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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79화 (79/224)

00079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이 새끼는 전역한지 얼마 안 됐다. 그래서 아직 충성심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선준이 그런 말을 하니까 어쩐지 조금 무서워졌다. 시종일관 진지한 놈이 이런 소리 하니까 드는 생각이다.

"라라가 뭐야, 존나 오타쿠같아. 라라 크로프트라고 하지 그래?"

"아니지, 라라의 스타일기에 나오는 라라지. 표절이네."

나는 툼레이더를 말하고, 박헌영은 애니메이션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나와 박헌영의 비아냥에 이선준은 서늘한 눈빛으로 이쑤시개를 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스르륵 돌렸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는 분명히 살기를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나와 박헌영은 입을 다물었다. 실질적인 무력 순위는 이선준이 제일 위에 있다.

조용히 해야지. 죽고싶지는 않아.

"아, 아, 그럼! 라라님 만세! 라라쨩 다이스키!"

박헌영이 항복선언을 하며 양손을 하늘로 들었다. 박헌영은 냉동을 먹다가 또 나오는 그 라라의 동영상을 보며 말했다.

"근데 쟤 묘하게 너 닮았다."

"에?"

그 말에 이선준은 나와 TV를 번갈아 쳐다본다.

금발로 염색을 하고 귀여운 춤을 추고 있는 아이돌은 뭐, 화장도 하고 보정도 받고 옷도 예쁘게 입었으니 단색 츄리닝 걸쳐입고 있는 나와 비교하기가 무색하다.

"닮긴 뭐가 닮아, 장난하냐?"

이선준이 박헌영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하지만 박헌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TV와 나를 손가락질하며 말한다.

"코랑 눈매 닮았잖아. 그리고 입술이 진짜 똑같은데?"

얇은 것 같지만 선이 또렸한 입술은 내가 봐도 예쁘다. 하지만 나는 내 얼굴을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그냥 내 얼굴이 저거하고 비슷하다는 말 자체가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 말에 이선준은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닮긴 뭐가 닮아! 야! 잘 봐!"

이선준은 TV일시정지를 한 채 찬찬히 나와 라라의 얼굴을 비교했다.

"이거 봐, 눈이랑 코 좀 다르지? 턱선도 확실히 다르잖아. 닮기는 개뿔이...."

이선준이 흥분한다. 뭐, 다 좋은데.

"뭐야, 왜 나한테 말해? 기분나뻐."

왜 나한테 따지는거야? 닮았다고 말한 건 박헌영이고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박헌영도 질 수 없는지 나하고 라라가 어딜 닮았는지 말했다. 이선준은 맞대응하며 여기여기가 다르다며 반박했다.

솔직히 어느 정도 닮은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똑같이 생기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열 낼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랑 내가 안 닮았다는 걸 한사코 증명하려는 이선준의 태도가 어쩐지 기분나쁘다.

그러니까 이건 서운하다거나 속상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기분이 나쁘다.

"둘 다 닥쳐, 미친놈들 같이 왜그래?"

내가 서늘하게 말하자 둘 다 입을 다물고 날 쳐다봤다.

"쟤랑 나랑 안 닮았고, 쟤가 더 예뻐. 됐지?"

"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내 말에 이선준이 당황하며 말한다.

"아니면 뭔데?"

"아니 그냥 안 닮았는데 닮았다고 하니까...."

"아, 그러니까 안 닮았다고."

이선준이 말꼬리를 흐린다. 기분나쁘데 남의 얼굴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게 제일 웃긴 짓이다. 어쩌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둘이 열내서 말해봐야 결국 기분 나쁜 건 나다.

이선준은 내가 심기불편한 듯 말하자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야, 내가 안 닮았다고 했지 쟤가 더 예쁘다고 한 건 아니잖...."

"...."

"...."

그 말에 나와 박헌영 모두 입이 굳어버렸다. 이선준도 자신이 개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표정이다.

뭐야,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거야?

이선준도 자기가 헛소리를 지껄였다는 걸 깨달았는지 입을 다문 채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라라니 어쩌니 하더니, 내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던 건가? 나는 잠시 고민한다. 뭘 어떻게 농담으로 넘겨버리기에는 침묵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더 어색해져버릴 수 있다.

물론 사적 감정을 배제한 그냥 생각일 수 있다. 이선준은 라라를 정말 좋아하고, 평소의 텐션을 깨버릴 정도로 좋아한다.

그런 라라보다 나를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그냥 객관적 평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까?

이건 이거대로 더 기분이 나쁘다. 나는 그냥 나다. 누가 날 예쁘다고 생각하건 말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대상화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불쾌하다고 하는 건 조금 신경과민인 것 같지만, 일단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냥 나다. 너에게 있어서의 나, 누구에게 있어서의 나 같은 것들은 나와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이것들은 일반론이다. 앞서 말한 것들은 당연하게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복잡한 생각을 하기에 지금의 이 침묵이 너무 길다고 생각한다.

"미친놈."

나는 욕을 한 마디 한다.

"냉동이나 처먹어."

그 말에 일어나 있던 박헌영과 이선준이 자리에 앉는다. 나는 멈춘 화면에 가득 들어가 있는 눈부시게 예쁜 아이돌, 라라를 본다.

쟤보다 내가 예쁘다고?

말도 안 돼.

군대식으로 20시경, 사회 시간으로는 오후 여덟시쯤이다.

"뭐야 이게."

"금일 근무표입니다."

나는 담당병사가 건네준 근무표 복사본을 본다. 나는 오늘 불침번을 서야 한다. 시각은 한 시부터 두시 반까지다.

"내가 근무가 왜 있어?"

"저도 모르겠습니다."

"너네 근무 인사계원이 짜냐?"

"그, 자, 잘 모르겠습니다."

짬도 안 찬 일병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내 전번초는 박헌영이고, 내 후번초는 이선준이다. 불침번이나 경계근무나 병사들이 둘씩 붙어있다.

물론 근무에서 당연히 빼줄거라고 생각한 내 오산이었던 것 같은데, 막상 보니까 예비역들에게 초소근무도 시키는 모양이다. 뭐야 여기 예비군한테 초소를 나가게 하네.

부대마다 다르지만, 내가 알기로 근무는 행보관이 직접 하는 게 맞다. 그런데 행보관이 귀찮으면 인사계원한테 대충 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걸 결재한 지휘관들은 오늘 전달받은 사항이 아무것도 없나?

그러고 보니 근무를 빼달라는 말은 안 했다.

이미 다 전달된 거니까 내가 빠지면 근무표를 새로 뽑아야 된다.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

귀찮고 짜증나기는 해도 뭐, 굳이 인사계원을 불러서 빼달라고 하는 추접스러운 짓은 하기도 싫다.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내 전번초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내가 잘 때 생활관에 들어온다는 걸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지만, 전번초가 박헌영이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짜증나네.... 알았어."

내가 한 소리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담당병사, 최일병은 한숨 돌린 표정이다.

예비역 훈련에 와서 번호만 잘 맞으면 근무를 안 서고 퇴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런 요행을 바랄 수 없는 모양이다.

"나 깨울 때 허튼 짓 하면 죽여버릴거야."

박헌영을 노려보며 말하자 박헌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왜 깨워? 부사수 시켜야지."

같이 근무 서는 병사를 시킬 거라 말하고 있다. 나는 인상을 팍 쓰며 말한다.

"너가 깨워야지!"

"왜? 내가 하면 허튼 짓 할지도 모르니까 실수하면 영창가는 병사가 깨워야지."

"너 진짜...."

전혀 모르는 남자가 내 몸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나는 깨는 순간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날을 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지금 나는 모든 것에 긴장하고 있다.

"부탁드립니다. 상냥하게 깨워주세요."

"음,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나만 믿어라!"

박헌영이 씨익 웃는다. 뭐 대단한 거라도 하는 줄 아네.

곧 있으면 청소시간이지만 예비역들이 그런 걸 할리가 없다.

"담배나 피우러 가자."

박헌영이 일어났고, 이선준이 따라 일어난다. 나는 이제 비흡연자라서 저런 걸 따라갈 생각은 없다. 그냥 생활관에 잠자코 앉아있으면 된다. 뭐 여기가 무법지대도 아니고 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리는 없다.

"나도 갈래."

나는 따라 일어난다. 이선준과 박헌영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별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서랍을 뒤져서 필요한 걸 챙긴다.

흡연장은 건물 바로 앞에 있었다. 다른 예비역들이나 병사들이 두런두런 말을 하고 있다. 사위는 이미 캄캄하다.

예비역 훈련을 오면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얘기를 하든 안 하든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과도 쉽게 친해지는 사람들은 활달하게 떠든다. 나는 저런 성격은 못 된다.

듣기 싫어도 말소리가 들려온다.

안면이 없는 남자들이 만나서 할 수 있는 얘기라면 몇 없다. 그리고 그 장소가 예비군 훈련장이라면 둘 뿐이다.

군대 얘기, 여자 얘기. 이 이상은 없다.

내 군생활은 너희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나는 너희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여자를 많이 따먹어봤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기본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천박하다.

내 귀에 들리는 말들도 그런 말들이다.

'야 오늘 걔 봤냐?'

'좆되던데.'

'근데 좀 짜증나지 않냐?'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뱉는 말들이다.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이선준과 박헌영은 오늘 담배 피우러 나오면서도 몇 번이나 들었을 터다.

기분 나쁘네.

하지만 뭐, 이제 이 정도로 멘탈이 박살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도 꽤 성장했다. 그냥 그런 사람은 병신이라고 생각한 다음 버러지라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들 머리 속에서 나와 이선준이 한밤중에 쓰리썸을 하든 뭘 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여기서 나가면 볼 일도 없다. 그러니 제발 이 안에서 나와 엮여보려는 시도만 안 하면 된다.

이선준과 박헌영은 말없이 담배를 빨아들인다. 반도 채 태우지 않은 채 비벼 끈다. 어쩐지 괜히 따라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자."

"잠깐만."

"왜, 나 씻을건데 이제."

박헌영이 말한다.

"그럼 너 먼저 가봐."

"뭐 하게?"

"아니 볼일이 좀 있어서."

"나 먼저 간다 그럼."

박헌영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이선준은 날 보며 멀뚱멀뚱 서있다. 나는 이선준에게 손짓한다.

"잠깐 따라와봐."

"왜?"

"닥치고 따라와 따지지 말고."

내가 눈을 부라리자 이선준은 슬금슬금 내 뒤를 따라온다. 나는 흡연장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간다. 사방이 캄캄하다.

"왜, 무슨 일 있어?"

이선준은 걱정하는 듯 말한다. 아까 말실수를 한 걸 생각하는지 음성에 불안감이 묻어나온다. 안타깝게도 지금 용무는 그거랑은 전혀 상관 없다. 이선준은 어둠 속에서도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걸 알아챈다.

"너 어디 아프냐?"

"......."

이딴 소리를 해야 하다니, 진짜 죽고싶어진다.

"오줌 마려워."

이선준의 표정은 보기 어려웠지만, 아마 볼만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라라는 그냥 가상의 연예인이라고 생각하면댐

진짜로 볼일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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