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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89화 (89/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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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제법 좋아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베란다 문을 연다. 서늘하면서도 맑은 공기가 들어온다. 이선준은 정자세로 누워 침대에서 잘 자고 있다. 이불을 개고 구석에 잘 정리해 놓는다.

이 집은 뷰가 꽤 괜찮다. 대학가 원룸들이 항상 원룸밖에 안 보이고 볕도 잘 안 드는데 여기는 그나마 볕이 잘 든다. 이제는 외투를 입을 필요가 없는 좋은 날씨다.

오늘 나는 아침 수업이 있지만 이선준은 없다. 굳이 깨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아암….”

조금 졸리다. 머리도 좀 부스스하다. 긴 머리, 잘라버릴까 싶은 생각이 하루에 열 번 정도 드는 것 같다. 이런 걸 생각하면 나도 내 자신이 우습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 싫은 주제에, 내 외모를 조금이나마 신경쓰고 있다.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지는 않다. 이런 걸 보면 나도 내 외모에 대한 관심은 꽤 있는 편이다.

씻어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 남는다. 나는 이선준의 자는 모습을 잠깐 구경한다. 코도 안 곤다. 잠꼬대도 안 한다. 뒤척이지도 않는다.

“죽었나?”

가끔은 진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잠드는 자세와 깨는 자세가 같다. 음,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

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린다. 우뚝하다. 남자한테 아침에 우뚝할 건 하나밖에 없다. 뭐야 저거, 기분나쁠 정도의 크기다. 그 동안의 숱한 연애에는 저런 부분에 대한 비밀도 있었던 거겠지. 나는 황급히 일어난다. 만약 이선준이 내 자는 모습을 이렇게 구경했으면 나는 성질을 엄청 냈을거다. 역지사지,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수건으로 머리를 틀어올려 고정하고 샤워기를 튼다. 이렇게 하면 머리는 젖지 않으면서 샤워를 할 수 있다. 머리 말리는 거 엄청 귀찮다.

따뜻한 물을 받다보면 정신이 멍해진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나온다. 나는 샤워를 하면 알몸으로 나오는 편이었다. 그러면 몸에 남아있는 마지막 습기가 마르면서 딱 보송보송한 상태가 된다. 하지만 이선준의 집에 온 뒤 그런 습관은 당연히 버렸다. 그러니까 좀 불편하다. 살짝 덜 마른 상태에서 속옷을 입는 느낌이 싫다. 이제는 브래지어 입는 것도 꽤 능숙하다.

로션을 대충 치덕치덕 바른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맨얼굴이지만 괜찮다. 화장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안 들었던 건 아니다. 다른 여러 이유를 차치하고서 안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배우기 귀찮다. 할 줄 알았다면 몇 번은 해봤을지도 모른다.

이선준은 잘만 잔다. 나는 이선준이 자는 모습을 확인한 뒤 후다닥 옷을 갈아입는다. 무난하다. 스키니진에 하늘색 와이셔츠, 안에는 흰색 면티를 입었다. 무난하고 무난해서 오늘 역시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패션이다. 물론 여성복이다. 머리를 묶고 백팩을 맨다.

정말 무난하고 건강한 대학생으로 보인다. 새내기라고 해도 믿겠어.

힘찬 하루는 아니지만, 무난한 하루가 되길 빌어보며 밖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랬던 기대가 처참하게 배신당한다.

“아 언니, 안녕하세요.”

서혜인이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해서 나도 오른손을 살짝 들어 흔든다.

“어, 안녕.”

“학교 가세요?”

“응, 뭐 그렇지.”

내가 이선준과 같이 산다는 건 뭐 이미 다 알려져 있다. 내가 일부러 광고하듯 떠들고 다닌 것 때문이다. 나중에 쉬쉬하듯 알려지면 괜히 동거라느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였다. 내 집안 사정이 어떻고 하는 것도 구구절절 다 설명했다. 추접스럽지만 이선준에게 피해를 주는 게 싫기 때문이었다.

얘도 그걸 알면서 굳이 여기서 기다릴 이유는 없다. 얘 자취방은 내가 알기로 여기랑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아, 그냥요…. 지나가다가….”

서혜인은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이다. 대체 이 녀석은 뭘 위해서 여기에 있는걸까. 내가 아침에 이선준이랑 사이좋게 손잡거나 팔짱이라도 끼고 나오지 않나 그게 불안했던 걸까? 이렇게 눈으로 나 혼자 학교에 가는 게 보고싶어서 그런가? 이유가 뭐든 불쾌하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든 불쌍하다.

이 녀석은 진짜로 이선준을 좋아한다. 아침에 이런 식으로 원룸 앞에서 나와 이선준이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확인하러 나와야 할 정도로 좋아한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려면 그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 첫눈에 반하고 이런 건 없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전부 나와 친했던 여자들이다. 나는 그 사람을 점점 알아가면서, 물에 젖어가듯 반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좋아하고 있었다. 뭐 나는 그런 식이었다.

서혜인은 이선준과 그렇게 친하지 않다. 그냥 오가며 인사 정도 하는 그런거다. 그런데 서혜인은 이선준에게 말 그대로 목을 맨다. 그래야만 할 필연도, 근거도 없어보인다.

서혜인에게 왜 그렇게 그 자식이 좋냐고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묻지는 않는다. 괜히 벌집 쑤시고 싶지 않다. 나는 서혜인을 지나친다.

“어, 언니.”

“왜?”

“저…. 도와주시기로 했잖아요.”

서혜인이 나를 보는 표정은 볼만하다. 불안과 초조, 분노, 의심, 의혹이 가득하다. 나는 서혜인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감정 때문에 놀란다. 서혜인은 지금 내 아래에 있다. 나를 향한 이상한 음해와 소문의 끝에 이 녀석이 있는건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나는 서혜인에게 어떤 승리감 같은 것을 느낀다. 나는 이선준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건 명확하다. 하지만 서혜인이 사랑하는 이선준은 나와 같이 있다. 나를 더 많이 보고, 나와 더 많이 대화하고, 나와 같이 살고 있다. 나를 음해하는, 나를 싫어하는, 나를 미워하는 이가 원하는 것이 내 손 안에 있다.

그러니까 나는 승리감을 느낀다. 당연하다.

“어, 너도 나 도와주기로 했잖아.”

서혜인은 분명 내가 도와주는 대신, 나를 둘러싼 악의적인 소문들을 해소해 주기로 약속했다. 서혜인을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 도움을 바라는 건 명백히 이상한 일이야. 나는 서혜인이 나를 엿 먹이려고 했던 시도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나는 서혜인을 지나친다.

“서로 잘 노력해보자고.”

그 말을 남긴 채 나는 학교로 간다. 서혜인의 표정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나는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네가 하는 만큼 나도 하겠다는거다. 내가 생각하기에, 서혜인은 나를 도울 의지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나도 뭔가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그 이유 뿐일거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신할 수 없다.

“야, 너는 연애 해봤어?”

수업이 끝나고 한정운과 카페에 있다. 매일 강의실 빌려서 학습 하는것도 짜증나서 바깥으로 나온거다. 토론을 했다. 대단할 건 없었고, 현재 중요한 정치안건에 대해서 진영을 나눠서 장난식으로 한 번 해본거다. 나는 진보, 한정운은 보수 논리로 진행했다.

발렸다. 처참할 정도였다. 나도 나름대로 말은 좀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정운은 내 말을 끊어먹는 것도 아닌 주제에 나를 완전히 논파했다. 하면 할수록 나는 왜 자괴감만 드는걸까.

“아뇨.”

“왜, 인기 많지 않냐?”

나는 카페라떼를 마시며 말한다. 설탕 안 들어간 커피우유맛이다. 담백해서 좋다.

“고백은 좀 받아봤나본데?”

“별로 하고 싶지 않던데요.”

“왜?”

“좋아지지가 않더라고요. 뭐든지.”

“뭐가?”

한정운의 말은 어쩐지 이상하게 들린다. 여자가 좋지 않다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냥, 저와 기호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괜찮겠지만 사람이 동일할 수가 없잖아요. 제가 하고 싶지 않은 걸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죠.”

“그걸 극복하고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게 연애잖아?”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어요.”

한정운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다. 누군가의 기호가 천박하다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한정운은 어쩌면 나나 이선준, 박헌영과 같은 인간들보다 붕 떠있는 존재다. 이 녀석은 정말로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져있다.

“방어기제냐?”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죠. 누군가 저에 대해서 안다는 걸 생각하는 것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 소설은 어떻게 써? 소설 보면서 사람 추론하는 부류도 있잖아.”

소설에는 인간이 묻어나온다. 특히 습작생들에게 더욱 그렇다. 그 사람이 쓴 소설은 그 사람의 인간관과 세계관, 문학관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뭐 현직 작가라 해도 다를 건 없다. 결국 소설이라는 것은 논설과 비슷한 거니까. 어찌보면 습작생의 소설은 자기소개서만큼이나 명확하게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설을 보면서 누구는 어떤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그건 좋은 취미가 아니다. 도착증 변태 같은 거다.

“글쎄요. 제 관념을 안다고 해서 저를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응, 그렇네. 너 진짜 모르겠어.”

내가 비아냥거린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정운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은데.”

“뭘 아세요?”

말투는 적대적인 것 같지만 태도는 그렇지 않다. 한정운은 흥미롭다는 태도다.

“호기심이 아주 강한 타입이지. 그리고 책임지는 건 싫어하고.”

“근거는?”

“귀납적 추론에 의한 결론이지.”

나는 한정운이 옆으로 밀어놓은 커피잔을 가리킨다. 한정운이 시킨 건 카라멜 마끼아또다. 한 모금 먹은 뒤 먹기 싫다는 듯 옆으로 밀어놓았다.

“너 카페 올 때마다 안 먹어본 거 시키지.”

“네.”

“그리고 한 모금 먹고 맨날 밀어놓잖아.”

“…….”

카페모카, 고구마 스무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건 뭐건 일단 안 먹어본 걸 시킨다. 그리고 한 모금 먹고는 표정 하나 안 변한 채 옆으로 밀어놓는다. 그리고 안 먹는다. 밀크티 같은 건 먹은 다음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까지 봤다. 호기심은 강하지만, 싫으면 내팽개친다. 그게 내가 아는 한정운의 성격이다.

“충분한 근거인가?”

“혈액형별 성격 믿는 타입이세요?”

“날 뭘로보냐? 어쨌든 맞아 안 맞아?”

“맞아요.”

한정운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한정운에게 승리를 쟁취한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어때. 끔찍하냐? 내가 너를 읽어냈잖아.”

뭐 이런 대화가 있나 싶지만 한정운과 이야기하면 묘하게 이야기의 핀트가 이상한 곳으로 가버린다. 항상 그렇다. 매사 진지하고 신중한 이유 때문이고, 무슨 말만 나오면 주절주절거리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 성질을 내거나,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특히 초면인 사람을 만날 때 그렇다. 하지만 한정운은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신중하다. 그래서 한정운의 말에 상처를 받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수업 중에 신랄하게 지껄일 때는 빼자. 한정운은 나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딱히 그렇지는 않네요.”

“무서운 거라도 있어? 뭔가 켕기는 거라던가.”

남이 나를 읽어내는 것이 두렵다면 역시나 읽혀지기 싫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사실 나는 한정운에 대해 궁금하지는 않다. 그냥 물어보는거다. 내 모든 언어는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생산된다. 내 나쁜 버릇이다.

“실례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그런가?”

“뭐 그 점이 요즘은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뭐야 이 자식. 이런 말 안 하던 놈인데?

“반하겠냐?”

“아뇨. 전혀요.”

“……나도 내가 웃긴 거 알거든? 근데 그런 말 들으면 묘하게 상처된다?”

진짜로 그렇다. 남자 따위의 사랑이나 호감을 받아서 기분좋을 건 전혀 없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너한테 관심 없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이러지는 않는다. 하지만 심술 정도의 짜증이 난다.

“저도 동성한테 너는 정말 내 타입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으면 제가 LGBT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짜증날걸요.”

“오, 너…. 옹호해주는거야? 눈물나는데 이거.”

한정운의 논리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이 자식, 말 정말 잘한다. 그보다 LGBT라니, 이 자식 상당히 디테일하다. 뭐 물론 요즘 시대에는 상식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만.

“그보다 네가 평범하게 이성애자라는 사실이 상당히 놀라운걸.”

“오랜 심사숙고 끝에 이성애자이기를 선택했죠.”

“취소, 전혀 안 평범해.”

애초에 그게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데? 내가 테이블에 늘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자 한정운은 피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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