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85화 (85/224)

00085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박헌영이 잠깐의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호기심 때문에 잠깐 흔들렸던 거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 생각이 없었으면 좋겠다.

“가자.”

막사 바깥에서는 족구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몇 팀으로 나눠서 족구를 하는데,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뭐야, 언제 껴서 하고 있대.”

이선준이 족구 하는 사람들 틈에 껴서 어느 새 하고 있는 게 보인다. 심지어 포지션도 공격이다. 같은 팀에 있는 사람들은 자세히 보니 같은 과 사람들이다. 구경만 하다가 후배들 데리고 같이 하는 모양이다.

-팡!

소리와 함께 이선준이 찬 공이 라인 안에 강렬하게 박힌다. 바운드된 공이 하늘로 쭉 날아간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전부 감탄사를 내뱉는다.

“오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인간은 체대를 갔어야 했어.”

“방구석에서 소설 쓰기에는 아까운 피지컬이지.”

비체육계인 나와 박헌영은 이런 지점에서 죽이 잘 맞는다.

나는 박헌영과 그런 말을 하며 막사 뒤편으로 돌아갔다. 올라가는 언덕길이 있고 한참 위쪽에 단층 건물이 보인다.

“또 올라가야 되는거냐….”

“용무도 없으면서 올라가야 되는 내가 더 불쌍하거든?”

박헌영이 비아냥거리는 통에 나는 입술을 삐죽거린다. 다행히 PX등 부대시설은 막사 앞쪽에 있기에 누군가 지나다니는 일은 없었다.

“아…. 저기 들어가야 돼?”

나는 건물을 보자마자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단층 건물은 잔뜩 낡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꼭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저런 곳에서 샤워를 해야 된다니.

“야, 그냥 오늘 안 씻으면 안되겠냐.”

박헌영도 저런 귀살쩍은 건물에 들어가기는 싫은지 안색이 나빠진다.

“나, 나도 싫어….”

하지만 안 씻고 자면 이보다 더한 악몽을 꿀 것 같다. 박헌영은 아무래도 들어가기 싫은지 슬쩍 물러나 있다. 가까이 가보니 상태가 더 안좋다. 유리창은 깨져있고, 건물 안은 불이 안 들어와서 기분나쁠 정도로 어둡다.

“야, 나 혼자 들어가라고?”

“아 진짜…. 야. 그냥 밤에 해.”

“아 제발, 부탁할게.”

내가 우는 소리를 내자 박헌영은 그제야 슬슬 따라온다. 안은 더 어둡다. 슬슬 밤이 되고는 있지만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은 엄청 어둡다. 이런 시멘트 건물은 버려지는 그 순간부터 폐가가 된다고 봐야 한다. 일단 이런 곳은 버려지는 걸 떠나서 사람만 없어도 공포영화 같은 분위기가 난다.

-부스럭

“으악!”

“야! 놀랐잖아!”

박헌영이 제 발소리에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심장 떨어질 뻔 했다. 나는 팻말을 보고 샤워장을 찾아낸다.

“야, 이거 문도 없냐 어떻게.”

어째서 군부대는 이런 폐건물을 그대로 놔두는걸까. 귀신 키워서 대체 뭘 하려고?

“야, 어디 가면 안돼. 알았지?”

“나도 같이 들어가면 안돼? 벽 보고 있을게.”

박헌영은 음흉한 속셈이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라 진짜로 무서운 것 같다. 나도 귀신 같은 건 안 무섭지만 이건 좀 심하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이상한 소리하지 마.”

나는 조심스럽게 샤워실 안으로 들어간다. 간이 칸막이 같은 건 먼지가 쌓여 있어서 옷을 놓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샤워실 안은 벽 부근에 작은 창문이 나 있고 거기서 아주 조금 빛이 들어온다. 당연히 밖보다 훨씬 어둡다. 샤워기들은 시뻘건 녹이 흘러나와 있어서 꼭 피라도 흘리는 것 같다.

-쏴아아아아

그래도 물은 나온다. 녹물이 조금 흐르더니 곧 맑은 물이 나온다. 나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다.

-끼이이…. 탕!

“으악! 으아아아악!”

“뭐, 뭐야! 왜!”

“저, 저거, 저거 지멋대로 쓰러졌어!”

샤워기 하나가 물을 틀어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귀신이라도 있는지 제멋대로 기울어져서 자빠져 버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박헌영의 팔을 잡고 매달려 있다.

“아, 뭐뭐뭐뭐뭐 그그그그그냥 우우우우우연이겠지.”

“니 목소리 지금 전혀 우연이라고 생각 안 하는 거 같거든! 더 불안해!”

파랗게 질린 박헌영이 애써 태연을 가장하는 게 더 무섭다. 박헌영은 나를 보더니 덜덜 떨며 몸을 돌려 나가려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박헌영의 뒷덜미를 잡는다.

“야, 야…. 진짜. 너 약속해.”

“어, 어?”

“진짜 보면 안돼? 벽 보고 있어…. 나가지 말고.”

“허, 야, 너…. 너 미쳤냐?”

“진짜. 진짜 보면 안돼. 죽일거야. 진짜로.”

이 공간에서 아무도 안 보이는데 샤워를 하면 나는 진짜 정신착란으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나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박헌영을 벽에 세워놓는다. 타행히 탈의실과 샤워장은 벽이 있어서 벽 안쪽에 있는 샤워기로 씻으면 된다.

나는 옷을 조심스럽게 벗으며 박헌영의 눈치를 살핀다. 박헌영은 벽을 보고 선 채 몸을 덜덜 떤다.

“야, 뭐야 이건! 무슨 플레인데!”

“닥쳐! 아무 플레이도 아니거든?”

“신이시여….”

조용한 와중에 내가 옷 벗는 소리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큰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쪽이 변태다. 하지만 나는 샤워기가 바닥에 떨어진 이후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다. 나는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며 말한다.

“그, 그 흥분하면 죽여버릴거야.”

“늦었거든.”

대체 뭐가 늦었다는 거지? 나는 박헌영 쪽을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평소였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것 같은데 이 상황에서 내가 박헌영을 나무란다면 내가 미친거다. 남자를 벽에 세워놓고 샤워를 하는 정신나간 여자가 여기 있다.

-쏴아아아

나는 물을 틀어놓고 물 속에 몸을 던진다.

“으으으! 차가워!”

“빨랑 씻어!”

온몸의 가죽이 수축하는 것 같다. 나는 최대한 빨리 타올에 바디워시를 묻히고 샴푸를 칠한다. 훈련병 때에는 삼십초만에 샤워를 해야 하는 극한상황도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으아아아아아아앗! 주, 죽을 것 같아!”

나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헹군다. 하지만 긴 머리를 충분히 물을 뿌려주지 않으면 거품이 제거되지 않는다.

-끼이이이이…. 쾅!

“으악! 악! 악!”

“왜! 왜!”

샤워기 하나가 더 쓰러지니까 나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진짜 귀신이 있거나. 박헌영은 내가 비명을 지르며 샤워실에서 도망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다.

“뭘 봐 미친놈아!”

“미, 미미미미미안!”

박헌영은 그 사이에 알몸인 나를 아래에서 위로 슥 훑는다. 물론 엄청 어두워서 제대로 안 보였을 거고 나는 몸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분노는 나중으로 미루고 샤워기를 튼 뒤 재빨리 몸을 씻는다. 춥고 무섭고 화나고 정신이 없다.

나는 탈의실 쪽으로 와서 대충 몸을 닦은 뒤 서둘러 새 속옷을 입는다. 나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중얼거린다.

“보면 죽어. 진짜 죽어 너.”

“안 봐. 빨랑 입어 나가게!”

옷을 입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덮는다. 나는 박헌영의 팔을 잡아끈다.

“빠, 빨리 나가자.”

“최악이다 진짜.”

우리는 진짜 후다닥 도망쳐서 구 간부숙소를 나온다. 바깥은 이제 제법 어둑해져 있다. 나는 뒷골이 서늘해서 뒤를 흠칫 본다. 박헌영은 건물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주저앉는다.

“야, 뭐 해. 빨랑 가자, 여기 기분나뻐.”

“야, 잠깐만…. 잠깐 생각할 게 좀….”

“…….”

박헌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가만히 앉아있다. 이거 그거 맞지? 그거지? 이제 나는 안 되는 그거 맞지?

허탈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박헌영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분 나쁠 이유는 없다. 이제 익숙해진건가. 나는 뒤를 돌아서 축축한 머리를 수건으로 비빈다. 어차피 내 억지에 어쩔 수 없었던거다.

“미안….”

뭐가 미안한지 박헌영은 침울한 목소리다. 미안할 게 없다. 상당히 치욕스럽기는 하지만 화는 안 난다. 오히려 저딴 거에 무서워서 박헌영을 코앞에 두고 샤워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쩐지 웃긴다.

“이, 이번만….”

“응?”

“이번만 봐줄게.”

박헌영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 한 채 말한다. 이거 괜히 낯뜨거워진다.

“내 몸 훑어본 것도…. 이번만 봐줄게.”

“아, 안 봤거든?”

“봤잖아 미친놈아!”

“안 봤거든?”

“훑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 그, 봤냐? 어두운데 어떻게….”

“니 눈깔 번쩍거리는 거 다 봤어!”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박헌영이 석고대죄라도 할 기세로 고개를 숙인다.

“다, 닥쳐! 봐준다니까!”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 박헌영은 곧 진정이 된건지 벌떡 일어난다. 아, 최악이다. 점점 이런 것들이 익숙해져 가고 있는 내 자신이 싫다. 원래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떤 지점들은 잠자코 넘어가야만 한다. 그런 것들을 점점 납득하고 있다. 나는 박헌영과 함께 막사 쪽으로 내려가며 말한다.

역시 박헌영이 안 따라와줬으면 샤워고 뭐고 없었을거다.

“고맙다…. 개자식.”

“고, 고맙긴 뭘…. 내가 고맙지.”

“너 역시 죽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봐준다며!”

“그럼 머릿속에서 지워 이 새끼야!”

나는 결국 박헌영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후려친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

다음 날, 나는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버스 맨 뒤에 앉아있다. 내가 창가, 옆이 박헌영. 가운데에는 이선준이 앉아있다. 마지막 날은 일정이랄 것도 없이 짐 정리하고 훈련 같지 않은 정신교육 한 번 뒤에 바로 퇴소식이었다.

진짜로 입대를 했다가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여간부 군복은 반납해서 나는 엄청 큰 내 군복과 전투화를 신고 있다. 힙합퍼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꼴이지? 싶지만 역시나 돌아가는 길이라서 그런지 기쁘다.

동사무소든 병무청에 연락해서 다음 해 예비군부터는 무조건 뺄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다들 수고해. 나는 이제 끝났네.”

이선준과 박헌영은 나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여러 불행 사이에서 이런 작은 행복조차 없었다면 나는 진짜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라서 행복해지는 지점이 있기는 있다. 물론 손익을 따져보자면 결과적으로 손해다. 항상 나오는 군대 생리 논쟁을 따져봐도 그렇다. 나는 물론 두 논제들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전혀 다른 문제니까.

하지만 나는 군대도 갔다온 주제에 이제 생리도 한다. 대, 대체 어째서?

“불행해….”

내 중얼거림에 박헌영 이선준은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본다. 박헌영은 피곤했던 건지 곧 꾸벅꾸벅 존다.

-슥

“이게….”

박헌영은 그러다가 내 어깨에 자기 머리를 얹어놓는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머리통을 후려치려다가 박헌영의 표정을 언뜻 본다. 진짜 자는 것 같긴 한데,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하.”

이런 표정을 지으면 때리고 싶어도 때려줄 수가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몸을 기댄다. 이선준은 날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당장 후려쳐도 시원찮을 판에 내가 박헌영을 놔두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나는 한숨을 푹 쉰다.

예전처럼 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박헌영이 내 어깨에 기대서 자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편하다면, 그렇게 해서 좋다면 내가 허락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그렇게 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달라져가는거다.

여자인 내 어깨에 기대서 자고 싶다면, 내가 괜찮다면 그래도 되는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때문에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양이지만.

창가로 들어온 햇살이 내 몸을 따뜻하게 데운다. 극한 상황이나 큰일이 난 건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곳이다.

졸려.

============================ 작품 후기 ============================

예비군 파트 끝임

큰 사건 없이 끝났음. 애초에 왜 이렇게 길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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