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야, 야."
-툭툭
"흣!"
누군가 내 볼을 건드리는 감촉에 나는 내 스스로 놀랄 정도로 몸을 움츠리며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 나를 내려보는 실루엣에 나는 몸을 순식간에 뒤로 뺐다.
"누, 누구세요?"
아주 잠깐이지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점차 깨닫게 되면서 긴장이 풀려간다.
"야, 왜, 왜 그렇게 놀라냐.... 미안."
"어? 아, 아니.... 아니 그냥. 괜찮아."
어둠 속에서 날 쳐다보는 실루엣,
나는 이런 경험을 지금껏 두 번 했다.
두 번 다 나에게 좋지 못한. 좋지 못한 것을 뛰어넘어서 최악의 기억이다. 잠은 순식간에 확 달아나 버렸다. 낯선 환경 탓인지 자면서도 긴장해 있던 모양이었다. 피곤한 탓이었는지 잠을 아예 못 잘 줄 알았는데 눕자마자 잠들었던 것 같다.
"벌써 내 차례야?"
"벌써가 아니거든? 빨랑 옷 갈아입고 교대해."
"어, 응."
박헌영은 발소리를 남기고 생활관에서 나갔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랬으면 썩 좋은 꼴은 못 봤을거다. 맞은편은 박헌영의 침대고, 내 옆은 이선준의 자리다. 나는 조심스럽게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전투화를 신는다. 모자를 대충 걸쳐쓰고 탄띠를 맨 뒤 생활관 바깥으로 나간다.
복도 중앙에 박헌영이 앉아있다. 빠져가지고 근무를 앉아서 서고 있다. 심지어 반납 물품인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다. 병사로 보이는 둘은 잘 서서 근무를 서고 있다. 이거 뭐 그냥 옆에 앉아서 잠이나 퍼자도 별로 상관 없을 것 같다.
나는 시계를 본다. 교대 기준시간은 한 시고, 지금은 열두 시 오십분이다. 나는 박헌영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한다.
"너 왜 이렇게 일찍 깨웠냐, 양심없는 새끼야."
"원래 교대 십오분 전 기상이거든? 어디 당나라 군대 나와서 모르나보네."
"됐고 빨리 교대나 해."
나와 같이 근무를 설 병사들은 이미 장구류를 갖춘 채 나와 있었다. 나를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 살살 훔쳐보고 있다.
나는 주머니에 손 넣은 채 설렁설렁 걸어서 지휘통제실로 걸어간다. 내가 들어가자 책상 앞에서 당직사관이 졸고 있다. 당직 서면서 간부들 자는 거야 뭐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는 당직병까지 자고 있다.
이거 신고를 하라는거야 말라는거야?
"저기요."
내가 옆에서 작게 속삭여도 당직사관은 그대로 자고 있다.
"저기요. 당직사관님."
조금 더 크게 말하자 그제야 당직사관은 흠칫하며 눈을 떴다. 당직사관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어! 뭐야! 아...."
당직사관은 웬 여자가 눈앞에 서있어서 놀란 모양이었다. 잠결이니까 뭐 그럴 수 있다.
"교대요."
"아, 네. 그.... 불침번은 십오 분 전에, 경계근무자들은 삼십 분 전에 깨우시면 됩니다."
"얘네들이 잘 해주겠죠."
내가 대놓고 말하자 당직사관은 뒷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야, 너네가 잘 해야 되는거 알지?"
"예, 알겠습니다."
보다 선임으로 보이는 상병이 대답한다. 교대 지시를 받고 지휘 통제실에서 나간다. 나와 같이 근무를 서는 녀석들에게 별 관심은 없다. 나는 오지랖 부리는 거 싫어한다. 얘네들 군생활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중앙으로 나오자 박헌영이 졸린 눈으로 날 쳐다본다.
"피곤해 뒈지겠네."
"빨랑 엎어져 그럼."
박헌영은 근무를 같이 서던 두 병사들을 데리고 복귀신고를 위해 지휘통제실로 걸어간다. 나는 앞 뒤 볼 것 없이 소파에 앉아버렸다. 병사 둘은 근무표를 든 채 열심히 쳐다보고 있다. 나는 녀석들을 등진 채 앉아있다.
긴장이 풀리니까 사라졌던 졸음이 다시 몰려온다. 하지만 자고 싶지는 않다.
"나한테 신경쓰지 말고 근무 잘 서."
"아, 네."
선임으로 보이는 녀석이 대답한다. 핸드폰이나 볼까 하다가 귀찮아져서 멍하니 앉아있다.
군대에서 제일 힘든 건 딱 세 가지다.
아침점호, 저녁점호 그리고 근무.
훈련이나 행사는 자주 있는 게 아니다. 뭐 이것도 부대마다 다르지만 분기에 한 번, 많으면 서너번 정도다. 하지만 점호는 매일 두 번씩 겪어야 하고, 근무는 많으면 하루에 두 번, 없어도 이삼일에 한 번씩은 꼭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근무는 그 무료하고 긴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점에서 짜증난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그 시간을 견뎌내는 방법들은 가지가지다. 부사수랑 아무 얘기나 지껄이는 게 보통이다. 나도 그랬다. 그러다가 지치면 생각을 했다.
나야 뭐 생각할게 많았다. 어떤 소설을 쓸지에 대해서, 과연 내가 등단을 해서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물론 생각은 결론을 내는 법이 거의 없다. 생각은 항상 생각으로 끝난다.
그러고 보니 결국 군대에서 그 많은 고민을 했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해답을 내리지 못했구나.
어쩐지 자괴감이 든다.
내 불안과 달리 근무자들은 나는 신경쓰지 않고 앞만 보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참군인들이다.
뭐 땀을 흘리고 그런 건 아니지만 씻지 못한 탓에 꿉꿉하다. 무엇보다 창고에 오래 처박혀있던 옷을 입은 탓에 더 그렇다.
열두시가 지났으니 이제 내일이면 퇴소다. 기말시험만 보면 이번 학기도 끝난다. 물론 아직 기간이 좀 남아있다. 졸업도 멀지 않았다.
나는 소설을 계속 쓰고 싶다. 내 한계를 봤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는다. 나는 아직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원에 가고 싶지는 않다. 거기까지 부모님에게 지원을 바라는 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한정운 덕분에 책도 많이 보고 있다. 소설에 대해서도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 쓰고 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낙관적인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문창과생이 그렇듯, 나도 같다.
나는 내 미래가 불투명하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어디에도 걸쳐있지 않다. 나는 내 꿈을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그래서 이 와중에 학점을 잘 따려고 노력한다.
나는 어떻게 취직하고, 어떻게 살아가리라는 전망은 없다. 나는 어느 땅도 밟고 있지 않다. 그저 양쪽에 반쯤 걸쳐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비굴한 낙관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항상 이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한다. 게다가 남자도 여자도 못 되는 지금 이 상황까지. 나는 정말 완벽하다.
나는 너무나 완벽한 회색분자다.
그러니까 김수영이 말했듯, 나는 어딘가 반쯤 걸쳐서, 꼭대기에는 서지 못하는 그런 인간이다. 물론 김수영은 그런 말 했던 주제에 당시의 정점이었지. 내 주변의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회색분자들의 공간인 문창과의 세계에서 박헌영, 한정운, 이선준은 다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 확고하다.
다들 제 나름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 박헌영은 변태에 사상범죄자로 매도당하면서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 이선준은 자신이 믿는 것을 끝까지 관철하는 행동력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한정운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공부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친구를 잘못 만났다. 이래서야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건 열등감밖에 없잖아.
다들 조금씩은 못나도 될텐데.
이래서 내가 근무를 싫어한다. 결국 생각을 하면 이런 비관적인 생각으로 결론이 치닫는다. 항상 느끼지만 나는 고민을 해봐야 별 소용이 없다.
“저, 설원 병장님.”
멍청하게 앉아있는데 누군가가 날 부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와 같이 근무를 서던 녀석 중 한 명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녀석은 난처한 표정이다. 이런 표정을 잘 알고 있다. 뭔가 껄끄러운 부탁을 선임에게 어쩔 수 없이 하고 싶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왜?”
“저…. 정말 죄송한데.”
“뭔데.”
내가 보채듯 말하자 녀석은 근무표를 가져오며 말했다.
“그게, 경계근무 교대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예비역 선배님 한 분이 안 일어나셔서….”
다음 근무자를 대신 깨워달라는 뜻이다.
뭐 이런 경우야 왕왕 있다. 근무 서라고 깨워야 하는데,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는거다. 일부러 안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진짜로 깊게 잠들어서 그런 걸수도 있다. 괜히 막 흔들어 깨우면 싫은 소리 한바탕 듣게 될지도 모르니까 병사들 입장에서는 곤란하겠지. 나는 녀석이 들고 있는 근무표를 건네받는다.
“누군데?”
“이 분입니다.”
녀석이 한 명의 이름을 가리켰다. 나는 그 예비역이 있다는 생활관 앞에서 침대 위치표를 확인한다. 녀석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나를 따라온다. 그러고 보니 교대시간 30분 전에 깨워야 하는데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랜턴 있어?”
“아, 여기 있습니다.”
나는 사수에게 랜턴을 건네받는다. 왼쪽 첫번째 침대다. 위치 자체는 어렵지 않다.
“원래 위치에 가 있어. 내가 깨워볼게.”
“감사합니다.”
나는 손짓으로 근무자들을 돌려보내고 조심스럽게 생활관 문을 연다. 어쩐지 긴장된다. 왼쪽 첫번째 침대에 사람이 잠들어 있다. 첫 자대배치 받고 훈련 상황에서 불침번 근무를 서는데 병장 하나가 지독하게 일어나지 않았던 적이 있다. 결국 근무 교대시간이 늦어지고 나는 뭣도 모르는 상태에서 심하게 혼난 적이 있었다.
그 병장은 곧 전역했고, 나는 군생활 시작부터 단단히 찍히고 시작해야 했었다. 상태 안 좋은 놈이라는 오명을 벗는 게 엄청 힘들었다.
“저기요. 아저씨.”
나는 예의상 몇 번 불러본다. 꼼짝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볼 거 없이 랜턴을 켜고 잠든 사람의 얼굴에 비춘다. 환한 빛이 비치자 그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움찔거린다.
“아…. 씨발…. 뭔데?”
아마 내가 병사인 줄 알았던 건지 말을 함부로 뱉는다. 상종하기 싫은 타입이다. 잠에 취한 걸 보니 진짜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잠결에 욕 정도는 할 수 있다. 나는 평범하게 말한다.
“교대시간 됐으니까 일어나요.”
“어? 어…. 뭐야? 누구야?”
여자 목소리가 들리니까 당황했는지 남자는 눈을 꿈뻑거리며 날 쳐다본다. 랜턴을 꺼놨기에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거다. 남자는 누운 채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근무 교대시간 한참 지났으니까 일어나요.”
“아…. 한 타임 더 서라고 해. 씨발…. 뭔 근무야 좆같이.”
뭐지, 이건 이상한 새끼 같은데. 내가 병사가 아닌 걸 뻔히 알텐데 왜 욕이지? 나는 주먹은 약해도 성질 드러운 건 어디 가서 안 꿀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역시나 이 상황에서 누구랑 싸움 붙어봐야 좋을 건 없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럼 근무 거부로 보고할게요. 나중에 훈련 받으러 한 번 더 오시면 되겠네요.”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닫고 나왔다. 말로 갚아주느니 나중에 한 번 더 훈련 받는 쪽이 더 통쾌한 복수다. 아니나다를까 문이 벌컥 열리고 맨발로 그 자식이 뛰쳐나온다.
“아, 잠깐, 아 잠깐만! 일어났어요!”
녀석은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져서 날 쳐다보고 있다. 예비군 훈련을 한 번 더 와야 된다는 건 그만큼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나는 눈을 오만하게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2분 안에 안 나오면 진짜로 보고할거에요. 애들 기다리잖아요.”
이미 준비를 끝낸 경계근무 병사들이 중앙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예비역답게 그 녀석은 옷을 부랴부랴 입은 채 장구류를 대충 들고 나왔다. 나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아 씨발 좆같네….”
그 녀석은 나오면서도 욕을 궁시렁거린다. 그 녀석은 교대할 생각은 안 하고 내 맞은편에 앉은 채 전투화 끈을 묶는다.
“좆 같지 않아요? 무슨 예비역한테 근무야 진짜 씨발….”
“대뜸 모르는 사람한테 욕부터 하는 당신이 더 좆같은데요.”
나는 녀석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섬뜩하게 나가자 그 녀석은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