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나의 문제 =========================
이선준은 그 거짓말에 물타기를 해서 사실관계를 호도하자는 전략을 썼다. 그래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서영하는 그렇다고 하더라.’ 라는 식으로 소문을 바꿀 수 있었다.
뭐, 이선준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능력이 있었다. 지금이야 조용히 학교 다니고 있는 탓에 그런 재능 쓸 일은 없지만.
나는 그 거짓 소문을 진짜 거짓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이선준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대체 서영하가 뭘 목적으로 그런 소문을 퍼뜨린건지 알기 위해 서영하를 만났다. 당연하게도, 서영하는 나를 피했다. 서영하는 그럴 때마다 내가 때리려고 했다는 둥의 개소리를 지껄여댔다.
내가 계속 서영하를 만나려 하자 나를 막아선 건 그 선배였다.
‘야, 너 영하 그만 괴롭혀라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헤어졌으면 그냥 꺼져 추잡하게 굴지 말고.’
‘신경쓰지 말고 꺼져 개 씨팔새끼야. 선배라고 가만 있었더니 이게 날 씨팔 호구로보네? 그 년 데려오라고!’
그 선배와 삿대질을 하며 당장이라도 붙을 듯 싸웠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지금이야 좀 성격이 죽었지만, 그 때 내 성격은 정말 지랄맞았다.
서영하가 울면서 끼어들고, 싸우지 말라고 했다. 나는 서영하와 단 둘이서 얘기를 하고자 했다. 그 선배를 떼어놓고 카페에 가서 단 둘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서영하가 또 어떤 사건을 어떻게 부풀려서 말할지 몰랐기에 최대한 분노를 죽이며 말했다.
‘헤어지자고 한 것까지는 이해할게…. 사람이 그럴 수 있으니까.’
서영하의 변심에 대해서 서운하거나 화나는 마음은 옛날에 사라진 상태였다. 중요한 건 대체 왜 그랬는가 하는 거였다.
‘그런데, 너 대체 왜 그딴 헛소문을 내냐? 그냥 헤어지면 되는건데, 왜 날 굳이 병신을 만들어?’
‘너 무슨 소리야?’
그 때의 일은 내게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서 모든 말들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서영하는 나를 보며 진심으로 미쳤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서영하는 오히려 내게 화를 냈다.
‘너 네가 한 짓 기억 안 나? 너 진짜 뻔뻔하다.’
서영하는 내가 한 일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나는 마음에 조금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항상 말해왔다. 하지만 나는 해리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서영하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헛소문들을 늘어놓으며 기억이 안 나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서영하를 보며 도저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영하는 자신이 한 거짓말들을 모두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서영하는 나를 보며 바람 피운 것, 때리려고 한 것, 내가 전 여자친구를 때렸다고 말한 것들을 따지며 내 앞에서 울었다.
솔직히 화가 난다기보다 무서웠다. 자신의 거짓말을 어떻게 해야 이렇게 진심으로 신봉하듯 믿어버릴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나는 두려움이 가라앉고 점점 분노했다.
서영하는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모욕했고, 자신의 거짓말에 취해 분노했다. 나는 결국 폭발했다. 나는 서영하에게 살면서 못 들어봤을 수많은 욕을 퍼부었다.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서영하도 마찬가지로 내게 커피잔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같은 카페에서 몰래 듣고 있던 이선준과 박헌영이 나와 서영하를 말렸다.
정말 더럽고 끔찍하게 끝난 두 번째 연애였다.
평범하게 만날 때에는 그냥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영하의 심각한 허언증과 그것을 맹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연애라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 나는 그렇게 심각하게 배신당한 적도 없었고(지금은 제외하고), 그렇게 내 마음이 산산조각나버리는 느낌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소문은 뭐가 진실인지 모르는 채 사라졌고, 나는 서영하를 항상 ‘정신과 정밀진단을 받아봐야 하는 병신’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결국 서영하나 나나 서로 병신 되고 끝난 연애였다.
그 일의 전말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선배에게서 들었다. 서영하와 사귀던 그 선배도 평범하게 차였다. 뭐, 사실관계가 어떻든 그 선배도 악독한 소문의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그 선배는 울분에 차서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서 토로했다.
나와 사귀던 도중, 술을 먹고 서영하와 그 선배가 잤다. 술 먹고 한 실수 비슷한 거였다. 물론 나는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선배는 서영하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계속 서럽게 울어서 달래줬다. 그러다가 서영하가 내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요즘 내가 자꾸 바람을 피우고, 때리지는 않지만 폭력적으로 대하는 통에 너무 힘들었다는 말이었다.
그 선배도 왜 술을 먹었을 때가 아니라 자고 난 다음에 그 얘기를 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점점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그 선배는 내가 그런 놈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어느 정도 서영하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런 거짓말까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선준은 그 때 이렇게 말했다.
‘걔가 너무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뜻이지. 음, 정확히 말하자면 ‘도덕적인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심하게 큰거야.’
서영하는 자신이 그런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남자친구 두고 다른 남자랑 떡이나 치는 년’으로 인식하는 것이 싫었다. 서영하는 항상 자신이 도덕적인 포지션에 있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영하는 내가 나쁜 놈이라서 그랬다는 입장에 서고 싶었다. 곧, 행동의 당위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들이 생산된거다.
그리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과정 속에서, 서영하는 진짜로 자신이 한 거짓말들을 믿어버린 것이다. 물론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상당히 자존심이 강해서 그걸 인정하기 싫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본 건 인정하기 싫은 수준을 떠나서 진짜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연기라면 서영하는 그 해 여우주연상이라도 받았을거다.
하지만 그 선배는 애초에 졸업했기에 서영하의 허언증에 대한 진실은 결국 알려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말들로 묻어버리기에 서영하는 애초에 정치를 잘 하는 인간이었다. 친한 사람이 많았고 사람도 많이 만났다.
나는 그 뒤에 나를 둘러싼 엿 같은 헛소문들이 짜증나서 군대에 가버렸다. 뭐, 가야 될 때이기도 했다. 전역을 했을 때에는 이미 서영하는 졸업한 상태였고, 나는 마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 소문들도 꽤 잠잠해져 있었다.
나는 사람이 자신의 도덕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연애라는 것 자체에 실망했다.
내가 좀 정도가 심한 인간을 만난 것뿐이다. 누굴 만나도 그런 식의 감정 충돌과 함께 헤어지게 된다는 걸 알고 나니 누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싹 사라져버렸다. 애초에 그렇게 지저분하게 끝날 관계를 만들고 싶지가 않았다.
결혼을 안 하겠다고 명확하게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다. 그냥 단순하다. 연애를 하기 싫은 마음보다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면 만날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연애라는 것에 지나치게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내가 여자가 된 것과는 별개로 연애 자체에 부정적이다. 그래서 나는 소문을 싫어한다. 소문을 엄청 신경쓰는 것도 그 때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던 탓이다.
그러니까 서영하를 다시 마주쳤을 때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카톡
“이 타이밍에 불길한데.”
카톡 알림음이 울리자 이선준이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라면을 한 젓가락 뜨다가 핸드폰을 본다. 메시지를 확인하니 서영하다. 차단 안 해놨었나? 옛날부터 번호를 안 바꾼 탓에 그대로 저장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잘 지내?]
이 년이 왜 갑자기 시비지?
나는 이선준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이선준이 1층까지 따라오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한다.
“야, 너 아무래도 좀…. 안 만나는게 좋지 않겠냐?”
“아니, 아주 좋은 기회 같은데.”
이선준은 한사코 가지 말라고 했지만 서영하의 메시지를 보자 그럴 생각은 깔끔하게 접었다. 무슨 저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영하는 오랜만에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무슨 기회?”
“복수지 뭐야.”
나는 뒤끝이 아주 긴 사람이다. 당한 건 절대 잊지 않는다. 대체 오랜만에 날 만나서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뭘 받은 열 배로 갚아줄 생각이다. 내가 그것 때문에 고생하고 열 받았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밤에 잠이 잘 안 온다. 도발적으로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 갈까 했지만, 오히려 그것보다 평범하게 입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는 항상 그렇듯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이다.
“야, 나도 갈까?”
“……분명히 수상한 오해 때문에 역효과 날 걸?”
나는 씩씩하게 걷는다. 대체 나를 왜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나보고 싶다. 또 헛소리를 지껄이면 면상을 트레이로 후려쳐버릴거다. 남자일 때에는 그렇게 하면 내가 쓰레기 되는 거였지만 나는 지금 명백하게 여자다.
여자는 여자를 패도 남자만큼 비난당하지는 않을거다.
약속장소에 가자 서영하가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좀 예쁜 편이기는 하다. 정장도 잘 어울린다. 서영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놀란 듯 입을 벌린다.
“어…. 진짜 설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페로 들어간다. 서영하는 카운터 앞에서 지갑을 꺼내며 말한다.
“내가 살게.”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메뉴를 고른다. 가장 비싼 걸 시킬까 하다가 그냥 평범하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서영하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왜, 비싼 거 먹어도 돼.”
“먹고 싶은 걸 먹어야지.”
“음, 그래?”
비싼 걸 시켜먹어봐야 오히려 내가 더 못난 사람이 될 뿐이다. 커피를 받아서 우리는 빈 자리에 가서 앉는다. 서영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본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그런데 왜?”
“아니 뭐, 그냥 잘 지내나 궁금해서. 이제 여기 올 일도 없잖아.”
지랄하고 있네, 전 남자친구 안부를 굳이 물어보러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 년은 진짜 지독하게 꼬였다. 내가 이 모양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든 한 번 비아냥거리고 싶어서 날 부른거다.
우리는 그 만큼 지독하게 서로를 증오하면서 헤어졌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서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어도, 그 때 그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진짜 말도 안 돼….”
“말도 안 될 것까지야.”
“너 괜찮아?”
“괜찮으려고 노력 중이지.”
“진짜 대박이다. 어떻게 그런 걸 걸린대?”
이 년은 시비를 걸러 온게 확실하다. 아니 그냥 저가 좋은 사람이나 만나면 될 것이지 굳이 전 남자친구가 여자가 된 걸 꼭 놀려먹어야 하나? 하지만 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왔다. 한 마디도 밀릴 생각은 없다.
“응, 대박이지. 공짜로 얼굴에 돈 처바른 사람들보다 예뻐졌으니까.”
서영하의 눈에 없던 쌍커풀이 있는 걸 보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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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의 짤막한 복수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