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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92화 (9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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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몇 가지를 더 물었고,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집이 대전이라는 것 정도다. 아버지는 우물쭈물 하며 몇 가지를 묻는다.

“그런데…. 좀, 그렇지 않나….”

“당신은, 유럽 쪽에선 당연한 거래.”

같이 사는 부분에 대한 얘기다. 이선준하고는 뽀뽀도 안 하는 사인데 이미 같이 살고 이것저것 다 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이선준은 안절부절 못 하고 있다. 애초에 말이 별로 없으니 그나마 대답을 하는 내가 모든 질문의 타겟이다.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겠지. 오늘 이 한 몸 불살라서 이선준의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야겠다. 가족은 소중한거다. 무슨 일이 있었든, 어떤 싸움이 있었든 일단 소중하고 중요한거다. 오늘 만큼은 미친 척 해야겠다. 뭣보다 자식의 눈치를 보는 부모님은 가엾다.

“오빠 학교 다닐 때는 어땠어요?”

“학교 다닐 때? 음, 공부야 워낙 잘 했는데….”

“엄마, 좀….”

“애들을 좀 때리고 다녀서 골치였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이 잘 맞아서 이선준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 나는 상황에 맞춰 웃고, 리액션을 보여준다. 뭐야, 나 이런 거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내 자신이 스스로 놀랍다. 하긴, 군대를 무사히 전역한 시점에서 내 사회성은 이미 증명된거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이선준은 역시나 문제아였다.

“맞을만한 놈들이었다니까.”

“얘 봐, 항상 자기가 다 맞다고 한다니까?”

“좀 그런 면이 있죠.”

어머니하고 나는 죽이 잘 맞는다. 이선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나를 보며 눈을 부라린다. 나는 이선준을 보며 웃는다.

“왜? 나도 때릴거야?”

“너, 너 설마?”

아버지가 경악하자 이선준은 덩달아 놀라며 외친다.

“아,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제가 미쳤어요?”

“휴우, 나는 또….”

이선준의 부모님은 좋은 사람들이다. 말투와 행동에서 느껴진다. 내게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한다. 두 분 다 말하기 전에 세 번은 생각은 사람이다. 이런 부모와 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일단 동거하고 있는 여자라는 지점에서 편견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런 것도 없다. 게다가 초면인 어린 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일 리가 없다.

나는 다 못 먹고 남긴다. 샐러드바는 무리야….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어머니는 나와 이선준을 번갈아 보며 말한다.

“너도 연락 좀 하고, 얼굴 잊어버리겠다.”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밖에서 좋은 사람이 꼭 안에서 좋은 자식인 건 아니다. 안에서 좋은 자식이 바깥에서 꼭 좋은 사람인 건 아니다. 사람은 원래 가족을 대하는 태도와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이선준이 올바른 사람이고 공정한 사람이라 해서 가족들에게도 꼭 그런 사람인 것은 아니다. 물론 이선준이 어떤 아들인지 나는 모른다.

“저기 설원 학생.”

“아…. 편하게 부르세요.”

“혹시 연락처 알 수 있을까?”

“연락처는 왜?”

어머님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이선준이 제지한다. 어머니가 시무룩하게 꺼냈던 핸드폰을 다시 가져간다. 아버지도 뭘 그러냐는 듯 어머니를 제지한다. 나이도 꽤 있으신 것 같은데 나는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꼭 작은 동물이 시무룩해 하는 것 같다.

“괘, 괜찮아. 괜찮아요 어머님.”

어머님이라니, 이상해. 그렇다고 해서 아줌마라고 할 수도 없잖아. 사모님은 더 이상해. 그냥 다 이상하면 편하게 부르는 게 좋다.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라고 부른 게 신기한지 큰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나는 핸드폰을 받아서 연락처를 찍어드렸다. 이선준은 나를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보고 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점점 모르겠다.

“여보, 어머님이래!”

어머니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웃는다. 그렇게 기뻐할 일인가? 아버지는 나를 잠시 쳐다보고는 이선준을 보며 말했다. 너무 건조한 어투라서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날짜 잡자.”

“에?”

“무슨 소리에요 그게!”

갑자기 텐션이 확 올라간 아버지를 만류하는 데에 이선준이 진땀을 빼야 했다. 아버지는 이선준에게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할 일 제대로 하는 놈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비식비식 웃더니 말했다.

“어휴, 부러워서 그러는 거 봐. 원아. 이이도 아버님이라고 한 번 해줘.”

“네, 네? 아…. 아버님?”

아버지의 표정은 평범한 것 같지만 묘하게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명확히 느꼈다. 이선준이랑 같은 타입이다. 표정에 감정을 잘 안 드러내지만 확실히 기뻐하는 게 보인다.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상견례는 언제….”

“왜 이래요 진짜!”

이선준이 어이가 없어서 폭발했다.

“그나저나 뭐 할 말 있으시다면서요?”

“자식이랑 할 말이 어딧어 얘는? 그냥 잘 사나 보려고 온거지.”

어머니의 말에 이선준의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무슨 중대한 용건 이런 건 결국 없었다. 이선준은 속된 말로 낚인 셈이었다. 나도 뭔가 제대로 말려들어갔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그냥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저, 진짜 괜찮아요. 맛있는 것도 사주셨는데….”

“맞아, 부담 주지 마.”

“어떻게 처음 만났는데 그러니. 예의가 아냐. 뭐라도 하나 해 줘야지.”

“저, 정말, 정말 괜찮은데요.”

어머님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 줘야 마음이 편하겠다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갑작스럽게 뭔가 어마어마한 예물 같은 거라도 받아버리면 정말 빼도박도 못 한다. 거짓말의 결과로 그런 걸 받아버리면 안 된다.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나를 정말 예뻐하고 좋아해주시는 건 좋지만 그런 걸 받을 수는 없다. 이선준은 거의 반쯤 패닉상태다.

“저…. 진짜로 괜찮아요. 나중에 만났을 때 주시면 안될까요?”

“뭐 사러 가는 거 아니니까 괜찮아.”

아버지의 말에 나는 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러 가는 게 아닌데 선물이라니? 대체 뭐지? 순식간에 태원시를 벗어나 서울로 진입하는 걸 보며 나는 뭔가에 말려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나도 뭐 하나 덜컥 안겨주면 부담되는 거 똑같아. 너희들은 너희들 나이 때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나도 젊었을 때 그런 거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쉬워.”

“대체 뭐 말하는 거에요?”

“가 보면 안다.”

이선준도 도저히 감이 안 오는 모양이었다. 나도 전혀 모르겠다. 뭘 사주는 게 아니라니까 싫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다. 이래서야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다.

“우리도 얼마 전에 해봤는데 옛날 생각 나고 좋더라.”

어머니의 그 말에 나는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은 어떤 스튜디오였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상호명이야 뭐 어쨌든 중요한 건 여긴 뭘 사는 데가 아닌 건 명확하다.

여긴 뭔가를 찍는 곳이다. 어머니가 텐션이 확 올라서 말한다.

“이런 사진 하나정도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니?”

웨딩카페다.

누가 날 후려쳐서 기절이라도 시켜줬으면 좋겠다. 이선준도 나랑 별로 다를 것 없는 표정이다.

이선준은 안 된다고 바락바락 우겼지만 명분이 없다. 사귀는 사이라면 이걸 해준다는데 굳이 안 할 이유가 없다. 이제와서 사실 우리는 친구고, 저는 그냥 여차저차해서 같이 사는 동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할 수도 없었다. 지뢰를 제대로 밟았다. 나는 당장 할복이라도 할 것 같은 이선준을 보며 속삭였다.

‘찍는 건 그냥…. 그냥 찍고, 사진은 갖다버려. 그러면 되잖아.’

‘미안하다. 진짜. 진짜. 나 죽여도 돼.’

결국 나는 그 지점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드레스 이거 어때?”

“네? 아…. 예쁘네요.”

“이것저것 다 찍어봐. 이거 나중에 다 추억이야.”

어머니는 얼마 전 아버지랑 같이 리마인드 웨딩촬영을 한 모양이다. 요즘 그게 유행이라던가. 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다 정말. 어머니가 고른 드레스는 내가 보기에도 괜찮았다. 게다가 여긴 미용샵도 겸하고 있는지 나는 드라이까지 받았다. 메이크업까지 받는다.

고역이다. 움직이지도 않고 장장 몇 시간을 앉아있었던 건지 기억도 안 난다. 벌써 밤이다.

“어머, 드레스 안 입어도 예쁘네.”

머리랑 화장을 끝내자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하며 감탄한다. 감정이 정말 풍부한 분인 것 같다. 사람들이 와서 드레스를 입혀준다. 이거 진짜….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다. 처음 입은 건 어깨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다. 대체 내가 왜?

이선준은 검은 턱시도를 입고 있다. 스튜디오로 들어가자마자 이선준과 눈이 마주친다.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한 상태다.

“…….”

“…….”

우리는 서로 입꼬리에 경련을 일으키듯 웃고 있다. 사진사는 나와 이선준을 보며 씨익 웃는다.

“이야, 정말 선남선녀들이시네. 어떤 컨셉으로 갈까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그 와중에 이선준은 나에게서 시선을 못 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멀찍이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다.

‘자꾸 쳐다보면 눈알 확 파버린다.’

‘!’

내 섬뜩한 경고에 이선준은 전방주시 상태로 바뀌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나는 좀 심각하게 예쁘다. 화장도 처음 했고, 이런 옷 입은 것도 당연히 처음이다. 이선준이 놀라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화장이라는 게 진짜 중요한 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좀 웃으세요. 안 좋은 일 있으세요?”

가식적으로 웃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 상황이 정말 미쳐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뭘 그렇게 긴장해. 그냥 평범하게 해도 돼.”

평범하게 친구랑 웨딩사진 찍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속으로만 그렇게 말하고 계속 사진을 찍는다. 셀카도 맘껏 찍어보라는 말에 우리 둘은 한 마음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드레스를 몇 벌이나 갈아입는다. 마지막 촬영일 때. 나는 미니스커트 비슷한 흰 드레스를 입었다. 이게 진짜로 마지막이다.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얘네 쑥맥이네. 뽀뽀도 좀 하고 그래라.”

“네, 마지막 사진은 가볍게 키스하는 걸로 갈게요.”

“!”

“아, 안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부끄러워?”

“그, 그게 아니잖아요!”

차라리 죽여줘. 이선준이 격하게 거부하자 어머니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는지 마지막 사진은 꼭 키스하는 걸로 하라며 부득부득 요구하셨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어쩐지 서럽고 억울하다.

이선준은 나를 쳐다본다. 그냥 아무렇게나 찍고 도망가고 싶다. 이선준과 내 눈이 마주친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아 망했다. 진짜 눈물 날 것 같다. 눈가에 물기가 차오른다.

나는 느꼈다. 이선준은 나를 보고는 어쩐지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잠깐, 너 아무래도 이상한데. 진짜 이상한데.

이선준이 내 얼굴을 감싸쥐고 반응할 새도 없이 들어온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대로 당해버린다. 아주 잠깐이다. 입술이 맞춰지고, 내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번쩍! 하고 플래시가 터지는 것도 그 순간이다. 뭐야 이거, 이거 무슨 영환데?

“이야. 그림 예쁘게 잘 나왔네!”

사진사가 감탄하고 나는 그대로 얼어버린다. 이선준도 입술을 황급히 떼며 얼어버린다. 자기가 한 짓을 자기 스스로도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이다. 나는 누가 부르건 말건 아무 말도 못 한 채 가만히 있는다.

============================ 작품 후기 ============================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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