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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90화 (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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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잖아요. 당연히.”

“아니, 농담이라는 말이 농담인 것 같은걸.”

“학습의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왜?”

“없던 통찰력이 생기셨잖아요.”

“이게?”

한정운과의 대화는 묘하게 선문답 같은 면이 있고, 맥락 없이 주제가 휙휙 바뀐다. 결국 서로 아무 소리나 주절거리는 건데, 나는 그런 대화가 묘하게 즐겁다. 한정운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한다.

“요즘 어때요?”

“뭐가 어때?”

“이선준 선배랑 같이 사는 거요.”

“내가 보고해야 하는거야?”

“말하셨던 것처럼, 저는 호기심이 강한데요.”

내가 했던 말로 나를 묶는다. 이 자식 역시나 보통이 아니다.

“어떨 게 있나? 그냥 같이 사는거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너무나 건조하게 잘 지내는데. 근친상간 같은 질척한 외줄타기 로맨스는 없다고.”

과내연애는 곧 근친상간이다. 내 직설적인 말에 한정운은 피식 웃는다. 한정운은 거의 단언에 가까울 정도로 나를 걱정했다. 이선준이 나를 사랑하고 말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나와 이선준 둘 다 큰 상처를 받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나는 어쩐지 짓궃어져서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이선준이 밤마다 나한테 끈적하게 달라붙어서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농밀한 밤을 기대했냐?”

“장난 치고는 표현이 디테일한데요. 그런 밤을 보내본 적 없는 사람한테 좀 너무하시네요.”

연애경험 없다 했으니 한정운은 말 그대로 풋풋한 자식이다. 진짜 이 자식은 야동을 살면서 한 번도 안 봤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한정운이 그런 걸 본다니, 스탈린이 맥심을 보는 걸 상상하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선배는 연애를 좀 했죠?”

“뭐, 그렇지.”

원래 모든 연애는 좋게 끝나지 않는 법이다. 좋게 끝난 사이라면 아쉬움이 없었다는 뜻이다. 아쉬움이 없었다는 건 절박함이 덜했다는 뜻이다. 절박하지 않다는 건 애초에 서로가 없어도 된다는 뜻이다. 없어도 되는 사람끼리 만나는 걸 나는 연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전 서영하를 만났을 때 서로 못 볼 꼴 보여주면서 비난전을 펼쳤다. 연애의 말로가 이 따위인 것도 정말 웃기다.

“지금 그 사람들 만나면 어떨 것 같아요?”

“상당히, 매우, 어마어마하게 끔찍할 것 같은데. 실제로 끔찍했고.”

“어, 만나셨어요?”

“소문 안 났던? 서영하랑 내가 서로의 치부를 들춰가면서 비루먹은 인간들마냥 싸운 거?”

하긴, 서영하의 완패인데다가 커피를 남한테 투척하는 지랄까지 했으니 본인이 소문을 냈을 리가 없다.

“뭘 굳이 싸우기까지…….”

“내가 이 모양이 된 걸 아주 기뻐하는 것 같길래. 내가 그년보다 더 예뻐졌다는 걸 상당히 과시해줬지.”

“못난 사람이네요 정말…….”

“보태준 거 없으면 닥쳐.”

그것도 복수라면 복수일 수 있을까? 원래 복수라는 건 더 나은 상대를 만나거나 상대의 다음 연애에 해코지를 하는 정도일거다. 나는 너보다 예뻐졌다구! 이게 무슨 복수야. 복수라고 하려면 내 서영하가 썸 타는 남자를 내가 꼬셔서 낚아채는 정도가 복수일거다. 그리고 내가 그런 짓을 하는 순간 그건 복수가 아니라 코미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쪽이 상당히 통쾌할 것 같기는 하네.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애?”

거기에 대한 내 해답은 명확하다.

“전혀 할 생각 없지.”

“왜요?”

말했듯, 나는 몸의 문제 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제도 있다.

“그걸 왜 말해줘야 하는지 싶지만, 뭐,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누굴 좋아한다고 해도 연애 같은 거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 나는 좀 상대를 피곤하게 하는 타입이거든. 지극히 예민해.”

이런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점에서 나는 조금 나은 인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애정을 갈구하는 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상당히 예민하다. 상대가 잡은 손을 조금 거칠게 놓아버리면 화 났냐고 묻는 타입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나도 이런 내가 끔찍해. 하지만 나는 그걸 못 참는다구. 내 과거 때문에 내 이런 성격을 정당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랑 만나든 필연적으로 상처를 줄 수밖에 없어. 어차피 오래 못 가 서로 싸우고 헤어질거면 연애는 안 하는게 맞지. 그리고 나는 감정 상해서 싸우고 그러는 거 끔찍해. 진짜 소름끼칠 정도야.”

“고치면 되잖아요.”

“음, 그게 되면 모든 사회, 경제, 정치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버릴 수 있을텐데? 고치면 되잖아라니.”

물론, 내 대답은 어느 정도 패배주의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불필요한 순간에 기분나쁜 과거와 마주할 생각은 없다. 한정운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나는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 내가 연애를 하는 순간 LGBT중에 뭐가 되는거야?”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그 네 범주 중 무엇에 속하는걸까?

“그것보다 일단 선배의 젠더부터 정의해야겠죠. 시스젠더 남성(Cisgender)에서 안드로진(Androgyne)으로 젠더가 옮겨간 거라고 봐야겠죠?”

“갑자기 젠더학 강의가 되는 것 같은데? 나 살짝 질릴 것 같아.”

아는 개념이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건 아니니까 겁부터 난다. 한정운은 나를 보며 말한다.

“애초에 젠더와 섹스가 일치하는 상태였으니까 시스젠더 남성이었죠. 하지만 지금 선배는 자신이 남성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그렇다면 여성인가요?”

“그것도 아니지.”

“하지만 선배는 젠더 정체성에서 벗어난 에이젠더(Agender)도 아니죠.”

뭔가 기묘한 것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나는 더듬더듬 기억을 뒤적거려 그런 단어들을 찾아본다. 시스젠더는 과거의 나다. 나는 남성이었고, 내가 남자라고 생각해왔다. 안드로진은 양쪽의 젠더를 다 가지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중성 혹은 양성을 뜻한다. 에이젠더는 젠더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곧 남자 여자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이건 중성이나 양성하고는 다르다.

안드로진이라, 뭔가 휴머노이드 같은 느낌인데, 기분이 좀 이상하다. 하지만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라니. 그거 완전 나잖아.

“그런 걸 정의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시스젠더니 안드로진이니 젠더퀴어니 하는 것들 말야. 조금 더 구체적이고 학술적으로 내가 좆됐다는 걸 확인할 뿐이잖아? 음, 정확히는 좆 된 건 아니지만.”

그게 빠졌다는 표현이 옳겠지. 그렇게 말하니까 더욱 우울해진다. 한정운은 내 반응을 보더니 웃는다.

“뭐, 선배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는 궁금하네요.”

“결국 내가 시스젠더 여성이 될 것 같냐?”

“그거야 모르죠.”

나는 여성 쪽에 더 무게를 둔 안드로진, 혹은 이상하게도 후천적인 시스젠더 여성이 된다는거다. 시스젠더라는 말 자체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성과 관련된건데. 나는 왜 둘 다 경험해야 되는거야? 진짜 말도 안 된다.

한정운과 몇 마디 더 하고 카페에서 일어난다. 결국에는 농담따먹기나 하다가 끝난 것 같다. 전부 내 근성 부족이다. 또 책을 한보따리 받아온다. 마음의 양식이라더니, 마음의 짐이다 솔직히. 그리고 실제로 무겁다.

방으로 돌아가자 이선준이 책을 보고 있다. 의자에 앉아서 정자세다.

“한정운이랑 있었어?”

“그럼.”

신발을 벗고 들어온다. 나는 화장실에서 손발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선준이 뭐 하다 왔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좀 이상하다. 내가 분명 예민한 것도 있지만, 묘하게 추궁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선준은 정말 나에게 어떤 종류의 소유욕 같은 걸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걱정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친하게 지낸 건 일학년 때부터다. 이선준이 운동을 할 때, 나는 전면에 선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도왔다. 박헌영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게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박헌영 같은 녀석이 잘 한 거라고 본다. 나는 친구가 하자니까 했다. 좀 줏대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들어도 변명할 말이 없다.

뭐 그래도 나는 그 기치 자체에는 동의했다.

뭐 그런 말을 하려는게 아니라. 알고 지낸게 이제 슬슬 사 년이 넘어간다는거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나는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박헌영이나 이선준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도 이선준이 집안 사정에 대해서 항상 숨기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 친구라면 모든 것을 공유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관계가 싫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서로의 불행을 공유하며, 마치 내가 더 불행하다는 것이 자랑이 되어버리는 그런 무의미한 시간들이 싫다.  불행에 취하면 걷잡을 수 없다. 불행을 불행이라 말하는 이들은 사실 행복하다. 그래서 자꾸만 상처를 헤집으며 고통에 취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고통을 공유하지 않는다. 일부러 꺼린다. 그게 크게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내 몸은 이렇게 되어버렸다. 친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 만약 있었다면 바이러스 감염과 동시에 전부 증발해버렸을거다. 이제 어디에도 나의 뿌리는 없다.

이선준에게는 이선준만의, 박헌영에게는 박헌영만의, 한정운에게는 한정운만의 고통이 있을거다. 뭐, 한정운 같은 경우에는 조금 듣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비밀과 마주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내 눈앞에는 중년 부부가 앉아있다. 누군지는 말 안해도 뻔하다. 이선준의 부모님이다.

왜 나한테는 이런 일만 일어나는거야?

나는 아침 수업이 끝난 뒤 집에서 소설이나 쓰고 있었다. 이선준은 오후 수업에 갔다. 오늘도 머리를 안 감아서 대충 바짝 묶어놓고 있었다.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렸고, 나는 뭔가 싶어 문을 열었다. 그게 실수였다. 열지 말았어야 하는데.

중년 부부가 나를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상태다.

“아, 저…. 마실 거라도….”

중얼거리며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어본다. 맥주랑 소주밖에 없다. 질펀하고 구차하게 사는 사람같다. 솔직히 나는 술 거의 안 먹는다. 다 이선준의 상비약 같은거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부모님들은 냉장고의 내용물도 본다. 이런 모멸감, 정말 오랜만인걸?

“아, 나, 나가서 사올게요….”

“아, 아니다 됐어. 됐어.”

제발 나가게 해주세요. 그들도 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나도 그들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빨랭어ㅜ]

빨리 와라고 치려다가 너무 다급한 마음에 오타가 난다. 이선준의 답장은 없다. 이 자식은 수업 시간에는 핸드폰을 안 본다. 쓸데없이 열심인 성격 때문에 열받는다.

이거 완전 그 상황이지? 아들놈이 여자친구랑 동거하다가 부모님께 들킨 그런 상황 맞는거지? 아니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하다. 사귀지도 않으면서 남자랑 같이 사는 여자라니. 이거 완전 내쪽이 이상한 취급 받을 게 분명하다. 이 사회는 아직 이런 부분에 대해 여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완전 싫고 짜증나지만.

그리고 나는 그들의 옷차림이 부담스럽다. 걸치고 있는 옷들이 척 봐도 고급스럽다. 무슨 브랜드인지 까막눈인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저씨 쪽은 쥐색 양복이 잘 어울린다. 이선준이 아버지 쪽을 많이 닮은 것 같다. 키도 크고 얼굴선도 또렷하다. 어머니 쪽은 피부도 좋고,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다.

분위기에서 느껴진다. ‘나 돈 좀 있다.’ 라고 광고하는 사람들은 대개 티가 난다. 세련됨이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선준 부모님들은 그렇지 않다. 마치 세련됨이라는 것을 옷처럼 입고 있는 느낌이다. 자연스러운 뭔가가 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선준의 집안은 상당히 부자인 모양이다. 그것도 보통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대전 카센터 사장 자식인 내게 이 시련은 너무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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