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84화 (84/224)

00084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나는 방탄을 벗은 채 허리춤에 끼고 있다. 방탄은 불편하다. 그리고 더럽고 냄새난다. 사격이 끝나면 예비군 훈련에서 큰 건 하나 넘긴거다. 내일 이 시간이면 집에 가는 버스에 타고 있겠지.

박헌영은 내려가는 길에 핸드폰을 본다. 애초에 예비군 훈련에서 모바일 통신기기는 전부 반납해야 하지만 반납 안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거야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선준도 안 냈다.

“흐음.”

박헌영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숨을 내쉰다. 그 태도가 어쩐지 이상하다.

“너 뭐 기다리는 거 있냐?”

이선준이 묻는다. 박헌영은 어제부터 시간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젯밤에 근무 설 때도 그랬다. 꼭 뭔가 기다리는 것처럼 저러고 있으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공모전 하나 낸 거 있는데 이제 결과 나올 때거든”

“무슨 공모전?”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인데. 예전에 갖고있던 거 좀 수정해서 보냈어.”

박헌영은 그 쪽 계열 공모전들을 전부 섭렵하고 있다. 여기저기 넣어대는 빈도로 따지자면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투고를 해봤을거다. 뭐든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에서 뭔가 해보려고 한다는 지점에서 박헌영만한 사람이 없다. 박헌영은 나와 이선준을 번갈아 보더니 말한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곧 큰 거 하나 있지 않냐?”

“맞아. 그거 곧 공모기간일텐데.”

별 생각은 안 하고 있었지만 박헌영이 말하니 떠올랐다.

“통합신인상, 그거 문학계 반발 때문에 연기됐어.”

이선준이 말한다. 등단이란 곧 각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 혹은 문예지에 작품이 실리는 것을 말한다. 그 뒤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무슨 자격증을 발급받거나 하는 건 아니다. 말하자면 공인을 받는 거라고 해야할까? 암묵적인 룰이라고 봐도 좋다.

통합신인상이라는 건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신인 발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최된거다. 그런데 기존 문학계에서도 그 내용 가지고 충돌이 많았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들도 있지만, 점점 그러한 등단 시스템의 효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다. 신춘문예에 달랑 하나 작품 싣고 난 뒤 그대로 사장되는 작가들이 전체 작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번에 신설된 통합신인상은 그러한 병폐를 저들 나름대로 개혁하기 위해 만들어진거다. 문인협회가 주최하고, 각 신문이나 문예지에서 후원하는 이 상은 매년 유력한 작가 한두명씩을 뽑기 위해 만들어진거다. 뭐 물론 논란은 많다. 등단제를 더더욱 엘리트화시켜서 문을 좁게 만드는 것이 문학계의 현실을 쇄신할 수 있는 진정한 방안이냐는 둥 비관적 의견이 많다.

첫 시상식을 치르기 전부터 이런 소란에 휘말려 있으니 뭐 이것도 얼마나 유지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뭐, 1년 뒤에도 무사히 열리게 될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예비작가들에게 있어서 그 문은 결국 금칠된 문이나 다름없다. 통과하는 순간 주목받게 될 건 당연한 일이다. 뭐 이렇게까지 말할 것도 없고, 결국 역대급의 큰 공모전이 하나 새로 생겼다는 식으로 말하면 충분하다.

상금은 말할 것도 없고, 올라가는 순간 작가들과 연계해서 연수과정까지 거친다고 알고있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궁지에 몰린 문학계가 스타 신인작가를 상품으로 발굴해내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비판도 결국 그 세계 안에 들어가야 목소리를 갖게 된다. 지금은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 세계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1년이라…….”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깨우는 것은 박헌영의 말이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쓰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돼.”

“나도 알아.”

박헌영은 괜한 참견을 하는 게 아니다. 그건 내가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은 퉁명스럽게 나온다.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나는 손바닥 뒤집듯 다른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

지금은 그 세계를 대비하는 기간이다. 취업을 하든, 작가가 되든 둘 중의 하나의 세계로 편입해야 한다. 이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다. 취업을 하고서도 작가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유예기간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같이 투고나 하자.”

“어?”

이선준이 날 보며 말한다.

“어중간한 데로 등단하느니, 차라리 좀 기다리면서 고치다가 큰 데에서 하는게 나을 수도 있어.”

뭐 그 말이야 맞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게 되는 게 중요하다. 뭐, 자잘한 데에 투고 안 하고 하나만 계속 다듬고 고쳐서 낸다면 어떨지 모른다. 이선준 말이 맞다. 나는 씨익 웃는다.

“내가 내면 너 떨어져.”

“퍽이나.”

“내기할래?”

어디 딱히 투고한다는 생각은 없어도 소설은 계속 쓰고 있었다. 나도 시간이 그리 많은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이번 학기와 다음 학기 전력으로 써보고, 안되면 한강에 가거나 취직을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내기 할 거면 뭘 걸어야 될 거 아냐.”

“뭐 이 자식아. 노예계약이라도 할래?”

내가 쏘아보며 말하자 이선준은 피식 웃는다. 이선준은 별 생각 없이 말한다.

“부탁 들어주기 같은 거?”

“좀 이상하지 않냐 그거?”

박헌영이 끼어든다. 음, 그렇다는 생각은 나도 하고 있었다.

“지는 놈은 등단도 못 한 불쌍한 인간인데, 부탁까지 들어줘야 되는거야?”

“그럼 지는 쪽이 이기는 걸로.”

애초에 경쟁을 우리 둘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꼭 둘 중에 한 명만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우리도 웃긴다. 나는 낄낄 웃는다. 등단한 쪽이 못 한 사람 부탁을 들어준다. 음, 이거 어쩐지 형평성 맞는 것 같고 좋네.

“상금 내놓으라고 해야지.”

“이거 완전 양아치네.”

“등단 할 생각이 없는 시점에서 너의 패배다.”

떠들다 보니 곧 막사 쪽이 보였다. 뭐, 일단 다른 문예지 같은 곳에 투고도 계속 하긴 할거다. 물론 그 통합신인상에 당선되는게 정말 좋은 기회인 건 맞지만…….

내가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

사격이 끝난 뒤에는 주특기 교육이 있었다. 별로 다를 건 없었고 그냥 정신교육이랑 똑같았다. 뭐라고 얘기를 하긴 하는데 그냥 간부 한 명이 빔 프로젝터 앞에서 중얼중얼 거리는 게 끝이다.

내일은 점호 끝나고 짐 정리 하고 퇴소하는 거니까 사실상 이게 마지막 일정이다. 예비군 훈련이라고 해봐야 정말 별 거 없다. 그냥 군부대에 이박삼일간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거다.

주특기 교육이 끝난 뒤에 정신교육 한 번이다.

어째서 이놈의 국가는 전역한 군인에게도 사상교육을 시키는거지? 이거 완전 파시스트 국가 아냐? 사상의 자유를 누려라, 대신 교육은 내 멋대로 할게. 이게 무슨 자유야?

그래, 나는 염세주의자고 회의주의자인데다가 비뚤어졌다. 남들이 다 맞다고 하는 것도 가끔은 틀리게 보인다. 그런 주제에 나는 군생활은 무난하게 잘 해냈다. 그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불의를 꽤 잘 참는 인간이다. 물론 몇몇 경우에는 못 참고 성질을 폭발시켜버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정신교육이 끝난 뒤에는 저녁시간이다.

“PX갈래?”

박헌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젓는다.

“밥 먹을래 그냥.”

아침은 안 먹었고 점심은 군대리아였다. 차라리 맛대가리가 없어도 밥을 먹는 편이 낫다. 물론 군대리아를 오랜만에 먹는 건 진기한 경험이었다. 신기하게도 우유와 함께 시리얼이 나왔다. 군대 많이 좋아졌다.

생각해보면 군대에서는 매일 우유가 나왔지. 오히려 전역하고 나서 우유를 먹지 않으니까 오히려 좀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담당병사와 함께 식당으로 향한다.

“예비역분들 모자 제대로 쓰고 가세요.”

“넹.”

나는 손으로 빙빙 돌리고 있던 모자를 머리 위에 살짝 얹어놓는다. 내 머리가 상당히 작아졌다는 건 모자만 써도 느껴진다. 헐렁하다.

“야 좀 제대로 써.”

“아 왜.”

헐렁한 베레모가 머리에서 제멋대로 움직인다. 전역할 때 전역모를 따로 후임들에게 받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쓰고 다니기 쪽팔려서 어딘가에 박아뒀다. 베레모도 웃긴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식당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 나도 놀라고 말았다.

“어…. 뭐야 이거.”

“왜?”

“베레모가 패션 아이템으로 보이는데?”

아무렇게나 썼음에도 베레모가 내 모습, 그리고 약간 헐렁한 군복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예쁜 여군 사진 같은 것들을 다 갈아치워버릴 것 같은 모습이다. 이선준은 내가 창 앞에 멍하니 서있짜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으악! 왜 이래?”

“밥이나 처먹고 가자 빨랑.”

“씻고 싶은데.”

저녁을 먹고 난 뒤 생활관에서 나는 전투복을 풀어헤치며 말한다. 당연히 안에는 반판 티셔츠를 입고 있다. 어제는 그럭저럭 참을만 했지만 오늘은 땀을 흘린 탓에 조금이라도 빨리 씻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말했듯 샤워실과 세면장 쪽으로는 걸음도 하기 싫다. 못 볼 꼴을 무조건 보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몸이 끈적끈적거린다. 땀이 잘 나는 체질도 아닌데 오늘은 특히 더운 탓에 더 그렇다.

“족구 하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선준은 창밖에서 예비역들이 족구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나도 시간 때우기로 몇 번 하긴 했지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이선준은 눈을 못 떼는 걸 보니 군대에서 족구를 꽤 한 모양이다. 저 양반도 이제 아재가 다 됐군.

샤워실 통제를 하는 건 여덟시는 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 막 오가는데 거기서 씻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문 잠긴 샤워실에서 내가 씻는 모습을 누가 벽 너머에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나쁘다.

오늘 밤에 누군가는 화장실에서 나를 생각하며 성욕을 배설해댈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여기서 씻기는 싫다.

“어디 가냐?”

내가 일어나자 박헌영이 묻는다.

“행정반.”

행정반에는 어제와는 다른 당직사관이 있다. 계급은 중사다. 그는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서 슬쩍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다.

“아, 무슨 일로….”

“저…. 씻고 싶은데….”

“아, 샤워실 통제는….”

“아뇨, 여기 말구요. 다른 데는 없어요? 찬물 나와도 괜찮으니까….”

찬물 더운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인적이 없는 곳에서 씻고 싶다. 간부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원래 이게…. 석식 이후에는 따로 움직이면 안 되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직사관을 쳐다본다. 짬 안 되는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적당히 둘러칠 줄을 모른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그럼 어딘지만 알려주세요. 안 갈 테니까요.”

“네? 그게…. 무슨?”

“그러니까, 어딘지 알고만 있을 거에요. 안 가요. 그러니까 알려 주세요.”

두 번 말한 뒤에야 당직사관은 내 말이 뭔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보고 안 하고 제멋대로 움직인 걸로 할 테니까 무슨 일 나도 네 책임은 안 묻겠다는 뜻이다.

“아, 막사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시면 건물이 하나 있을건데. 거기가 지금 안 쓰는 간부숙소거든요? 네. 뭐 그렇습니다.”

“고마워요.”

내가 웃자 그 중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아마 당직사관이 말한 장소에는 샤워실이 있을거다. 해가 슬슬 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어둡지도 않다.

“금일 암구어 호랑이/세탁기 입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고, 그 간부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드는 걸 뒤로하고 행정반을 나왔다. 솔직히 뭘 해도 잘 먹히는 건 내 불편함의 근원인 동시에 묘한 편리함을 가져다 주는 근원이기도 하다. 못생겨서 생기는 불이익이 있는 것 보다는 예뻐서 생기는 불이익이 있는 편이 훨씬 낫다. 뭐 그런 셈이겠지

생활관으로 돌아온 뒤 나는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속옷, 수건을 챙긴다. 이선준은 어디 갔는지 없다.

“이선준은?”

“족구 구경하러 갔어.”

“….”

혼자 가는게 제일 좋겠지만 나는 그럴 배짱은 없다. 박헌영은 내가 세면도구들을 들고 있자 멀뚱멀뚱 나를 쳐다본다. 이선준은 어제 이후로 어쩐지 쳐다보기가 좀 애매해졌다. 박헌영은 뭘 부탁하는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야, 나…. 부탁할 게 있는데.”

“씻겨줘?”

“……너는 내가 미안하다가도 안 미안하게 만드는 훌륭한 재주가 있어.”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간부 숙소 앞에서 좀 있어달라는 뜻이었다. 박헌영은 귀찮다는 표정이면서도 순순히 일어난다. 내가 나쁘다는 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혼자 이곳을 돌아다니는 건 너무 무섭다.

============================ 작품 후기 ============================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장르적 캐릭터 관점으로 바라보면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힘들거다.

내 소설이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고, 캐릭터성이 아니라 인물성으로 접근해야 된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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