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시궁창이라도 나만은 내 삶을 사랑해줘야지 =========================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본 나의 외모를 묘사해보자면.
긴 머리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약간 산발한 느낌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머릿결은 좋아 보이고, 숱도 굉장히 많았다. 눈은 크고 반짝거리고, 입술은 선홍빛인데 약간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눈썹은 짙었지만, 선이 뚜렷했다.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 눈썹이었다. 피부는 전체적으로 매우 하얗다. 핏줄이 비칠 것 같이 흰 피부는 이런 걸 보고 말하는 건가 싶다. 가슴은 전에 확인해본 것처럼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없다고 하기는 뭣했다. 결국 있기는 있다. 무엇보다도 핑크색이었다.
“이, 이게 뭐야…. 피.... 핑크색이라니….”
야동에서도 보기 힘든 색깔이 내 몸에 있었다. 패닉에 빠질 지경이었다. 나는 괜히 흥분해서 외쳤다.
“이, 이거 봐! 나 핑크색이야!”
“이 미친, 보긴 뭘 봐 미친놈아!”
이선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진짜 웃겼다. 이 상황이 미칠 것처럼 웃겼다.
몸은 아주 가녀리다. 하지만 빼빼 말랐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허벅지와 종아리는 매끈했다. 전체적으로 키가 작았지만, 머리가 작은 탓인지 비율 때문에 완벽했다. 음모는 너무 많지는 않았다. 음모 아래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서 항상 씻을 때마다 내가 소중하게 비벼주던 그건 이제 없었다.
전체적으로 야하다. 이런 여자가 내 눈앞에 있었다면 나는 단숨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한 번 하고 싶다고.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내 몸이다. 내가 나랑 할 수는 없다.
물론 이것도 그냥 개소리에 불과하다. 나는 감성에 충실한 인간이지만 욕망에 충실한 인간은 아니다. 그냥 내 몸과 얼굴을 보고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정말 예쁘다. 정말 예쁘고 아름답다.
그리고 너무나 슬펐다.
샤워기를 틀었다. 물이 세차게 쏟아졌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외쳤다.
“거기도 핑크야! 핑크라고!”
왠지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 들어서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외쳤다. 확인해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진짜로 핑크색일 것 같았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이 들려왔다.
“너 진짜 미쳤냐? 나오면 뒤질 줄 알아!”
“왜? 못 믿겠어? 와서 확인해볼래?”
“닥쳐! 빨리 씻고 나오기나 해!”
절대로 들어올 리가 없다는 걸 아니까 이렇게 놀리는게 재미있다. 그래, 내가 달라졌으니 인간관계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중요한 건 내면이지만, 결국 보이는 것은 외면이었다. 외면이 바뀌었으니 내면 또한 바뀐다. 내 세계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세계 또한 바뀐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 바뀐다. 나는 샤워기 물을 맞으면서 멍청하게 주저앉았다. 긴 머리카락이 살에 달라붙었다. 나는 내 몸에 달라붙은 머리칼이 나를 덮친 바이러스처럼 느껴졌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바뀐다. 바뀌게 될 것이다. 남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이상 나는 바뀌어 나갈 수밖에 없다. 내 자신이 바뀌고, 인간관계가 바뀐다. 그것은 결국 내 삶이 송두리째 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일 친한 친구에게 내 바뀐 성을 가지고 농담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자꾸 그런 소리를 함으로써 나는 나의 여성성을 부정하려 하고 있다. 이럴수록 내 친구는 나를 여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럴수록 나는 내 남성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여성으로 변한 내가 내 여성성을 하찮게 여길수록 나는 남자인 내 자아를 잃지 않는다. 내 여성성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순간 나는 여자가 된다. 마음까지 그렇게 될 것이다.
감정의 나열, 정념의 세계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소설을 써왔던 나다. 인간의 감정과 내면세계에 대한 것을 나만큼 생각해본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더 잘 안다. 잘 알 수밖에 없다. 내면을 정하는 것은 영혼이나 뇌가 아니다. 겉모습이다. 인간관계다. 경제적 환경이다. 내면은 외면에 절대적 영향 아래에 있다. 종속이라 표현해도 좋다.
내면과 의식을 불가침적 영역으로 상정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영혼의 신성성을 믿는 이들이나 하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변하게 될 것이다. 원래의 것을 지키려고 하면 무너질 것이다. 아주 처참하게, 비참한 방식으로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 앞에서 죽었다는 그 발병자처럼 같은 방식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릴지도 몰랐다.
나는 여자가 되었다. 이건 돌이킬 수 없다. 전력으로 여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점차 젖어들 듯 여자가 될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슬프다.
“진짜 존나 핑크색이라고….”
나는 오래 울었다.
씻고 나왔더니 방은 그새 순식간에 치워져 있었다. 대체 어떤 묘기를 발휘한건지 세탁물들은 원룸 싱크대 밑의 내장형 드럼 세탁기에 들어가 있었고, 쓰레기들은 봉투에 담겨 있었으며, 널려있는 책들은 책장에 가지런히 높이에 맞춰 꽂혀 있었다. 너무 잘 정돈되어 있어서 내가 놀랄 정도였다.
“이 정도면 강박증 아냐?”
“지랄하네.”
갈아입을 옷을 들고 들어갔기에 나는 알몸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남자일 때도 다른 사람에게 발랑 벗은걸 보여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그나마 입을 수 있는 것은 사각팬티와 면티셔츠 뿐이었다. 입고 왔던 옷은 몸 냄새가 배서 세탁기에서 지금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 머리카락 드럽게 안 마르네.”
나는 한참동안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가 중얼거렸다. 이선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자들이 약속시간 늦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거다.”
물론 나도 여자들이 머리 말리는데 시간 오래 걸리는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하려니 진짜 열 뻗쳤다. 물은 계속 뚝뚝 떨어져서 그새 흰 셔츠가 다 젖어버렸다. 이선준은 지금 반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말년이라 할 일 없어서 운동한다더니,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다. 내 옷이 좀 작은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안 마르는 머리와 씨름하고 나니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아…. 이거 묘하게 튀어나오니까 되게 신경 쓰이네.”
흰 셔츠 밑에 아무것도 받쳐 입지 않은 탓에 가슴께가 볼록하게 그것이 튀어나와 있다. 의식할 생각은 없는데 삐져나와 있으니까 내 눈에 자꾸 밟혔다. 사각팬티도 잘못 움직이면 거기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속옷 사야겠는데.”
TS됐지만 나는 남자다라고 주장하며 온몸을 마구 드러내는 건 미친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나는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여자가 되었다 해도 여기저기 보여줄 만큼 관음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속옷은 여성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착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남자용 트렁크 팬티를 입고 싸돌아다니는 것은 사절이다. 적응해야 한다. 나는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등신은 아니다. 나는 남자야! 라고 주장하며 속옷도 안 입고 처싸돌아다니는 자식들은 모두 정신병자거나 정박아들이다.
남자로 돌아갈 확률은 희박하지만, 돌아간다면 다시 남자로 살면 된다. 여자용 속옷을 입는다고 해서 내 정체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필요한 것을 사고, 해야 할 일을 한다. 당연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물론 내가 이 말처럼 살았다면 2.13의 사나이가 되지는 않았겠지.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이 몸에 맞는 옷과, 속옷을 사야 했다.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침대맡에 앉아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이선준에게 말했다. 물론 내 책이었다. 그러니까 곧 나도 읽은 책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었다.
“봐요. 아저씨. 그딴 거 말고 백경(白鯨)이나 보라고.”
“쿤데라의 소설을 그딴 거라고 표현하는 시점에서 너는 글러처먹었어.”
“그러는 당신은 멜빌을 무시하지 않소?”
“무시한 적 없어. 다만 쿤데라가 조금 더 좋을 뿐이지.”
이선준은 신랄하게 말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책 보는 마초남이라는거, 찌질해 보이지만 직접 보면 의외로 멋있다. 야수성 안에 숨은 감성주의자의 편린이랄까, 그런 게 느껴진다. 물론 이건 눈앞의 사람을 보고 한 생각이 아니다. 책을 보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을 때 한 생각이다.
나는 괜히 심술이 돋아서 놀려줄 생각으로 말했다.
“백경이 별로면 모비딕(Moby Dick)도 괜찮아. 한 번 봐.”
“너 나 놀리냐?”
“왜?”
“백경이 모비딕이잖아.”
“오, 아는데?”
작가와 작품만 아는 놈들은 의외로 모르는 것이었다.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당연히 알 거라 생각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문창과생은 책을 안 읽는다. 나도 이제는 잘 안 읽는다. 예전에는 많이 봤지만, 이제는 시들해졌다. 전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