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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75화 (75/224)

00075 TS라도 국가가 부른다. =========================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건물이 없는 곳, 농지를 지나서 어딘가로 간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같은 말만 중얼거린다. 이런 일 따위는 당연히 해결되어 있을 줄 알았다. 당연히 연기되거나, 당연히 면제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어쩌냐, 그냥 가야지 뭐."

옆에서 이선준이 묘하게 웃는 표정으로 말한다.

"닥쳐, 자기 일 아니라고 이게...."

버스가 태원을 떠나 어딘가로 향할수록 내 불안감은 커진다. 국정원 아저씨한테 전화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지만 전화하기 꺼려진다.

이미 많은 신세를 졌다. 그리고 이미 출발한 마당에 전화한다고 해서 무슨 별다른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야, 가서 설명하면 뭐 어떻게 해주지 않겠냐?"

"그렇겠지? 빼주겠지?"

버스 승강장에서 인원 체크하는 사람한테 몇 번 말해봤지만 이탈하면 불참이라는 대답만 들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애초에 군인도 아니었다. 얄짤없이 부대에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대장이든 뭐든 만나서 사정을 설명하면 될거다.

정말 그럴거다.

여자 된 것도 억울한데 예비군 훈련까지 받으면 안되잖아. 남자의 불이익과 여자의 불이익을 온몸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된거잖아.

"그래, 야 사람이 융통성이 있지 여자를 무슨 예비군 훈련을 시키냐?"

딴에는 박헌영이 위로랍시고 뒷좌석에서 말한다. 버스 안은 이미 이 이상한 예비역(나)에 대한 관심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아는 얼굴들도 있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너도 군대 갔다온 놈이.... 군바리한테 융통성을 바라냐?"

"그건 그렇네."

내 불안은 그거였다. 일단 군인 하면 떠오르는 건 원리원칙이다. 시키는 것만 하는 곳이 군대다. 자율적 판단에 따른 어쩌고 하는 것들은 전부 지랄이다. 그거 하면 욕 먹는 곳이 군대다. 앞뒤 꽉 막혔고, 스스로의 머리보단 교범이나 원칙의 문구를 더 믿는 돌대가리들이 군인이고, 그런 놈들이 무더기로 있는 곳이 군대다. 이선준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 흠흠.... 아, 일단 안타깝게 되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말이죠. 일단 정식으로 소집명령이 내려왔으니까 훈련은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명.령입니다 명.령.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놀리냐?"

내가 이선준의 어깨를 주먹으로 후려치지만 아프지도 않다는 듯 웃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당연히 빠져야 한다. 하지만 그건 사회의 상식이다. 군대의 상식은 다르다. 일단 서면으로 통지가 되었으니 나는 참석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일단 병영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무단으로 빠져나가면 나는 소집불응이 아니라 탈영으로 처리된다. 이건 중범죄다. 탈영 예비역이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병신같고 웃기다.

그래서 나는 지금 헐렁한 전투화와 군복을 입은 채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다. 발이 반쯤은 작아졌는지 끈을 세게 묶어도 발이 덜렁거리며 빠져나올 것 같다.

"날씨는 왜 이렇게 더운데."

뜬금없이 따가운 햇살이 오늘따라 더 심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몇 시간 뒤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흠흠.... 아, 일단 안타깝게 되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말이죠. 일단 정식으로 소집명령이 내려왔으니까 훈련은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명령이라서.... 예비역이니까 명령이 뭔지 아시죠?"

이선준의 말과 놀랄 정도로 흡사해서 나는 받지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몸을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

진심으로 앞에 있는 머리 벗겨진 대대장의 머리를 재떨이로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을 보고는 대대장실로 안내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절주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손짓발짓 다 해가며 설명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거였다. 진짜, 맥이 탁 빠져버릴 정도의 뻔하고 지리멸렬한 대답이었다.

"다음에는 소집 통지 나오기 전에 지방 병무청에 연락을 해 보세요. 아셨죠?"

대대장도 난감한 표정인 건 마찬가지지만, 절대로 집에 보내준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이를 악문 채 말했다.

"그러면 지금 저보고 ㅆ.... 아니, 제가 욱해서. 후.... 지금 생활관 같이 써가면서 똑같이 훈련 받으라고요? 원래 남자였으니까 상관 없을 것 같아요? 여기 여자화장실 있어요? 여자샤워실은? 여자생활관은? 내가 원래 남자였으니까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억울해서 폭발해버렸다. 대대장은 내가 쏘아붙이자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생활관 하나 비우고, 화장실은 따로 시간을 제가 통지해 드릴 테니까.... 샤워도 마찬가지로...."

이게 문제다. 무엇보다도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나는 내가 말을 잘못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군인은 뭘 말하면 그것만 생각한다. 내가 지금 여자 화장실, 생활관, 샤워실 때문에 이걸 못 받겠다는 말이 아닌데, 이 인간은 지금 말을 그대로 듣고 있다.

"그럼 제가.... 화장실 출입통제 해놨으니까 가서 오줌 싸세요 하면 가서 싸라 지금 이거에요? 제가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남자를 위한 공간에서 제가 무슨 훈련을 받냐고요. 군복도 안 맞고, 전투화도 안 맞을 게 뻔한데!"

"아, 그건 맞는 사이즈로 준비를....."

심각하다. 이 사람과의 대화는 일방통행이다. 하기 힘든 이유들을 설명하면 그걸 해결하는 순간 내가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열불이 나서 소리치다 보니 이 사람의 희끗한 머리가 보인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다.

이 사람도 어지간히 곤란한 모양이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 윽박지르고 있으니 기분도 안 좋을 게 뻔하다.

이러면 나도 기분이 안 좋다.

망할, 엿 같은 세상. 눈동자가 흔들리는 대대장을 보니 내 마음도 흔들린다.

그래, 멍청한 건 죄가 아니다. 군인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이런 경직된 사회를 만든 군대가 문제다. 나이도 지긋한 사람한테 소리지르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물론 엿 같은게 없어지지는 않는다.

"핸드폰 쓸거에요. 무슨 일 생기면 신고해야되니까."

"아, 예. 그러시죠."

"친구 두 명이랑 같이 쓸거에요 그리고."

"친구?"

"제 친구요. 혼자 있으면 무서워요."

포기다. 결국 훈련을 받기로 했다. 대신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은 요구할거다. 박헌영이랑 이선준이 생활관에 있으면 혹시모를 비상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거다. 나는 이름을 말해주고, 생활관 변경을 요청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이건 꼭 지켜주셨으면 좋겠는데."

"부대 내에서 해드릴 수 있는거면 얼마든지...."

"입소식, 장구류(탄띠, 총, 군장)하지 말고, 1분 안에 끝내주세요."

"아...."

"저 빈혈이라서 쓰러지면 큰일나요."

대대장의 벙찐 표정을 보니 좀 웃기기도 하다. 더 이상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하다.

하지만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일단 예비역들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병사들이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이선준과 박헌영도 있다.

그래도 불안하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갇힌 욕구들이 화약처럼 폭발해버릴지 어떨지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내 불안도 기우일 수 있다. 병사들이 전부 발정난 개새끼라면 군대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여간부 강간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도 결국 최소한의 상식이 존재하는 곳이다. 겨우 2박 3일인데, 무슨 일이 일어날리가 없다.

"더워...."

결국 군복과 전투화를 사이즈에 맞는 걸로 갈아입었다. 여간부용 군복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하다. 뭣보다 군복이 짱박힌지 오래된 탓인지 꿉꿉한 냄새가 난다. 연병장에는 수많은 예비역들이 저마다 껄렁한 자세로 서있다.

"선배님들 줄 맞춰 서주십쇼!"

"십쇼? 이 십쇼키가 십쇼는 얼어뒤질.... 똑바로 발음 안 해?"

"줄 맞춰 서주십시오!"

꼰대같이 병사들 갈구는 시작한 이상한 새끼들도 있다. 군대나 예비군 훈련이나 평소에 못 보는 괴상한 놈들 많은 건 똑같다. 나는 저런 게 혐오스럽다. 진심으로.

무엇보다 병사고 예비역들이고 나를 대놓고 쳐다보거나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다. 정말 싫다. 평소에도 이런 식의 주목은 몇 번 받았지만 이런 식의 노골적인 관심은 진짜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 시선들의 의미는 뻔하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식된다.

이미 전역한 사람들이란 모두 군대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병장이었을 때다. 극소수인 공익근무요원들을 빼면 다 똑같다. 그러니까 곧 빠질대로 빠진 놈팡이들이라는 소리다. 그런 인원들을 데리고 무슨 사열을 할 것이며, 무슨 행사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군대는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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