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일단 여기에는 여자화장실이 없다. 이 부대에는 여간부들이 없는건지 여자화장실을 설치해 놓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왜 여자용 군복이 있는거야?
일반 화장실은 시도때도 없이 사람들이 들락거린다. 거기에 대뜸 들어가서 쿨하게 오줌싸고 나올 만큼 내 심지는 강하지 않다.
진짜 터져버릴 것 같은 지경이 되어서야 참지 못하고 이선준을 끌고 나온거다.
"야, 근데 어떻게.... 어디서?"
"모르겠어. 어디 사람 없는데서.... 혼자 가기 무섭잖아."
혼자 나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식당 같은 곳에도 따로 화장실이 있겠지만 지금은 잠겨있을거다. 차라리 아까 밥을 먹으러 갔을 때 간부용 화장실을 쓸 걸 그랬다.
가로등이 몇 개 켜져 있지만 많지 않은 탓에 주위는 어두컴컴하다.
큰거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그랬으면 탈영을 했거나 자살을 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거다.
"일단 막사에서 좀 먼데로 가자."
"수하 안 걸리게 초소 없는데로 가."
우리들은 걸었다. 막사 옆 도로를 타고 올라간 다음, 산길로 들어가면 작은 일 볼 데야 얼마든지 있을거다.
"여기 어때?"
"아, 알았어."
나무들이 좀 있고,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나는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낙엽을 밟으며 들어갔다.
"어디 가면 안돼."
"아무데도 안 가."
"진짜야. 어디 가면 죽여버릴거야."
"안 간다니까?"
이선준이 날 쳐다보며 말한다. 모멸감이 느껴지지만 지금은 이 으슥한 군부대에서 볼일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온몸에 날이 선 것 같다.
"그리고 여기 쳐다보지 마."
"알았다고, 빨랑 싸."
이선준이 뒤를 돌아본다. 나는 낙엽을 헤치고 들어가 적당한 곳에서 바지를 내린다. 그리고 맥이 탁 풀린다. 차가운 바람이 맨살에 닿는다.
"...."
죽고싶다.
소리 너무 크다.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는거지? 꽤 멀리 온 것 같은데 분명히 들릴거다.
볼일을 해결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육체의 고통이 가시니까 안심이 된다.
볼일을 다 보고 내려왔을 때 이선준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 등에 대고 말한다.
"가자."
이선준은 비웃지 않았다.
"불쌍한 자식."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손을 잠시 얹었을 뿐이다.
"좀 춥네."
만약 혼자 왔다면 예비군 훈련이고 뭐고 때려치고 뛰쳐나가 버렸을거다. 이선준하고 박헌영이 같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뭔데?"
이선준의 말에 나는 선뜻 대답했지만 덜컥 겁이 난다. 딱히 잘못한 게 없으면서도 나는 누가 뭘 물어보고 싶다고 하면 겁이 난다. 무슨 질문을 할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안 잡힌다.
"너 그 때 있잖아."
"그 때가 언젠데?"
"그 영화관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갑자기 온몸이 경직되는 것 같다. 이선준이 뭘 물어보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예전에 박헌영과 손을 잡고 있던 걸 말하는거다. 이제는 꽤 예전 일이다. 나는 다급하게 내뱉는다.
"그만 물어봐."
"...그래."
거기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박헌영이 무작정 잡았고, 나는 손을 빼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박헌영과 있었던, 박헌영이 양보하고 희생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나? 그러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게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들을 말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말 할 수 없다. 말하는 순간 뭔가 어긋나버린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뭔가 어긋나 버린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날카로워진다.
“그게 왜 궁금한건지. 그 질문이 왜 필요한건지에 대해서 날 설득시켜봐.”
나는 여전히 이선준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한다. 사실 이선준은 그런 것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유도 없다. 그것을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변질되어버린 무엇인가를 상징한다. 울적한데 이거, 나는 말을 맺는다.
“그러면 대답해줄게.”
“…….”
이선준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내가 그걸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조금
기분이 더럽다.
"설원 병장님?"
"어?"
생활관으로 돌아와서 조금 빈둥거리자 담당구역 청소 시간 직전이었다. 최일병이 생활관으로 들어오며 말한다.
"지금 샤워실 통제한다고 씻으셔도 된답니다."
"...."
당연히 나는 씻지 못했다. 박헌영은 진작에 씻었고, 이선준도 마찬가지였다. 샤워실에 가봐야 불알 덜렁덜렁 거리는 남자들만 있는데 내가 거기 가서 씻을 수 있을리가 없다.
세면장에 가서 얼굴만 대충 씻을 수도 있겠지만 샤워실에 자리가 없으면 거기서도 샤워를 해대는 인간들이 있다. 없을 수도 있지만 있을 수도 있기에 나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기 온 뒤로 물 한 방울도 못 묻혔다.
지금부터 샤워실을 통제할테니까 씻으라니, 뭐 군대다운 배려다.
사람들이 샤워실 지나가면서 내가 샤워하고 있다고 수군거리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안한다고 보고해."
"네? 앗!"
나는 최일병의 순수함에 감탄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군대식 말하기에 대해서 트집잡고 싶지도 않다. 일단 저가 말해놓고도 스스로 놀란다.
"안. 해. 그렇게 말하면 돼. 내가 이유를 말해줄 필요까지는 없잖아."
"예, 알겠습니다."
"너 안 씻으려고?"
"응."
박헌영의 말에 나는 침대에 누워서 대답했다.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다. 이선준이 말한다.
"뭣하면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지 뭐."
"됐어. 그런 특별취급 받는거 사람들이 봐봐야 엿같은 소리만 더 듣지."
나는 누워서 보던 TV를 본다. 뭐, 생활관에만 박혀 있으니까 어디 놀러 온 것 같다. 혼자도 아니고 친구들도 있으니까.
저녁점호를 받는 기분은 생소하다. 뭐 요즘은 앉아서 점호를 받는다고들 하지만....
"TV끄셔야 됩니다."
우리의 최일병이 저녁점호 시간이라고 또 모르는 소리를 한다. 빠질대로 빠져버린 예비역에게 규칙을 논하는 걸 보니 얘는 군생활이 더딘 것 같다.
"알아서 할테니까 당직사관 오면 말해. 무슨 예비군 훈련인데 저녁점호야?"
박헌영이 투덜거린다. 멀리서 부대 차렸 하는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 크네.
그러나저러나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딱히 TV가 재미있어서 보는 건 아니다. 이선준은 책을 보고 있고, 나는 그냥 멍청하게 앉아있다. 박헌영도 그냥 말하는 대로 듣기 싫으니까 저러고 있을 뿐이다.
그냥 의미없는 반항이다. 박헌영도 저러는 거 보면 사람이 좀 못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는 더 나은 인간이라거나 그런 것도 아니지만.
"부대에 차렸!"
당직사관이 오고 점호를 시작한다.
"12생활관 저녁점호 인원보고. 총원 4 열외 무 현재원 4 이상 저녁점호 준비 끝."
내 예상과 다르게 최일병은 매끄럽게 인원보고를 마쳤다. 물론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정적을 깨고 당직사관보다 먼저 말했다.
"야, 너 여기서 자?"
"아, 그, 그게...."
나랑 박헌영, 이선준 뿐인데 총원이 4명이라는건 저 녀석도 생활관 인원에 배치되어 있다는 뜻이다. 내 의문을 알아챘는지 당직사관이 말했다.
"아닙니다. 보고를 잘못했네요. 너는 인원에서 빼야지."
깜짝 놀랐다. 전혀 모르는 녀석이 같은 공간에서 자야 한다면 나는 정말 내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멍청한 자식이 간떨어지게 만들고 있어.
오늘 당직사관은 남자 상사다. 그는 생활관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어디 건강에 이상 있으신 분?"
셋 다 대답이 없다.
"설원 병장님은 어때요. 좀 괜찮습니까? 아까 샤워실 통제 해드렸는데 안 씻는다고 하셔서."
"저 불침번 서는데 근무 끝나고 씻으려고요."
내 말에 당직사관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뭐 그 쪽이 편하시다면요. 힘든 건 있으십니까?"
"다 힘든데 지금이 제일 힘들어요. 빨리 끝내주세요."
내가 징징대듯 말하자 당직사관은 한바탕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박헌영과 이선준은 쟤가 저런 것도 할 줄 아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네, 금방 끝내죠. 내일은 사격이랑 주특기 훈련 있습니다. 밤늦게 자봐야 내일 피곤하기만 하니까 일찍 주무세요."
-네에
너절한 세 명의 대답이 울리고 당직사관은 경례를 받으며 나갔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낮게 감탄사를 뱉었다.
"야, 너 대박이다."
"뭐가."
"앙탈도 부리네 이제."
"왜 또 보고싶냐?"
"응."
"내 근무도 니가 서주면."
"꺼져."
"아잉. 너무해. 한번만요, 네?"
"...어우 ㅆ.... 못 볼 걸 봤네 내가."
"미친놈이 지가 해달래놓고."
박헌영과 가벼운 실랑이가 오갔다. 이선준은 그 꼴을 보며 킥킥 웃었다. 최일병이 뒤쪽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앞에 똑바로 보시지?"
박헌영이 아니라 나다. 박헌영식의 꼰대짓은 싫지만 내 불쾌함을 건드린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유 없는 갑질은 하기 싫다. 하지만 내게 이상한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내가 그걸 감내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저 자식이 군생활을 잘 하건 못 하건 관심없다. 허튼 짓거리만 안 하면 된다. 그래서 자꾸 얼빠진 놈처럼 구는 것도 그냥 아무 말 안하는거다.
"다들 취침!"
복도에서 당직사관의 목소리가 울린다. 평소에 자는 시간보다는 이르지만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졸리다.
"바로 잘거냐?"
"그럼 뭐 하게?"
박헌영의 말에 이선준이 답한다. 박헌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꺼놓은 TV를 다시 켰다.
"아 뭔 이 짬에 근무야."
그러고 보니 박헌영은 열한 시 반부터 한시까지 불침번이다. 취침시간은 열 시부터니까 자기도, 안 자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박헌영은 안 잘 셈인 모양이다. 생활관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으니 다른 사람이 불편해할 일도 없다. 게다가 문 창에 도화지도 붙여놨으니 TV를 본다고 해서 불빛이 새나갈 걱정도 없다.
"소리 좀 줄여놓고 봐라."
이선준은 심드렁하게 말하고 누웠다. 박헌영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TV를 보고 있다.
"너 안 자게?"
"어차피 좀 있다가 나가야 되는데 뭐하러 자. 피곤하게."
박헌영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나는 사실 좀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다. 나를 깨우는 게 박헌영이지만, 박헌영을 깨우러 오는 건 지금 불침번 초번을 서는 근무자다. 모르는 사람이 여기로 들어올거다.
아무 일도 없을 걸 알지만, 누가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껄끄럽다.
물론 내가 예민하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타인을 쉽게 믿지 않는다. 이제는 더더욱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박헌영이 자지 않고 근무 시간에 알아서 나간다면 생활관에 누가 들어올 일은 없을거다. 박헌영은 그것까지 생각하고 평소에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TV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냥 자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진짜로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면, 생색 정도는 내도 될텐데.
그렇게 생각해 보지만 박헌영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그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
미안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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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