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77화 (77/224)

00077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야, 이거 설마 그새끼가 엿먹으라고 제일 상태 안좋은 놈 보낸거 아냐?"

박헌영의 말에 나는 그 주장에도 신빙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 정말로 판단하기에는 일렀다.

그리고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그래.... 수고했어...."

나는 녀석이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도화지와 A4용지를 보며 입술을 씰룩거릴 수밖에 없었다.

"테이프는?"

"아...."

나는 혈압이 살짝 솟구쳤지만 화를 억눌렀다.

"도화지나 A4용지나 테이프 중에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하신 줄 알았습니다."

"야, 너.... 그거로 뭘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해봤냐?"

박헌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녀석의 푹 숙인 고개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야, 여기 테이프 있네."

TV장 밑을 열어본 이선준이 테이프를 찾아서 나에게 던졌다. 그래, 저런 곳에 잡다한 것들을 많이 보관해놓는 게 원래 군대 문화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박헌영이나 나보다 이선준이 나은 인간이다.

"야, 내가 제대로 말 못 한 거니까 그러지 마, 앞으로는 뭐 시키면 하나씩 짚어서 얘기해줄게."

군대에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게 중요하다. '어느 정도의 자율적 판단'이 아주 중요하다는 얘기다. 시킨 것만 하면 되는 것 같은데, 막상 해보면 꼭 그것도 아닌 게 군대다. 나는 종이나 도화지 테이프가 있으면 가져와라라고 얘기한 건 애초에 A4용지OR도화지 AND테이프였는데, 저 녀석은 A4용지OR도화지OR테이프로 알아들은거다. 그거로 뭘 할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안 한거다. 종이를 어디에 붙일거라는 생각을 안 하니 이런 일이 발생한다.

정말 이렇게 설명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은데, 의외로 이런 일들은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은 대개 상태 안 좋은 놈으로 찍혀서 군생활이 힘들 게 뻔하다.

녀석은 날 보더니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아, 아냐. 됐어. 다음 훈련 언제래?"

"알아보겠습니다!"

-쾅!

녀석은 또 거칠게 문을 닫고 뛰쳐나갔다. 의욕은 넘친다. 저런 녀석들이 꼭 사고를 친다.

"친절하게 안 대하는게 좋을거다."

박헌영이 아니라 이선준의 말이다. 나는 박스테이프를 도화지의 테두리에 붙이며 말한다.

"그럼 꼰대짓이라도 할까?"

"차라리 그게 낫지."

"왜?"

"망상 속에 사는 군바리들이 네가 친절하게 몇 마디 해주면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게 될 가능성이 있지."

"일리 있는 주장인데."

맞는 말이다. 나도 군대에 있을 때에는 정말 전역하면 아이돌 같은 여자를 쉽게 꼬실 수 있을 줄 알았다. TV를 너무 많이 본 탓이다. 나는 예비역 입장에서 병사들을 갈구거나 그러는 게 싫다. 하지만 이 꼬락서니가 된 이상 그게 다르게 비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뭐 이렇게 엉성하냐? 줘봐."

테이프를 가지고 씨름하는 내게서 박헌영이 테이프를 뺏어간다. 능숙하게 테두리에 붙이더니 박헌영은 그걸 생활관 문의 창문에 붙인다. 이걸로 이제 누가 지나가다 쳐다볼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맞은편 생활관에서도 계속 미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흘낏 쳐다보는 것도 거슬린다.

"너 근데 우리랑 써도 괜찮겠냐?"

박헌영이 말한다. 예비역들이나 병사들 틈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른다는 걸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듣지 않아도 뻔하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건 일어나지 않았건 다 예측할 수 있다. 여기의 셋이 밤마다 쓰리썸을 할거라는 둥, 어디서 몰래 강간하고 싶다는 둥 미친 소리가 나올거다.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런 대화를 혐오하지만, 군대에서 만난 이들은 그걸 자랑인 양 떠벌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게 남자였던 때에도 혐오스럽고 추잡했다.

"소문보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더 중요하지. 누가 나쁜 짓 하러 오면 너가 대신 당해줘."

"안돼! 내 그쪽은 아직 순결하다고!"

"아직? 그럼 언젠가 개통될 예정이냐?"

박헌영이 기겁을 했고, 이선준을 쳐다보자 이선준은 듣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팩 돌렸다. 박헌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음을 허락할만한 남성이 다가온다면 언제든 준비가 되어있지만. 일단 여기에는 없군."

박헌영의 말이다.

"물론 이선준이 우정의 이름으로 부탁한다면 세 번 정도는 생각해볼 의향이 있지."

"싫어 미친놈아."

이선준이 방탄을 집어던졌고, 박헌영은 능숙하게 피했다. 다행이다. 그나마 이 녀석들과 같이 와서. 그러지 않았다면 어찌할 바를 몰랐을거다. 생활관 안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못 하고 시간만 보냈을 게 뻔하다.

오늘은 정신교육으로 끝나는 모양인지 강당에 앉아서 거대한 프로젝터로 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예비역들이 전부 모여앉아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누구는 자고, 누구는 보고, 누구는 떠든다. 앞에서 대대장이 교육을 하고 있는데, 대대장도, 중대장도, 병사도, 예비역도 이게 그저 쓸모없는 짓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군생활 하면서도 지겹게 봤던 영상이다. 봤던 거거나, 못 보던 건데 내용은 같다.

설명하고 넘어가자.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나는 국수주의가 싫다. 민족주의가 싫다. 애국심이라는 단어가 싫다. 독재자들이 싫다.

국가안보라는 미명하에 모든 악행은 차악으로써 묵인되어야 한다는 군대식 전체주의를 혐오한다. 이승만을 찬양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 싫다. 그들이 무엇을 불러왔건, 무슨 공리적 결과를 불러왔건 그들이 독재자이며 사욕을 위해 모든 일들을 행해왔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결과를 보고 과정을 정당화하는 건 현실론으로 위장한 패배주의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영상들을 열심히 본다. 이선준도 마찬가지다. 저들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 저들의 논리를 알아야 비판도 할 수 있다. 수용 없는 비난은 벽을 보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다.

박헌영은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끼고 잔다.

결국 영상의 내용은 그거다.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정치가들로 인해 여기까지 발전했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우리나라를 위협하며 비대칭전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투철한 안보의식만이 대한민국을 더욱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저런 걸 보면 진짜 욕밖에 안 나온다. 방산비리나 척결하지 왜 애꿏은 국민들한테 지랄이야? 국방부에서 낭비하는 예산만 제대로 된 곳에 쓰이고, 방위산업체 양아치 새끼들만 정리해도 국력은 알아서 부강해진다. 국력 약화는 군 수뇌부와 전역 장성들이 방위산업체 고문으로 들어가면서 빼먹는 돈 때문인데. 그 문제는 국민들이 안보의식을 가지면 해결된단다. 엿 먹으라고 해.

이선준은 덤덤하게 그 장면들을 보고 있다. 나는 비웃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는데 이선준은 아무 반응도 없다.

"무슨 생각 해?"

"대한민국 미래가 아주 밝다는 생각."

"무슨 소리래."

"민의를 통일하려는 시도가 일단 남성들에게는 항상 적용되고 있잖아."

뭐라는거지?

"이대로라면 향후 이십년 내에 선민사상으로 무장한 전체주의 국가가 되는 것도 문제가 없겠어. 그리고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거지.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군부 쿠데타는 한 번이라도 더 일어날 걸?"

헛소리 치고는 장대하다. 내가 웃자 이선준도 씨익 웃었다.

"전체주의는 개소리라 치고 쿠데타?"

"쿠데타 일으켜서 독재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냐. 심지어 사람들이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라고도 불러주잖아?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면 우주가 도와줘서 한 번쯤은 더 일어나."

이 대화를 앞의 대대장이 들으면 우린 당장 기무대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나와 이선준은 낄낄 웃다가 대대장이 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나는 좀 졸았다. 내가 깬 것은 사람들이 박수를 이상할 정도로 세게 칠 때였다.

"뭐야, 끝났어?"

박헌영과 이선준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뭐지? 이 열렬한 반응은? 충성의 충 자도 제대로 발음 못하는 예비역들이 왜 흥분한건지 알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예비군 훈련은 막상 별게 없다. 정신교육이야 군대에서 늘상 받던 그런 것들과 다를 것이 없다. 걱정이 되는 건 내일의 훈련이다.

딱히 여자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애초에 활동적인 성격이 아니다. 집구석에 처박혀서 무위도식하는 편이 좋다. 밖에 나가서 운동이든 뭐든 하는 건 질색이다. 더울 때는 더우니까 싫고, 추울 때는 추우니까 싫다.

물론 서늘한 때에는 귀찮으니까 싫다.

이런 나와 성격이 비슷한 건 박헌영 정도다. 박헌영도 실내파인 나와 행동패턴이 같다.

이선준 같은 경우에는 운동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다. 다만 신기한 건 그런 주제에 잘 한다는거다. 듣기로는 중고등학교 때 축구나 농구 같은 걸 취미로 한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잘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운동에는 염 젬병이고 보면서 아는 척이나 할 줄 아는 우리 과 사람들을 데리고 단과대학 농구대회 8강까지 올라간 전력이 있다. 남자인 시절이지만, 나도 출전했었다. 이러면 이선준을 제외한 이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이 될거다.

흠, 그러고 보니 군대에서 체육대회 포상휴가를 나온 적도 있었지. 여러모로 능력자다. 한정운이나 이선준이나.

그러고 보면 한정운은 운동을 좋아하는 걸까? 그 녀석은 운동을 좋아한다기보다 어떻게 보면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마치 군인이 일과를 하는 것처럼, 오늘 해야 할 일을 묵묵하게 해낸다. 딱 이 정도 느낌인 것 같다.

그 녀석은 인간미가 정말 떨어진다. 저번에 술 취했을 때에는 모르겠지만 평소에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사람 모양을 한 무슨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다.

-똑똑

"선배님들 석식 시간입니다."

쭈뼜거리는 담당병사가 생활관 문 너머로 문을 두드리며 말한다. 박헌영이 날 보며 말한다.

"밥 먹을거냐?"

"뭔데?"

나도 모르게 군대에서의 습관이 튀어나온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자질구레한 현실고증 없이 쓰여졌다. 그러니까 그냥 재미로 보면 될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