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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86화 (86/224)

00086 나의 문제 =========================

예비군 훈련에서 돌아온지도 날짜가 꽤 지났다. 소설도 쓰고, 과제도 하고, 한정운과 학습도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

하지만 열심히 산다고 해서 뭔가 내 미래가 긍정적이라거나 한 건 아니다.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밖에 없다. 여전히 박헌영과의 관계가 문제다. 박헌영은 내게 고백했지만, 나와 박헌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나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역시나 박헌영도 내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버리고 싶지 않다. 어장관리 하는 사람들보고 욕했던 내가 웃기다. 지금 내가 하는 꼴이 그거하고 똑같다. 자기한테 고백한 사람에게 ‘그냥 친한 친구로 지내자.’ 라고 말한 다음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는 꼴이 영락없이 그거다.

그리고 이선준도 문제다. 나는 이선준의 태도도 점점 변하고 있다는 걸 안다. 아직 드러난 변화가 보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소유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선준이 나를 과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진다.

내가 늦게 들어오면 전화하거나, 나갈 때면 항상 조심하라는 식의 말을 한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혹은 자신이 불안하면 굳이 따라오기까지 한다. 특히 한 밤중에 편의점 갈 때 그렇다.

그런 말들이 나를 어떤 방식으로든 구속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선준은 단순히 걱정 때문이라고 말하고, 나도 그 말처럼 단순히 걱정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따금, 그런 말들은 명령처럼, 집착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 내 생각이 어느 정도 들어맞아 있다는 걸 안다.

박헌영과 이선준, 나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상황이 오면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연애가 정말 하기 싫다. 단순히 내가 남자였다는 이유도 있다. 남자와 연애하는 건 이르다. 생각만 해도 어쩐지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처럼, 다른 이유도 없는 건 아니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나는 남자든 여자든, 연애라는 것 자체를 환멸한다.

나는 지금껏 연애를 두 번 했었다. 그 말은 곧 그 두 번의 연애를 실패했다는 소리다.

성공으로 끝나는 연애가 있기나 할까 싶다. 결혼을 해도 이혼이 있다. 사랑이라는 건 잠깐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환상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고,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 것 같다. 물론 이건 나의 오만한 염세주의적 발상이다.

다만 중요한 건, 나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서로의 밑바닥을 핥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만나기는 싫다. 나는 두 번의 연애를 하며 그 두 사람의 바닥을 봤다. 나도 바닥을 보여줬다.

결국 연애라는 건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나게 되어 있다. 원래 연애라는 건 그 모양이고, 그렇게 끝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연애가 싫다. 누군가 연애하는 걸 보고 비난하지는 않지만, 나는 별로 할 생각이 없다. 좋아한다면 그냥 좋아하는 대로 끝나면 된다. 감정과 애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버티는 게 편하다. 굳이 만나서 서로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박헌영이든 이선준이든, 설사 내가 좋아하게 되더라도 연애를 할 생각은 없다. 이건 상처가 더 크다. 결국 헤어지게 된다면 연인 뿐 아니라 친구까지 잃는다. 무조건 잃는 도박에 배팅을 두 배로 할 필요는 없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왔는데, 건물 바깥 흡연장에서 일단의 여성들이 모여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척 봐도 도도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는 여자가 있다. 여성용 정장 차림에 웨이브펌을 한 머리, 척 봐도 나 직장인임을 광고하고 있는 여자가 과 후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 그냥저냥. 뭐, 우리 과 출신은 일 적응하기 좀 쉽달까. 그런 게 있긴 하지.”

“이직 같은 건요?”

“생각해보고 있긴 한데, 일단은 경력 쌓아야 하니까 기다려 보려고.”

“아, 저도 좀 있으면 졸업인데 사람 구하는 데 없어요?”

“음….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선배들한테 물어볼게.”

“고마워요 언니!”

나는 그 사람을 알아본다. 잊을 수 있을리가 없다. 그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급하게 시선을 피하고 걸어간다. 신경쓰기 싫다.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기분이 더럽다.

“쟤 새내기야?”

“네? 아….”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다들 침묵한다. 그 중 하나가 말한다.

“얘기 못 들으셨어요?”

“아, 설마 쟤 설원이야?”

듣기 싫은데 곤두선 청각이 모든 대화를 주워담는다. 나는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난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지금 도망치는거다. 그 여자의 어조에 깃들어 있는 명백한 비웃음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 자리를 빠르게 떠난다.

저 년의 이름은 서영하, 내 전 여자친구다.

도망치듯 빠져나와 자취방으로 돌아가자 이선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가서 밥 먹자. 배고프다.”

“아, 안 나갈래. 집에서 먹자.”

“귀찮아. 설거지 하기 싫어. 먹을 것도 없는데.”

“라면이나 먹어.”

“아 맨날 라면 먹기 질리는데.”

“그냥 먹자 좀.”

나는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 말한다. 애초에 수업 끝나고 같이 밥 먹자고 하다가 집에서 먹자고 하니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이선준은 내가 거칠게 양말을 벗어던지고 표정도 심상치 않자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묻는다.

“너 무슨 일 있었어?”

뭐 말 못할 일은 아니다. 나는 이선준을 보며 말한다.

“서영하 봤어.”

“뭐? 걔가 여길 왜 와?”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이선준도 당황한다. 서영하는 내 동기다. 그러니 곧 이선준과도 동기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졸업도 한 년이 학교에는 왜 치근덕거려?”

내가 투덜거리자 이선준은 순순히 일어나서 냄비에 물을 받는다. 집 바깥으로 나가봐야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

“뭐 후배들 만나러 왔는가보지.”

“뭐…. 그 따위로 정치질 하던 년이니까 이상할 건 없네.”

나는 침대에 엎어져서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얼굴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때문에 기절할 것 같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안 좋은 추억들이 무럭무럭 떠오른다. 연애를 수십번 해본 건 아니지만, 서영하는 내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줬다.

“저런 정신병자도 취직을 할 수 있다는게 신기하네.”

“야,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렇게 심하게 말할 거 있냐.”

“뭐, 틀린 말도 아니잖아.”

나는 서영하를 증오한다. 어떻게 잊고 살았는데 마주치는 순간 모든 기억이 떠오른다. 군대의 마지막 기억이 병장 때인 것처럼, 연애의 마지막 기억은 역시나 파국의 순간이다. 헤어지기까지의 감정 충돌과 싸움이 가장 머릿속에 깊게 남아있다.

없는 자리에서 욕하는 것도 웃긴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린다. 베개에서는 이선준의 냄새가 난다. 싫은 냄새는 아니다. 샴푸 냄새 같기도 하고, 약간 건조한 느낌이 나는 냄새다. 체취가 오히려 약해서 강하게 인상에 남는 느낌이다. 나는 그러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든다.

“읏….“

내가 왜 이선준 냄새 나는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거지? 나는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말한다.

“아…. 오늘 가겠지? 계속 있지는 않겠지? 뭐 해야 된다면서 막, 어? 며칠씩 있고 그러지는 않겠지?”

“설마 그러겠냐.”

이선준이 라면을 끓이고 있다. 그래, 내 기우일거다. 만날 일은 없을거다. 라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불안감을 밀어넣기 위해 잠깐 명상의 시간을 가진다.

서영하와는 삼학년 때 만나서 육 개월동안 연애했다. 헤어진 다음에 군대를 갔다. 뭐 사실 도망치듯 입대해버린게 맞다.

그냥 평범하게 친한 동기였다. 원래는 그리 친한 건 아니었다. 이학년 때 같은 강의를 들으면서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서영하가 먼저 고백해서 사귀게 됐다. 뭐 그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문제가 있다. 첫 여자친구와도 나는 좋게 헤어지지 못했다.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본 나는 내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지독할 정도로 애정결핍이 심하다. 연인이 된다면 결국 기본조건은 ‘서로를 좋아할 것.’ 이거다. 나는 이 기본조건에 상당히 민감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나를 항상 사랑해주길 요구했다. 내가 고아라서 그런건지, 내 성장 과정중에 생긴 끔찍한 피해의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상대방의 애정을 심하게 갈구하는 타입이다.

연인이 내게 조금이라도 서운한 행동을 하면 나는 상대의 애정을 증명하려 들었다. 나를 좋아하면 이럴 수가 없다. 이런 주장을 펼치며 더 사랑해달라고, 더 좋아해달라고 애걸했다. 연애라는 건 서로가 서로를 좋아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거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건 정당하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추잡하다. 첫 연애는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결국 나는 차였다. 뭐, 그럴 만한 일이었다. 첫 여자친구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쪽 잘못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 서투른 태도가 불러온 당연한 결말이었다.

서영하와 연애를 하면서, 나는 그 때의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잘 해낸 건 아니었다. 나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면 분노하고, 서운해했다. 하지만 그걸 티내면서 싸우지는 않았다. 잘 참았던 것 같다.

좋은 일들도 많았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서영하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서영하도 나를 좋아했다. 잘 맞는 건 아니었지만 맞춰가려고 노력했다.

아마 사귀고 나서 다섯달 정도 되었을 때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서영하가 다른 선배와 자주 만난다는 얘기였다. 뭐 결국 바람이 났다 이런 얘기였는데, 나는 그걸 믿지 않았다. 나는 서영하를 믿었다. 나는 애초에 소문을 혐오한다. 애초에 서영하가 그렇게 멍청한 년일 거라는 생각을 안 했다. 어떻게 다른 과나 지역도 아니고, 같은 과에서 양다리를 걸친다는 말인가 싶었다.

소문 같은 거에 귀를 닫고 살았다. 하지만 점점 서영하가 나를 만나려 하지 않을 때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서영하는 내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했다. 더 이상 너 같은 사람이랑 만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리고 서영하는 그 선배와 함께 다니고 있었다. 척 보기만 해도 사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히 화가 났고, 당연히 분노했다. 하지만 더 화나는 건 다른 지점이었다. 어느 새 소문이 이상하게 뒤바뀌어 있었다.

내가 바람을 피운 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이선준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봤을 때에야 그 소문을 알게 되었다.

내가 허구헌날 클럽에 다니고 원나잇을 한다는 소리였다. 미친 소리였다. 나는 살면서 클럽은 근처도 못 가본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달랐다. 클럽은 말할 것도 없고,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친구랑 같이 헌팅을 하러 다닌다는 소리였다.

나는 엄청난 난봉꾼이 되어 있었고, 서영하는 비운의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슬퍼하는 서영하와 같이 이야기하고 달래주던 선배랑 사귀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날조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안 그렇다고 해봐야 결국 진실 공방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내 진실을 증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가 몇 번 싸웠을 때 드러난 진실도 몇 개 섞여 있었다. 이를테면 내가 가끔 병적으로 집착할 것 같은 태도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첫 번째 연애 때 내가 첫 여자친구를 때렸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서영하는 내 여자친구였다는 것을 이유로 수많은 헛소문을 만들어내 나를 음해했다. 나는 인간 쓰레기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사신카이스// 어케 편마다 항상 거의 최초로 리플을 담? 볼때마다 신기하네 ㅋㅋ

1부 다 써놨다고 했잖아

비축분은 현재 대략 300kb정도 있음

천천히 풀거임 연참하면 저번처럼 찍싸고 디짐할것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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