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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73화 (73/224)

00073 우연과 필연 사이 =========================

설훈이 사람을 때렸다. 엄마에게 전해들은 바로 상황은 간단했다. 설훈이 MT를 갔는데 술을 마시다가 학과 선배랑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설훈이 선배를 때렸다. 선배가 많이 다쳤다.

구구절절한 상황설명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같은 사람이라서 치료비를 주고, 합의금 정도로 마무리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을 어떻게 때렸는지 모르겠지만 치료비를 합쳐 천만 원 정도가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일단 아버지가 설훈을 죽도록 팰 것 같은 나중 상황은 뒤로 하고서라도 감옥에 가게 하지는 말아야 할 터다.

중요한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빠의 카센터도 마침 자금 융통이 막혀있엇고 얼마 전 내부수리를 한 탓에 여윳돈이 없었다. 어떻게 육백만원은 적금을 깨더라도 만들 수 있지만 나머지 사백이 문제였다.

우리 집은 당장 천만 원도 융통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가난하다기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거다. 좋지 못한 시기에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난거다.

엄마는 내게 왜 전화를 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월세 십오만원, 보증금 사백. 내가 살고 있는 방이 그렇다. 엄마는 그 보증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 것과 다름없다. 엄마에게, 설훈에게 그 돈이 지금 필요하다. 애초에 내 돈이 아니니까 나는 그 돈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내놓으라면 내놓는 수밖에 없다.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엄마가 그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슬프다. 그러니 나는 그 돈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태원에서 대전까지 통학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무리다. 휴학하는 것도 힘들다. 이미 중간고사가 지나버렸다.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나는 내 자신이 비열하게 느껴진다. 돈 얘기가 나오니 박헌영이 생각난다. 모아놓은 돈이 많다고 했다. 사백만원 정도는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갚을 수 있을거다. 집에서 돈을 보내준다면 언젠가 갚게 될거다.

하지만 그건 죽는 것보다 싫다.

내가 박헌영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니까 나는 박헌영에게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된다. 박헌영이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박헌영은 선뜻 돈을 건네줄거다. 좀 심하게 말하면 안 갚아도 된다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싫다. 설훈이 병신 같은 놈이라는 생각도 든다.

설훈이 더 싫어졌다. 죽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죽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죽는다면 합의금을 주지 않아도 되잖아.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박헌영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박헌영하고 결혼을 하는건? 정말로 그런 건 어떨까?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돈도 잘 벌고, 성실하고, 의외로 책임감도 있다.

“헤헤…….”

나는 웃는다. 병신처럼 웃는다. 돈 앞에서, 겨우 사백만원 앞에서 나는 방금 전까지 상상하는 것조차 싫어했던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이렇다. 손바닥 뒤집듯 얼마든지 필요에 따라 태도를 바꿀 수 있다. 고결함과 순수함 같은건 어디에도 없다.

나는 돈 앞에 무력하고 추잡한 사람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그 짧은 순간동안 나는 어떻게 해야 박헌영을 사랑할 수 있을지까지 고민했다.

“야, 너 왜 그래….”

이선준이 내 앞에서 불안하게 말한다.

결국 살아있어서 문제다. 설훈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죽어버렸다면 좋았겠지만, 자살했다면 좋겠지만 설훈은 어쨌든 지금 살아있다. 경찰서건 어디건 가 있겠지. 아니면 지금 당장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터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었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감옥에 가면 안되겠지. 나는 억지로 입을 연다. 이선준에게 말한다.

“그래도 동생이잖아.”

이제와서 우애를 논하는게 아니다. 내 주변 인물이 전과자가 되는 게 싫다. 그러면 내 마음이 안좋다. 마음이 안좋은 건 정말 안좋은 일이다. 설훈의 죄가 나에게 번져오는거다. 그런 건 정말 사양이다.

나는 이선준에게 모든 걸 말한다. 폭행과, 합의금과, 월세 보증금에 대해서 전부 말한다. 이선준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다. 고개를 숙이고, 오뎅탕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엄마도 내게 보증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도 이선준에게 설명만 했을 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말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대방에게 무언가 요구한다. 엄마의 경우에는 보증금이다. 나의 경우에는 뭘까. 이기적이고 몰염치해서 그걸 말하지 않는게 아니다.

단순한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이다. 인간은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헌영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억지로 떠넘겨주듯 돈을 안겨줄거다. 그리고 나는 다시 빚을 지게 될거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박헌영을 거절할 수 없을거다.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에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거다. 마음은 아니더라도 몸은 허락해야겠지. 아니면 죄책감과 미안함, 고마움 때문에 없던 마음까지 생겨날수도 있다.

이선준에게 돈을 빌리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항상 그래왔듯, 이선준과 나는 사람의 말에서 항상 진의를 읽어내려 노력해왔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선준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거다. 나를 아니까 읽어냈을거다. 돈을 빌려달라는게 아니다.

“내 방으로 와. 넓잖아.”

“…….”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너무 뻔하게 나온다. 보증금을 받고, 자기 방으로 와서 살라는 뜻이다. 이선준은 같이 살자는 식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오라고 한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마치 놀러오라는 것 같은 말투다.

나는 왈칵 운다. 이건 슬퍼서 우는거다.

기뻐서 우는거다.

고마워서 우는거다.

서러워서 우는거다.

추접해서 우는거다.

우는 내가 병신같아서 우는거다.

내 처지가 너무 비참하고 한심해서 우는거다.

“으윽…….”

“야, 내가 너 울린 거 같잖아.”

“너가 울렸잖아…….”

이선준은 머리를 긁는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나는 조금 더 운다. 박헌영은 안 되지만 이선준은 된다. 나는 내 마음 속에 그런 선을 그어놓고 있다. 당연하게도, 너무 당연하게도 그렇다.

그래도 아직 이선준은 박헌영처럼 나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다.

하지만 나는 조금, 조금은 더 운다. 결국 이것이 박헌영에게 다른 상처를 주게 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이 상황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 박헌영을 거절한 것과 더불어 박헌영에게서 나는 확실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탓이다.

시간이 좀 지났다.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집 주인과 실랑이가 있었다. 집주인은 계약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돈을 어떻게 주냐고 언성을 높였다.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맞이었기에 나는 애원했다. 솔직하게 전부 말하고 눈물을 글썽거리자 집주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계좌번호를 물었다.

내가 여자라서, 예쁜 여자라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돈을 보냈다. 설훈의 일은 해결된다. 엄마는 걱정했다. 나는 이선준의 집에서 살거라고 당당하게 말해버렸다. 엄마는 잠깐 화를 내려고 했지만 그만둔 것 같았다. 내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엄마도 안다. 엄마는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게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집에 내려오라고 화를 내지도 못한다.

돈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돈은 나쁘지 않다. 돈이 무서운 게 아니다. 돈이 악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돈이 있어서 슬픈 사람은 나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돈을 증오한다.

엄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잘못이다. 내가 남자였다면 남자 집에 얹혀산다고 엄마가 우는 일도 없었을거다. 내가 여자여서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한편으로는 서럽다. 내 삶은 양비론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다. 뭐 더 좋은 말로 일장일단이겠지만. 그런 어쩐지 웃긴 것 같은 말을 쓰고 싶지는 ㅇ낳다.

“짐 별로 없네?”

“어지간한 건 다 집에 보냈어.”

나는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가지고 이선준과 함께 이사를 한다. 보따리 몇 개, 박스 몇 개가 전부다. 식기를 비롯한 것들은 이선준의 집에 없는 것을 제하고 전부 집에 택배로 보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사하면서 옮겨야 할 물건은 정말 적었다. 이상할 정도로 적다. 이사가 아니라 잠깐 놀러온 것 같은 기분이다.

확실히 혼자 쓰기에는 넓은 방이다. 나는 짐을 내려놓고 가만히 방을 둘러본다. 살풍경할 정도로 잘 정돈된 방에는 빛살에 떠다니는 먼지조차 경건하게 보인다.

일단 이번 학기까지, 나는 여기에 산다. 나는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선준의 얼굴을 본다. 나는 이선준을 올려다보고 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쩐지 이건 필연인 것만 같다.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든다.

사실 우연이다. 박헌영이 내게 고백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천연덕스럽게 박헌영에게 돈을 꿔달라고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훈이 사람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돈을 마련해야 할 일은 없었을거다.

아버지가 카센터 리모델링을 하지만 않았어도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을거다.

그리고 그 날, 이선준과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이 방에 오게 되지는 않았을거다.

전화가 두 시간만 일찍, 박헌영과 있을 때 왔었더라면 또 모르는 일일 터였다.

이것들은 모두 우연이다. 하지만 그 모든 우연이 섞여버린 탓에 나는 오늘부터 이선준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이것은 무서울 정도로 많은 우연들의 결과물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 중 우연 아닌 것이 없듯, 그 모든 우연의 결과는 필연이라 명명될 수 있다.

나는 이 지독할 정도의 필연성이 두려워진다. 이제 다른 우연들은 또 어떻게 엮이고 풀려서 나를 어떤 필연의 세계로 보내버릴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나는 내 이야기의 결말이 어찌될지 알 것 같은 불안한 예감, 예감이라기보다 계시에 가까운 감각을 느낀다.

나는 이선준을 사랑하게 되는걸까. 이선준과 나는 서로 사랑하게 되는걸까. 필연을 넘어선 운명이라는 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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