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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7화 (7/224)

00007 시궁창이라도 나만은 내 삶을 사랑해줘야지 =========================

“조금 생각해보고 말씀드리면 안될까요?”

“뭐 괜찮습니다만, 그대로 너무 오래 지내시면 보호 프로그램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답해주셔야 합니다. TS발병자는 얼굴이 쉽게 알려져서 너무 늦으면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감자나 캐면서 살아야 될수도 있어요.”

“퇴원해도 되는거에요?”

“TS발병자들은 굳이 의학적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설은 그냥 격리공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 뿐이죠. 당장 퇴원하셔도 됩니다.”

그 남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진원물산 물류팀 과장 김현식’ 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걸 보고 나는 병신같이 국정원 직원이 아닌가 의심까지 했다. 당연히 신분위장용 가짜 신분증은 얼마든지 만든다는 생각을 한 삼십초 지나고서야 떠올렸다.

“퇴원할래.”

“학교로 가게?”

“방에 박혀서 생각 좀 해볼래.”

그러고 보니 모든 수업을 제멋대로 제낀 셈이었다. 아 내 학점. 이 평점에는 이제 뭔 짓을 해도 복구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지막이 가까워 오니까 열심히 하고는 싶었다. 그런데 며칠이나 빠져버렸으니 이제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결로 해주려나, 아니면 TS발병으로 인한 출석인정요청서 같은거 내면 해주려나. 정말 짜증난다.

자취방이 있는 태원시에 도착하니 시각은 이미 밤이었다. 환자복에서 다시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니 입었던 모든 옷이 안 맞았던 탓이었다. 결국 선준이 형이 나가서 옷을 사왔고, 그걸 대충 입고 오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나는 대학가 근처에 있는 원룸에 살고 있었다. 나는 지금 내 사이즈에 맞는 트레이닝복과 저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돈이 없었다. 결국 옷은 전부 선준형이 계산했다. 군바리가 돈이 얼마나 있겠냐는 내 말에, 모아둔 돈이 조금 있었고, 보조금 받으면 술이나 한 잔 사라고 했다.

하긴, 이 사람과 나는 이런 사이였다. 서로 돈을 빌려도 그걸 갚을 때 돈으로 주지는 않았다.

“생각 좀 해보고. 문제 있으면 연락해라.”

“?”

이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내 자취방 앞에서 이선준은 어딘가로 가려고 했다. 항상 휴가를 나와서 고향에 안 가고 학교 근처로 오게 되면 항상 내 방에서 자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있었다.

“저기, 지금 굉장히 실례되는 발언 한 것 같은데.”

“뭐가?”

“어디서 자려고?”

“박헌영이네 집에서 자면 되잖아.”

“그러니까 왜 거길 가?”

거기 가서 자는 것도 굳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박헌영과 나, 그리고 이선준 셋이서 술을 먹고 서로의 자취방에서 늘어져 잤던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자취방 앞에서 거기로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심장을 쿡 하고 찔러들어오는 느낌이 있었다. 본인도 뭔가 켕기는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인간은 올곧은 사람이다. 할 말은 하고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는 건 자기가 뭘 잘못했거나 켕기면 말문이 급속도로 막힌다.

“지금 나 배려하는거야?”

“어? 아, 그렇다기보다는….”

“맞잖아. 지금 나 여자됐다고 배려해주는거잖아. 이거 내가 상당히 기분나빠해도 되는 상황인거지? 나 설원이야. 형이랑 마초 소리 같이 듣던 사람, 기억 안 나?”

나는 두 번이기는 하지만 연애를 해봤고, 눈앞의 이선준은 마초적 성향에 목 매는 여성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마초극혐을 외치는 페미니스트들에게는 항상 음식물쓰레기 정도 수준으로 욕을 먹었다(물론 뒤에서). 물론 쌍마초인 만큼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서, 여성은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식도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내 신랄한 흑역사 들추기에 이선준은 얼굴이 붉어졌다.

“야, 언제적 얘기를 하냐?”

“내가 요만해졌다고 나도 여자취급 받아야 한다는 거잖아! 나 이제 친구 아니야? 같이 방에도 못 들어가? 껍데기만 바뀌었어! 알맹이는 그대로라고!”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주변 사람들이 쳐다봤다. 예전과 바뀐 거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면, 지금은 미친년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서운했다. 서운하다기보다 내 신세의 처량함이 문득 실감났다.

억지라는거 안다. 원래 남자라는건 내면보단 외면이 중요한 법이다. 내 껍데기가 바뀌었고, 여성적 기능도 당연히 제대로 기능할 것이다. 알맹이가 남자니까 남자로 대접해줘. 이런건 그냥 지랄맞은 헛소리밖에 안 된다. 발병자들이 타인이었을 때에는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하지만 내 경우가 되니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엄한 놈이라면 모르겠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가 나에게 갑자기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정말 슬프고 서럽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배신감이 마음을 푹 찌르고 들어온다.

“알았어, 들어가, 들어가면 되잖아? 애새끼같이 왜이래?”

“다음에 또 그런 싸가지없는 생각하면 똥구멍에 죽창을 꽂아버릴거야.”

“이런 미친놈이 형한테 말을 막던지네.”

“그래, 그렇게 말하라고.”

말투가 이제야 좀 거칠어진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런게 좋다.

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대충 밀어놓았다. 원래 이십대 남자가 혼자 사는 방은 더러운게 당연했다. 더럽지 않은 새끼는 변태거나, 결벽증 환자 두 경우 뿐이었다.

남자가 둘 이상 살면 어떻게 되냐고? 그건 간단하다. 엄청 깨끗하거나, 거의 쓰레기장 수준으로 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깨끗한 경우는 서로 싸우는 게 싫어서 서로 경쟁적으로 정리하는거다. 군생활 해본 사람은 단체생활의 열받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장인 경우도 같은 맥락이었다. 한 명이 안 하면 다른 한 명도 조금 하다가 엿같아서 안한다. 그러니까 쓰레기장이 된다. 예비역들의 좋은 예와 나쁜 예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도 내 방은 쓰레기장 수준까지는 아니다.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할 정도 수준은 된다. 하지만 이선준은 그렇지 않은지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말했다.

“너 내가 좀 치우고 살라고 항상 말했던 것 같은데?”

“잠 잘 곳, 밥 먹을 곳, 똥 쌀 곳만 있으면 되는게 집이야.”

“화장실에 버너 갖다놓고 살지 그래?”

“오, 좋은 생각인데?”

내가 킥킥거리며 웃자 이선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나는 양호한 편이다. 박헌영은 딸딸이친 휴지도 방구석에 굴려놓고 산다. 그래서 이선준씨가 박헌영의 방에 놀러가는 날이면 박헌영은 그 전날부터 방을 청소한다. 예전에 이선준이 그 꼴을 보고 진짜로 유혈사태가 일어날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쪽 같은 인간은 성격답게 방을 항상 살풍경할 정도로 청소해 놓는다. 지금이야 군복무 중이라서 방이 없지만, 복학한다면 수행사제의 방 같은 곳이 이 동네에 하나 생겨날 것이다.

‘더러운 곳에서는 정명한 심상이 오지 않는다.’ 라는 굉장히 문학도적인 이유였다. 그런 생각이 가능할 정도의 인간이 왜 글을 쓰는지 나는 아직도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씻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있었으니 몸에서 군내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옷을 들추고 안의 냄새를 맡아봤다.

“나 냄새나는 것 같은데.”

“냄새나는 방부터 치우고 말해라.”

“진짜 냄새 안 나? 맡아봐.”

내가 이선준에게 몸을 들이밀자 그는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더니 내 머리 위에서 살짝 냄새를 맡았다. 나는 이선준의 품에 살짝 안긴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뭐야 이거, 기분 나빠. 덩치가 작으니까 이런 별 것 아닌 행동도 묘하게 느껴진다.

“….머리부터 감아라.”

“냄새 나?”

“돼지기름 썩은내 나니까 빨랑 씻어.”

“TS되면 온몸에서 페로몬이 나오는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보네.”

“자꾸 개소리하면 인덕션에 얼굴 박아버린다.”

“히익!”

나는 되도않는 의성어를 내며 화장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문 밖에서는 이선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옷을 벗었다. 이선준이 옷을 사오기는 했지만 여성용 속옷까지 사오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는 숫기가 없다. 콘돔 사는것도 쩔쩔 매서 내가 병신이냐고 비웃었던 적도 꽤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전 여자친구 생리대도 사준 적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 철면피였다.

그러고보니 내가 걔 생리대를 왜 사줬지? 어떻게 보면 내가 더 병신이다. 걔는 나한테 콘돔 사준 적 없었던 것 같은데, 하긴 뭐 생필품과 성생활용품이 같지 않으니까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다.

옷을 벗어놓고 문 바깥에 대충 던져놨다. 화장실은 좁았지만 샤워하기에는 적당한 공간이었다. 온수도 잘 나온다. 나는 군생활 이후로 찬물로 샤워해본 역사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거울을 통해서.

처음으로 내 바뀐 몸을 제대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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