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원래 군대에서 식사는 의무다. 군대에서 취식거부란 없다. 문제를 삼는다면 징계를 당할 수도 있는 사항이다. 물론 그거야 병사들 중에서도 소위 짬 낮은 녀석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다. 상병 꺾이고 나면 메뉴에 따라 가고 안 가고는 제 마음대로다. 안 먹은 밥은 PX에서 보충한다.
더더욱 예비역인 내게는 별나라 얘기다. 박헌영은 내 질문에 문 바깥에 있는 담당병사를 부른다.
"저녁 뭐냐?"
"자, 잘 모,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박헌영은 물론, 나와 이선준의 안색이 변한다. 하지만 나와 이선준은 피식 웃고 말았고, 박헌영은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말한다.
"모르면 끝이냐? 여기 식단표 같은 거 없어?"
"아, 있습니다."
녀석은 복도를 후다닥 뛰어서 사라진다.
꼭 지적을 해줘야 문제를 직시하는 녀석들이 있다. 군대란 참 오묘한 곳인데, 무엇을 자율적으로 해야할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는 오로지 개인의 눈치에 달렸다. 군생활 잘 하는 건 별 거 없다.
착실하고 근면한 노예를 흉내내면 군생활은 잘 풀린다. 나는 내 예상과 다르게 부조리와 꼰대질에 착실히 적응했다. 그리고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나도 그런 선임이 되어간다.
군대의 마지막 기억은 곧 병장 때의 기억이다. 그래서 예비군 훈련에 온 사람들은 대개 병사들을 함부로 대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을 경계한다.
"박헌영, 너 너무 그럴 필요 없잖아."
나는 어쩐지 기분이 상해서 말한다. 박헌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한다.
"뭐 내가 갈궜냐?"
"그냥 좋게 좋게 말해. 그렇게 혼내듯 말할 필요는 없잖아."
군대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거다. 계급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 그런 권리라도 우리에게 준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후임들을 혼내고, 욕하고, 때린다.
병영 바깥에서 보면 군대에서 흔히 말하는 후임의 '개념없는 짓'은 사실 별 것 아니다. 밥을 안 먹었다고, 경례를 안 했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단지 그것 때문에 혼나왔던 기억들 때문이다.
그런 권리는 그 누구도 우리에게 준 적이 없다. 박헌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음, 그렇네."
"제육볶음이랑 배추김치, 삶은 양배추랑 된장국이랑 기장밥입니다."
어느 새 돌아온 담당병사가 말한다. 제육볶음이면 먹을만한거다. 하긴, 예비군 훈련이 잡혔는데 그 날짜의 식단들은 꽤 신경써서 준비했을거다.
선택지가 세 개 있다. 밥을 먹거나, PX에서 먹거나, 안 먹고 생활관에 짱박혀 있는 것이다.
PX를 가든, 밥을 먹든 시선집중은 당연하다. 아까 점심을 먹을 때에도 얼굴이 따가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안 먹자니 배가 고프다.
신체란 이상하다. 저녁 하루쯤 굶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군대라는 이 특수한 환경에 오는 순간부터 배가 고파진다.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환경과, 지금 아니면 못 먹는 환경은 정말로 신체에 영향을 끼친다. 그래도 얹힐 것 같은 그 분위기에서 밥을 먹는 건 좀 싫다.
"너네들은 어떡할거야?"
담당병사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너 먹으면 먹지."
"나도."
이선준과 박헌영은 내 선택에 따를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위험한 환경은 아니다. 박헌영과 이선준은 나를 혼자 두는 건 역시 걱정되는 모양이다. 뭐 부담스럽긴 하지만, 나도 조금 무서운 건 사실이다.
"냉동 사와서 여기서 먹자."
PX에도 사람이 많을 것은 뻔하지만, 거기서 사 와서 생활관에서 먹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담당병사는 어쩐지 곤란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아, 저기.... 그게.... 저희 부대는 생활관에서 취식하면 안 됩니다."
박헌영이 뭐라고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래도 화를 내면 안되지. 나는 군화를 대충 신고 일어나며 말한다.
"저기 최일병."
"일병 최영훈!"
"아니, 관등성명은 안 대도 되는데."
내가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한다. 뭐지 대체, 내가 욕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쪼는거야?
"그건 너네 부대 병사들 얘기고, 나랑 여기 둘은 예비역이니까 그런 규칙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그러니까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안 써도 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 너무 착하다. 솔직히 나 현역 때에도 이렇게 착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박헌영은 씨익 웃으며 최일병의 어깨에 팔을 걸친다.
"너도 PX가자."
"아, 저는...."
"됐어. 우리 따라갔다가 얘는 털릴수도 있어. 너는 그냥 밥 먹어라."
"예비역들이 강제로 끌고갔다고 하면 되잖아."
이선준이 고개를 젓는다.
"이유가 있어서 털리냐? 껀수가 있어서 털렸지. 신경쓰지 말고 가서 밥 먹어."
"아, 예 알겠습니다."
최일병은 생활관 바깥으로 후다닥 가버린다. 박헌영은 이선준을 보며 능글맞게 웃는다.
"왜? 쟤는 한 번 털려도 설원이랑 같이 냉동 먹어보고 싶을수도 있잖아."
그 말에 이선준은 아차 했는지 눈썹을 움찔한다.
"음, 그럴 수도 있겠는데."
이선준은 심각하게 고개를 젓고 끄덕이기를 반복하더니 말한다.
"음, 확실히 그렇겠어."
"야, 너가 제일 기분나쁘거든?"
"억!"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쪼인트를 까버리자 이선준이 정강이를 붙잡고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박헌영은 실실 웃는다. 하긴 뭐, 한 번 혼나고 여자랑 밥 먹을 수 있으면 나라도 그렇게 할거다. 물론 지금은 별로지만
밥 한 번 먹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군대에서는 그런 것들이 생각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 괜히 아프지도 않으면서 의무대 간호장교 보려고 꾀병 부리는 것처럼.
"야, 그런데 PX어디야?"
내 말에 이선준과 박헌영은 그제야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표정이 된다.
다행히 PX는 막사 바깥, 찾기 쉬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역시나 냉동파티를 벌이러 온 예비역들로 자리는 만원이었다. 내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병사나 예비역이나 다들 쳐다본다.
"어, 선배. 같이 먹을래요?"
먼저 와서 먹고 있던 과 후배들이 아는체를 한다. 예전에는 조금 친한 정도였지만 이런 꼴이 되고 나서는 거의 칩거생활을 했기에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녀석들이다. 녀석들은 성대하게 차려놓고 계속 냉동을 돌리고 있다.
"먹다 체하기 싫거든?"
내가 인상을 팍 쓰며 말하자 후배들은 웃으며 저들끼리 얘기를 한다. 그래, 저 정도의 적당한 무관심이 좋다. 애초에도 시선은 받아왔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이다. 피부가 뚫려버릴 것 같다.
"만두 먹을까?"
"먹을까 싶으면 그냥 사, 나중에 후회해봐야 소용없어."
"오, 이거 아직도 있네."
박헌영과 이선준은 냉동을 뒤적거리며 하나씩 꺼낸다. 저 놈들, 저거 진짜로 다 먹을 생각인가?
"야야, 이거 아직도 있다?"
박헌영이 꺼내든 건 군생활 동안 항상 사먹었던 슈넬치킨이다. 하긴, 스테디셀러니까 없어지는 게 이상한거다. 음료수와 냉동, 밤을 위한 라면 몇 개를 사서 계산한다. 통 크시게도 박헌영이 일괄결제를 한다. 박헌영의 씀씀이는 좀 헤픈 편이 있다. 물론 비교도 안 될 만큼 버니까 상관 없겠지만.
"근데 이거 다 데우고 올라가면 저녁시간 끝날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곧 야간교육이 시작할 타이밍이다. 냉동 데워서 올라가면 이쑤시개 꽂아보기도 전에 교육 집합 방송이 나올 것 같다. 내 말에 박헌영과 이선준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너 대대장 정신교육 때 졸았냐?"
"어?"
물론 막바지에는 피곤해서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이선준은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오늘 야간교육 취소래."
"어? 어? 진짜?"
"어, 너 때문에"
"유일무이한 여성 예비역 병장이 애처롭게 졸고 있으니까 대대장이 좀 미안했나보지."
"오예!"
내가 순수하게 감탄사를 내지르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세게 꽂힌다. 뭐야, 그 따위로 쳐다보지 마.
물론 나는 평소에도 예쁘지만 웃으면 더 예쁘다. 자랑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착각이다. 이건 그냥 사실을 말한거다. 나는 눈치를 보며 벽을 본다. 쳐다보지 마 기분나빠.
그러고 보니 박헌영과 이선준을 비롯한 다른 예비역들은 이미 전부 츄리닝이나 편한 옷을 입고 있다. 나만 군복 차림이다. 어차피 다시 입을 건데 귀찮게 갈아입기 싫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군.
"복면이라도 쓰고 싶다."
"방탄 가져다줄까?"
"너 자꾸 그러면 오늘 밤에 니 자는 얼굴 앞에서 공포탄 오발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내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박헌영은 흠칫해서 전자레인지에 냉동을 집어넣는다.
야간훈련이 없다는 건 지금부터 내일 아침까지는 저녁 점호 이외에 별다른 게 없다는 말이다. 뭐 불침번을 설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거고.
생활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TV를 켜놓고 냉동을 먹으려고 펼쳐놓았다.
"야, 잠깐 나가봐."
"왜, 배고픈데."
"옷 갈아입을 거니까 제발 꺼져줄래?"
내가 눈을 부릅뜨며 말하자 박헌영과 이선준은 순순히 생활관 밖으로 나간다. 나는 가져온 츄리닝으로 순식간에 갈아입는다. 들어오라고 소리치자 박헌영과 이선준이 슬금슬금 들어온다.
테이블에 모여앉아서 문을 닫아놓으면 바깥에서 안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는 낯선 시선에 짜증 날 이유도 없다.
"얘는 밥 먹나?"
"뭐 그러겠지."
TV에서는 음악채널이 틀어져 있다. 매일 아침, 짤막하게 시간이 날 때마다 뮤직비디오나 걸그룹 무대영상을 보는 건 군생활의 아주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얘네 많이 봤었는데."
그 말을 한 건 박헌영이 아니라 이선준이다. 하긴 뭐, 관심 없는 척 해도 걸그룹 영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뭐 엄청 성욕이 들끓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대리만족이라고 해야할까. 뭐 그렇다.
"형은 어떤 애들 제일 많이 봤어?"
"얘네."
그룹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전역한지 좀 된 탓에 신인 걸그룹들에는 별로 아는 게 없다. 가장 최근에 전역한 이선준은 아직 걸그룹을 다 외우고 있을거다.
"쟤 이쁘지 않냐?"
"이쁘네, 그리고 쟤 유명하잖아."
혼자서 걸그룹 먹여살리는 멤버가 있는데, 이선준이 지목한 아이돌이 걸그룹의 그거(?)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뜨고 있는 신인 걸그룹은 얘네를 말하는 건가보다. 노래도 경쾌하고 괜찮은 느낌이다.
요즘 노래가 뭐 다 훅이 들어가 있는 거기서 거기인 노래들이지만, 그래도 귀에 쏙쏙 박히는 노래들이 있다. 지금 노래도 길거리에서 많이 들은 탓에 귀에 익었다. 나는 노래를 찾아듣는 것보다 귀에 익은 다음 '그게 이거였어?'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군바리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아이돌 하나를 품고 살아가는 법이지."
박헌영이 사뭇 진지하게 말한다.
"너는 누구였는데?"
"가인."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이 녀석이 저번에 말했던 것들과 합쳐보면 이 녀석은 진짜로 좀 M변태끼가 있다. 가인처럼 여왕님 컨셉이 어울리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야, 너야말로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말라고."
내가 질색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박헌영이 치킨을 하나 먹으며 말한다.
"그러는 너는 누구였는데?"
"음, 나는 뭐. 아이유지!"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변태같다. 그러고 보니 잊고 살았구나.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그딴 표정으로 보지 말아줄래. 지금 여자라고 해서 과거에 남자를 좋아했다고 착각하고 살지는 않거든?"
내가 그 길고 긴 어둠의 밤을 지샐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일 나를 같은 표정과 포즈로 내 아침을 깨워줬고, 잠들게 했다. 그래, 내 군생활은 팔할이 아이유였다.
물론 지금은 희미한 갈색빛 추억일 뿐이지만.
"그런 퇴물들 끌어오지 마라. 지금은 라라가 최고니까."
이선준이 진지한 얼굴로 TV를 보며 말하자 나와 박헌영은 흠칫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