가오려는 시도를 멈추면서까지 지켜야만 하는 건 결국 자존심 하나밖에 없어.”

내 말에 이선준은 고개를 숙인 채 소주를 한 번 들이킨다. 자존심이란 정말 중요하다. 하잘 것 없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를 지탱하는 건 결국 자존심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중요한 때에, 굽혀도 상관없는 때에 자존심은 고개를 치켜든다. 그리고 많은 문제들은 그 자존심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 고맙다.”

이선준은 그런 말을 한다. 우리는 조금 더 술을 마신다.

“왜 그랬어?”

나는 결국 그 말을 해버린다.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해버렸다. 이선준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좋아? 아니면…. 그냥 잠깐 홀렸던 거야? 나도 알아. 내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 만큼…. 이런 말 하니까 완전 기분나쁜 자식인 거 아는데, 오늘 나 엄청 예쁘잖아.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이선준은 여전히 말이 없다.

“똑바로 말해. 내가 좋아? 나를 사랑해? 아니면 그냥 잠깐 미쳤던 거야?”

모든 것을 확실히 짚어버리고 싶다. 이선준이 나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까봐 두렵다. 박헌영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 그런 말을 해버릴까봐 두렵다. 박헌영은 죄책감을 느끼는 동시에 내게 고백했다.

이선준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안 되는 이유는 뭐냐. 대체….”

“내가 싫어.”

“그러는 너는?”

이선준은 내게 역으로 질문한다.

“너는 나를 좋아하냐? 나를 사랑하냐? 아니면 아무런 감정도 없어? 너는…. 너에게 그런 감정이 하나도 없다는 걸…. 확신하냐?”

그 말은 무섭다. 이선준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선준에게 했던 질문이 그대로 내게 돌아온다. 나는 정말 이선준을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나? 다른 어떤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그저 단순히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저 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젖어가듯, 스며들어가듯 나는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누군가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나는 이미 변했다.

이선준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너는 지나치게 순정파인 게 문제야.”

“뭐라고?”

“그럴 수도 있는거야.”

“무슨 미친 소리야 그게?”

이선준은 그깟 키스 좀 한 게 어떻냐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나는 갑자기 안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 이선준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럴 수도 있는거야. 내가 너를 좋아할 수도 있는거고, 사랑할 수도 있는거고, 아무 생각 없을 수도 있는거야. 그리고….”

이선준은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네가 그 때. 그냥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예뻐 보일 수도 있는거야. 사진이고 뭐고 없이. 그냥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러고 싶을 정도로. 그럴 수도 있는거야.”

“…….”

종잡을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고 해서, 그래도 되는 건 아니야.”

“네 말이 맞다.”

이선준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쩐 일인지 이선준은 벌써 약간 취한 것 같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피곤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뭔가에 취한건지 비틀거리며 베란다로 간다. 이선준이 담배를 피운다. 나는 이선준을 따라 나간다.

“사과해. 안 그러겠다고 말해. 앞으로 그런 짓, 생각도 안 하겠다고 말해.”

그 말을 들어야 나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입맞춤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내 인생이 비참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는 크다. 그건 아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예전이면 모르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여자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순결이니 뭐니 하는 건 나는 믿지 않는다.

변화하고 있는 관계가. 변화하고 있는 감정이 중요하다. 이선준은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친다.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본다. 나는 한동안 이선준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결국 피해버린다.

“왜 피하냐?”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말을 한다.

“대답이나 해. 안 하겠다고.”

“시선을 왜 피하는지부터 말해.”

“그게 지금 중요해?”

“상당히 중요해.”

“그럼 안 피하면 되잖아!”

나는 이선준을 노려본다. 이선준은 여유롭게, 자신만만하게, 당당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잘못은 저가 해놓고 왜 떳떳한지 모르겠다. 나는 시선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는 왜 이선준을 쳐다볼 수 없는걸까. 내가 생각해도 나는 내가 왜 눈을 피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떳떳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무엇이 떳떳하지 않은걸까. 그리고 이선준은 지금 무엇 때문에 떳떳한 걸까. 아니, 뻔뻔한 걸지도 모른다.

“너는 날 의심할 필요가 없어. 너는 지금 누구보다도 너 자신을 의심해야 돼.”

이선준은 그렇게 말한다. 나는 눈을 마주치고 있다. 이선준은 다시 한 번 내게 다가온다. 무엇을 할지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살짝 물러난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더 움직이지 않는다. 이선준은 조금만 더 다가오면 서로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멈춰선다. 나는 몸을 떨 뿐 그것을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않는다.

나도 내가 가만히 있는 이유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이선준은 입맞춤 없이 내게서 멀어진다.

“너랑 키스 정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거 없어. 나는 그래. 내가 지금까지 여자를 몇 명 만났는데.”

이선준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빤다. 이선준은 베란다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미안하다. 내가 잠깐 홀렸어. 그냥 잠깐 미쳤던 거야.”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이선준은 자신이 아니라 내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미 의심은, 의혹은 내 마음에 있다. 키스를 한 이선준이 문제가 아니다. 그 키스에 의미를 두는 내가 문제다. 입맞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거다. 하지만 내가 그걸 자꾸만 의미화한다는 건 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선준은 그 지점을 지적하는거다.

이선준이 내게 입맞춤하려 할 때, 도망치지 않는 그 지점을 말하는거다.

“내 눈 보면서 얘기해.”

하지만 나는 이선준에게 그렇게 말한다. 이선준은 내게 홀렸다는 말을,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하고 있다. 잠깐 미쳐서 내게 입맞춤했다고 말하면서 나를 전혀 보고 있지 않다.

“그게 진짜면 내 눈 보면서 말해.”

나는 다시 한 번 말한다. 언어로 학습하고 언어를 다루는 우리들은 모든 말에, 모든 행동에 예민하다. 의미화는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들어맞는다..

이선준은 말없이 담배연기를 깊게 내쉬면서 나와 눈을 마주친다. 이번에 하는 말은 진심이다.

“싫어.”

이선준은 그렇게 말한 뒤 담배를 튕겼다. 나는 그런 이선준의 행동을 보면서 느낀다.

우리는 이미 옛날과는 다른 아주 먼 곳으로 떠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점점 더 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나는 누워서 잔다. 그리고 이선준은 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선준이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 나는 이선준에게 왈칵 미안해진다. 죽어버리고 싶다. 나는 한없는 자괴감 속에서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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