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이선준과 박헌영은 각각 내 앞과 뒤에 서있다. 얄짤없이 훈련을 하게 된 탓에 내가 저기압인 걸 아는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예비역님들! 연습 없이 한번에 바로 할 테니까 제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열대 위에 선 대위 계급장을 단 사람이 말한다. 그 사람도 이따금 내 쪽을 훔쳐본다. 혹시나 해서 연습이니 뭐니 하면서 귀찮게 하면 어쩌나 했는데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된 건지 연습은 없었다. 10분의 행사를 위해서 사전에 두 시간을 연습하고, 며칠 전부터, 몇 달 전부터 연습을 하는 게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대장은 정말 칼같이 들어온다. 멀리서도 표정이 얼핏 좋지 않아보인다.
"부대! 차렸!"
예비역 대표는 그 새 언제 뽑았는지 앞에 누가 서서 외친다. 신형 군복과 구형 군복이 뒤섞여 있어서 중구난방인데, 줄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 대대장은 그 꼴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쉰다. 예비역한테 군기를 바라는건 북한이 항복하길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경례하고, 애국가 부르고, 연설 하고, 다시 경례 하는것으로 끝이다. 아주 간단하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의례다. 대대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아.... 전역 후에도 국가안전보장을 위해 훈련에 임하게 된 예비역 여러분들에게...."
대대장은 말하면서 나를 힐끔 쳐다본다. 솔직히 대대장은 착한 사람인 것 같다. 앞뒤 꽉 막힌 사람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눈치를 이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다.
군대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분류되는 항목들 중 하나가 성군기 위반이다. 남자와 남자든, 남자와 여자든 똑같다. 군대에서 이러한 일들은 지휘관이 옷을 벗어야 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나는 어쨌든 지금은 여자고, 내가 훈련을 받기로 한 이상 내게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내가 혹시 국방부에 궁시렁거리기라도 하면 대대장이 덤터기를 쓰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은 내 편의를 봐줘야 한다. 대대장도 솔직한 마음으로는 나를 집에 보내고 싶을거다. 대대장은 나를 보더니 계속 말한다.
"감사드리며, 훈련에 열심히 임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상."
"부대! 차렸!"
너무나 빨리 끝난 연설에 예비역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나온다. 그래도 뭐, 나쁘지는 않네.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추웅스엉
흐늘흐늘한 경례소리가 연병장을 울린다. 누가 더 작게 말하나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어쩐지 맥이 빠진다. 의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집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예비군 훈련의 절차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일단 전시주특기라는 것을 배정받는다. 기존의 보직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내 주특기는 수리부속보급이다. 여기 보급부대였구나. 전쟁 나도 전선에 투입될 일은 없는 모양이다.
예비군 훈련을 왔다면 비가 오는 편이 좋다. 실내에서 정신교육만 받고 끝나기 때문이다. 비가 안 오면 주특기훈련을 받는다. 뭘 받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냥 멍때리고 인솔자를 따라다니기만 하면 끝난다. 그리고 사격훈련을 한다. 그냥 드르륵 쏘고 나오면 된다. 그리고 퇴소식을 한다. 끝, 더 설명할 것도 없다. 간단하지만 군대에 다시 온다는 것만으로 열받는 그냥 귀찮은 일일 뿐이다.
내가 배정된 생활관은 막사의 2층 맨 구석에 있는 곳이다. 급하게 짐을 빼고 비운 흔적 탓인지 관물대 서랍이 열려있는 곳도 있었다. 침대 위에는 세 명 분의 장구류와 총기가 놓여 있다. 일반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k-2소총을 지급받는데, 예비군들은 구식 M-16소총을 지급받는다. 이유는 모른다.
"진짜 우리 세 명만 쓰는건가?"
이선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한다. 이선준은 전역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예비군 훈련이다. 박복하기도 하지.
"쟤 때문에 이득을 보는 날도 다 오네."
"말 좀 곱게 쓰지 않을래?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박헌영에게 쌍심지를 켜며 말했다. 예비군 훈련이야 뭐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도우미 병사가 생활관 당 하나씩 따라다니거나, 아니면 병사들과 같은 생활관을 쓰거나 여러 방식이 있다. 곧 병사가 한 명쯤은 반드시 따라다니기 마련이었다. 심부름을 엄청나게 다니거나 예비역들의 꼰대짓을 들어야 하는 피곤한 일이다.
"다 오셨습니까?"
전투복 차림의 병사 하나가 생활관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어, 왜?"
이선준이 묻는다.
"인원 체크해도 되겠습니까?"
"뭘 세 명인데 출석까지 부르냐?"
박헌영이 말한다. 그 병사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지나치듯 가버렸지만 슥 하고 훑어보는 느낌이 확 전해졌다. 기분나쁘다. 나는 그 녀석의 옷차림을 본다. 계급은 병장이다. 옷차림도 그렇고, 머리도 길다. 짝다리 짚고 말하는 모양새가 건방지다. 전투화 끈도 제대로 묶여있지 않고, 바지 밑단도 엉망진창이다. 녀석은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있다.
새삼스럽게 내가 싫어하는 꼰대질을 하고 싶어서 그 녀석의 옷차림을 훑어본 게 아니다. 저 잣기이 군복을 입건 발가벗고 돌아다니건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이것들을 확인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녀석은 지금 군복을 아주 급하게 입은거다. 급하게 군복을 입을 이유라봐야 별 것 없다.
평일에도 짱박혀서 잠이나 쳐자야 될 병장님이 군복을 급작스레 입어야 할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다.
"이선준 병장님 맞으십니까?"
"어."
"박헌영 병장님?"
"어."
"설원 병장님?"
"야."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을 부른다.
"네?"
병장답게 예의는 없다. 뭐 그건 좋다.
"너 말고, 여기 원래 배정된 애 오라고 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 지금 여기 생활관 배정된 병사 자리 뺏어서 온 거잖아."
내 물음에 그 녀석은 잠시 얼어붙는다. 이름은 강성훈이다. 녀석은 잠시 얼더니 고개를 젓는다.
뻔하다. 여자가 예비군 훈련에 왔으니, 당연히 짬 안 되는 애들한테 떠넘기는 이런 자리를 자기가 하겠다고 누군가의 자리를 뺏어 들어온거다.
"아, 아닙니다. 이게 갑작스럽게 배정된 거라서.... 제가 뽑혔습니다."
"어떤 미친놈이 딱 봐도 말년한테 이걸 시켜? 물론 했다고 치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이 상황에 갑자기 여기서 짬밥 제일 많이 처먹은 것처럼 보이는 놈이 나타나는거 수상하지 않냐?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이런 일 있으면 어떻게든 빠지려고 할 놈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아. 그게...."
"핑계는 좀 대본 모양인데 나도 너 못지 않거든?"
"아, 진짜 아닙니다. 왜 오해를 하십니까?"
녀석은 적반하장으로 화를 낸다. 솔직히 조금 무섭다. 나는 한숨을 푹 쉰다. 군대라는 환경에 다시 오니 나도 과거 군대에서의 기억이 살아나는 것 같다.
"아, 됐고. 지휘관한테 가서 물어볼게 그럼."
내가 대뜸 일어서자 녀석이 다급하게 말한다.
"아, 아 알겠습니다. 원래 있던 애 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빨리 꺼져."
녀석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다. 평소에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하는 놈이 여자 한 번 보겠답시고 후임 자리까지 뺐는 놈이다. 내 얼굴이 얼마나 귀한 거냐고 이러겠느냐마는, 무엇보다 병장이 도우미로 있으면 어쩐지 뒤가 켕긴다.
"야, 너 촉 좋다."
박헌영이 놀란 듯 말했고, 이선준은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상상도 못 한 모양이다.
"괜히 짬 좀 먹은 놈이 있어봐야 허튼 짓거리 할 생각밖에 안 해."
병장이라는 건 군생활을 할만큼 한 놈이다. 제 할 일 하면서 뒷구멍으로 흔한 말로 뺑끼를 칠 여유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내가 남자였다면 병장이 도우미인 편이 훨씬 나았을거다. 부대에서 필요한 게 있다면 어떻게든 구해올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시킨 일만 할 줄 아는 녀석이 낫다. 짬을 좀 먹은 놈이라면 괜히 도우미 하면서 허튼 수작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등병이나 갓 일병을 단 녀석이 오는 게 낫다. 어리버리해서 시킨 일도 해내기 벅찬 녀석들이 낫다. 그러면 허튼 생각은 해도 수작은 못 부릴거다. 방금 그 자식은 태도나 말투로 보건대 뭘 해도 했을 녀석이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상상은 했는데, 실제로 일어나니까 어이가 없을 뿐이다.
내가 씨익 웃자 박헌영과 이선준은 어쩐지 질린다는 듯 안색이 약간 죽는다.
"너 좀 무섭다."
"야생에서 살아남으려면 계속 경계를 하고 있어야 하는 법이지. 우리 잘 때 문 앞에 실탄 경계근무 서달라고 대대장한테 부탁해볼까? 해 줄 것 같은데."
내가 말하자 이선준은 피식 웃는다.
"그 두 놈이 문제 일으킬 가능성부터 생각하시지?"
"그건 그렇네."
노닥거리는 사이에 생활관 문을 누가 두드렸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너는 내가 안녕해 보이냐?"
쭈뼜거리며 들어온 병사에게 제일 먼저 핀잔을 준 건 박헌영이었다.
"내가 이 지랄같은 봄날에 훈련받으러 왔는데 안녕해 보이...."
"야, 닥쳐.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내가 박헌영의 꼰대짓을 무질렀다. 막 들어온 녀석은 머리도 짧고, 태도에서 얼빠짐이 묻어나는 딱 봐도 '짬 안 되는'녀석이었다. 계급은 일병이다. 이름은 최영훈이다.
"너가 원래 여기 담당병사지?"
"아, 예...."
"그 새끼가 지가 하겠다고 했지?"
녀석은 우물쭈물거리더니 생활관 문에 달린 창문을 흘깃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보기 바쁜 걸 보니 어지간히 짬 안 되는 녀석인 모양이다.
"지금처럼만 해, 생활관 들어올 때 노크하고. 일정 제대로 알려주고. "
이선준은 최일병을 보며 짧게 말했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며 나와 다른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녀석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내가 조금 민감한 상황에 있거든? 너도 알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냥 네나 예만 해. 그렇게 할 필요 없어."
"예 그렇습니다."
녀석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귀엽잖아 이 자식.
"야 그냥.... 아니다. 그냥 편한대로 해."
녀석은 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 하고 있다. 내가 병장을 험악하게 내지르고 이 녀석을 불러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녀석에게 잘 해준다거나 그러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불쌍하긴 하지만 담당병사는 어차피 예비역들의 편의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거였다.
"너 군생활 몇개월차냐?"
"아, 음.... 454일 남았습니다."
"........"
"........"
"........"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관심병사인가? 몇 개월 했냐고 물어봤는데 잔량을 대답하는건 무슨 대답인거지? 그리고 왜 벌써부터 전역날짜를 계산하고 있는걸까? 자살하고 싶은건가?
"네 까마득한 앞날을 보니 얼마 안 된 건 확실하구나."
"네 그렇습니다."
"내가 정말 미안한데,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
"예 노력해보겠습니다."
"행정반이든 어디 가서 도화지나 A4용지나 테이프좀 가져다줄래?"
"아, 예, 알아보겠습니다."
-쾅!
녀석은 갑자기 놀랄 정도로 세게 문을 열더니 복도를 뛰어갔다. 이선준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쟤 좀.... 이상한데?"
"...아직 판단하기에는 일러."
"수많은 관심병사들과 함께했던 내 군생활을 돌이켜 보건대. 백프로다."
박헌영은 단정지었다. 그 말마따나 나도 좀 불안한 건 사실이다. 심하게 얼타는 놈일 것이 분명하다. 박헌영은 가만히 있다가 손뼉을 짝 치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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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하지마 감동받을거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