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전조 =========================
나는 내 부모님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해본 적이 없다. 이 사람들은 집에서 알프스 만년설 녹인 물 같은 거 먹을 것 같다고.
“펴, 편하게 있어요…. 괜찮으니까.”
어머님 쪽이 내가 식은땀까지 흘리자 말한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묻어난다. 뭔가 아침 드라마처럼 ‘어쩜 너 같은 애가 우리 선준이를?’ 이런 느낌은 전혀 없다. 하긴, 솔직히 그런 쪽이 미친년이지.
“아, 아뇨. 편해요….”
나는 한사코 고개를 젓는다. 물론 내가 이 두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애초에 나는 여자친구도 아니고 이선준과 미래를 약속한 약혼자를 배반하고 만나는 진실된 사랑 같은 것도 아니다. 그냥 엎어져서 자도 나한테는 하등 문제될 게 없다.
“얘는 대체 어디서 뭘….”
아버지 쪽이 헛기침을 하며 곤란해한다. 이 부모님들은 척 보니 연락도 안 하고 온 것 같다. 게다가 이 시간이면 학교에 있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나는 이선준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한다. 어머님 쪽은 내 눈치를 슬슬 보더니 어렵게 입을 연다.
“그…. 얼마나 됐어요?”
“네, 네? 아….”
이걸 대체, 아니라고 해야 하나? 맞다고 해야 하나? 맞다고 하면 대체 며칠? 몇 달? 햇수 단위로 말해야 하나?
“그…. 조, 좀 됐어요.”
얼버무려버린다. 젠장. 빼도박도 못하게 연애한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안 사귀면서 동거하는 사이가 되는 것보단 거짓말을 해버리는게 낫다. 낫겠지? 누군가 제발 낫다고 해줘.
다시 정적.
어머니 쪽은 살풍경하게 정리된 방 안을 슥 둘러본다. 이선준의 성깔 통에 나도 정리병 비슷하게 된 참이다. 환기도 엄청 자주 해서 먼지도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청소는 잘 하고 사나보네. 이거 설마 다 학생이….?”
“아, 아뇨. 같이…. 해요….”
“그럼, 시대가 어느 땐데 당연히 그래야지.”
어머니의 말이다. 아버지 쪽은 창 밖만 보고 있다.
“얘는 멀대같이 키만 큰 녀석이 연애도 한 번 못하고 죽을 줄 알았더니.”
글쎄요. 뭔가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우리 과에서 연애 제일 많이 한 사람으로는 역사적으로 손에 꼽는 사람인데요? 뭐 그건 굳이 내가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다. 원래 자식들은 항상 못나 보이거나 항상 잘나 보이는거다.
그러니까 좀 알게 되는 게 있다. 이선준은 부모님이랑 평소에 연락을 잘 안 한다. 그리고 자기 얘기도 거의 안 한다. 사이가 안좋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계속 전화를 거는 중이다. 그제야 이선준이 전화를 받는다. 내가 움찔하자 부모님들 쪽도 움찔한다.
[왜, 뭔 일 있냐?]
“아…. 그게…. 부모님 오셨는데….”
[어, 그게 왜?]
이 자식,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부모님이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얘기로 들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고민된다. 이선준을 너라고 표현하면 기분 나쁘려나? 뭐지? 뭐라고 해야 하는거지?
“아니 나 말고….”
[뭐가, 무슨 소리야?]
“그…. 오빠…. 부모님들…. 오신 것 같은데.”
[어? 어, 알았어.]
이선준은 그 말을 한 뒤 곧바로 전화를 끊는다. 내가 마지막에 왜 오빠라고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정신이 없어서 오락가락 하는 기분이다. 전화를 끊자 부모님들이 덩달아 긴장을 푼다. 어쩐지 이 부모님들은 이선준을 좀 겁내는 것 같다. 설마 뭐 패륜아 그런건가? 이선준 성격에? 그럴 리는 없는데.
“그, 동생이에요? 선준이보다?”
“네? 아…. 동기에요. 그…. 재수 해서….”
“아, 그렇구나.”
“마,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아 그, 그래….”
어색함이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불현듯 든다. 진짜로, 나 이러다가 죽는 거 아냐? 다행히 전화를 끊고 오래 지나지 않아 계단을 쿵쾅거리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거칠게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덜컥 열린다.
부모님들이 엉거주춤하게 일어선다. 나도 덩달아 일어난다. 이선준은 얼마나 뛰어온건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연락도 안 하고 오시면 어떻게 해요?”
이선준은 명백히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다. 나와 살짝 눈이 마주친다. 이거,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이선준이 의문의 시선을 내게 보낸다. 나를 뭐라고 소개했느냐는 것이 궁금한 모양이다. 나는 뒤편에서 안 보이게 살짝 엄지와 검지를 교차해 하트를 만들어 보인다. 뜬금없이 애정표현이 아니라 뭐 연애하는 사이 정도의 급조 사인이다. 이선준은 알아들은 건지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들은 거 맞지?
“연락을 받아야 하지, 집에도 통 안 오면서.”
아버지가 짐짓 화난 목소리로 말한다.
“부모님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건 실례죠.”
이선준은 놀랄 정도로 차갑게 말한다. 뭐야? 왜 저렇게까지 말하는거지?
“뭐 그건 됐고, 우리도 너 보고 농담이나 하자고 온 거 아니다.”
뭐지 이건, 집안의 후계자 분쟁에 끼어들어야 하는 재벌 2세의 뭐 그런건가? 다른 세계 얘기군, 자빠져서 잠이나 자고 싶다. 조금만 더 여기 있으면 열등감이나 부담 때문에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몰라.
“뭔데요? 빨리 하고 가세요.”
“너는 오랜만에 엄마 아빠 만나서 그런 얘기밖에 못 하니? 밥이나 한 끼 먹으면서 얘기할 수도 있잖아.”
“밥 아까 먹었어요.”
“그러면 너는 구경해. 나는 저…. 그, 저 친구 밥이나 한 끼 사줘야겠다.”
아버지가 곤란해하며 말한다. 아뇨, 괜찮아요. 오늘 하루 굶어도 되니까 이만 어디론가 가주세요. 아니면 제가 나가도 괜찮아요. 그 말에 이선준은 안색이 더욱 굳으며 말한다.
“곤란해 하잖아요. 그럼 제가 갈 테니까 쟤는 두고 가요.”
“선준아. 그래도 이렇게 만났는데 식사는 한 번 해야지.”
어머니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내가 보기에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뭐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만, 나를 엄청 어려워하는 태도만 봐도 그건 대충 느껴진다. 이선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지만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애원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강압과 폭력에는 반발심이 폭발한다. 반면에 저런 불쌍하고 애처로운 표정에는 상당히 약하다. 얹힐거야, 분명히 얹힐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 저는 괜찮아요.”
결국 그런 말을 해버린다. 이선준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결국 도착한 곳은 인근의 빕스다. 뭐 더 대단찮은 곳에 가려는 것을 이선준이 제지하며 가장 가까운 곳을 제안한 탓이다. 정말 그냥 놔두면 곧장 서울의 유명 호텔로 직행할 기세였기에 나에게도 다행이다. 이런 차도 처음 타본다. 흔히 말하는 사장님 차다. 이선준은 나를 볼 때마다 죽을 죄를 지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쓰게 웃을 뿐이다.
이렇게 된 거 즐기는 수밖에 없다.
“너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왜 말을 안 했어?”
어머니가 장난스럽게 말했고, 이선준은 창밖을 보며 말한다.
“이상한 거나 물어볼 게 뻔한데 뭣하러 말해요?”
“내가 무슨 이상한 걸 물어? 그냥 성격 잘 맞고 서로 좋아하는 거나 궁금하지.”
“퍽이나 그러시겠네요. 결혼은 조건 맞춰서 하고 연애는 다른 데에서 하라면서요?”
이선준의 말에 가족 전부가 경악한다. 아버지는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잠깐 밟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당황하며 말한다. 뭐, 뭐야. 어머니의 개방성이 이상한 수준까지 올라가 있는 거 아냐?
“야아,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당신…. 설마?”
“너 농담이 늘었다 정말.”
이선준은 창문을 보며 피식 웃고 있다. 아, 깜짝 놀랐다. 이거 농담이다. 무슨 무지막지한 말을 들어도 전부 사실일 것 같다. 뭐 얼마나 부자인지는 모르지만 부자들이라는 건 항상 기사 태우고 다닐 줄 알았는데, 운전대를 잡은 모습을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빕스에 도착해서 우리는 내린다. 솔직히 내 선입견이 심했던 건가 싶다. 상류층들은 이런 걸 보며 ‘흥, 서민 식당 같으니라구.’ 이럴 줄 알았는데. 하긴 뭐, 이 사람들도 밤에 할 일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려나. 부모님들이 먼저 식당에 들어가고, 나는 이선준과 함께 걸어가며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찌른다.
“너, 이 좌파 부르주아 자식.”
“미안….”
우파 프롤레타리아트보다 악질인 좌파 부르주아가 이선준의 실체였다. 전자는 단순하게 멍청한 거지만 후자는 기만자다. 이선준은 죽으라면 죽을 것 같은 표정이다.
“됐고 뻗대지나 마, 내가 다 울렁거려.”
“그래.”
집안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내 앞에서 싸워대면 진짜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다.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선준이 살갑게 나가주는 편이 내게 좋다.
테이블에 안내된 우리는 각자 메뉴를 주문한다. 애초에 샐러드바가 중요한 건데 메뉴를 하나씩 시킨다. 음, 애초에 안 그러지 않나? 모르겠다. 나도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데는 그렇게 자주 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이선준은 공격적 말투를 접고 말한다.
“아니 그냥, 얼굴도 보고 그럴 겸. 그런데 좋은 걸 봤네?”
“오길 잘 했어.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나마 제대로 하는 건 하나 있었네.”
어머니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정말 미인이시네. 나도 마주 웃는다. 처음에야 엄청 어색했지만 이선준이 와서 그런지 어머니는 내게 아주 살갑게 대한다. 어머니는 내가 상상했던 상류층 사모님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서글서글하고 밝은 인상이다. 상냥하고 따뜻한 태도다. 아버지도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결국 칭찬이다.
여자 하나 잘 만나서 모든 것이 무마되는 아들의 방종인가? 딱히 내가 뭘 한 것 같지는 않다만. 예뻐져서 감사해야 되는 부분이겠군. 이선준은 인상을 팍 쓰더니 말했다.
“전부 제대로 하고 있거든요?”
“등단은?”
“…….”
너무해. 결과론적으로 말해야 한다면 문창과 사람들은 전부 자살해야 한다. 법대생한테 사법고시 패스 못했다고 뭐라고 하는거랑 똑 같은 거라구.
“당신은? 오랜만에 만나서 왜 그래?”
“아, 음, 그래. 미안하다.”
아버지는 순순히 사과한다. 이 집안 권력은 어머니에게 편중되어 있군. 바람직한 가정이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둘 다 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표정이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다. 뭐가 물어보고 싶은건지 뻔히 알 것 같다. 침묵이 길다. 이선준도 대답을 안 한다. 이런 말은 내가 하면 안 되는 거지만, 나는 결국 말해버린다.
“이제 그거 안 해요.”
“휴우….”
“하아….”
이선준에게 원했던 대답이 나에게서 나오자 두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운동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무조건 반대하고픈 일일 것만큼은 분명하다. 대충 윤곽이 잡힌다. 이선준이 학생운동을 하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반대했을거다. 그 때문에 무슨 다툼이 있었고 지금까지 쭉 이어졌을거다.
이선준을 나를 잠깐 쳐다봤지만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다. 솔직히 기분나빠할만한 일인 것 같은데. 뭐 결국에는 해야 할 말이었으니까 이선준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이선준은 내 무릎에 손을 얹는다. 나는 조금 놀라지만 그 의미는 느껴진다.
고맙다는 뜻이다.
식사가 나온다. 스테이크다. 뭐 나도 칼질은 좀 해봐서 못 먹는 음식은 아니다. 사실 고기랑 똑같은 거잖아?
내가 가려운 데를 긁어준 탓인지 나를 보는 두 분의 시선이 눈에 띄게 호의적이다.
“이름이 뭐니?”
“아, 서, 설원이요….”
“설원? 외자구나?”
“네.”
“이름 예쁘네. 이름이랑 잘 어울리네.”
어머니의 말에 나는 바보같이 웃는다. 웃기는 일이다. 다른 얼굴로 오랫동안 살았는데 이렇게 된 다음 얼굴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